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국민연금 개악 논란:
기금 고갈론은 보험료 인상 위한 호들갑

국민연금 제도발전위원회 등은 8월 17일에 발표한 자료에서 두 개의 안을 제시했다.

하나는 더 내고 지금처럼 받는 안(가 안)이고 다른 하나는 더 내고 덜 받고 더 늦게 받는 안(나 안)이다. 차악과 최악 중에 고르라는 식인데 눈 가리고 아웅 하기다. 마치 짜고 치기라도 하듯, 개혁적 연금 전문가들 중에도 후자를 강력히 비판하는 이는 많지만 전자에 대해 문제삼는 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보험료 인상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금을 지금대로, 심지어 더 받기 위해서라도 노동자들이 보험료를 더 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기업주들에게 세금을 더 거둬 재정 지원을 할 수도 있고, 보험료 중 기업주들의 부담을 늘려 연금 재정을 더 확보할 수도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기업소득은 크게 는 반면 가계소득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물론 이번에 제시된 국민연금 제도개선 방향 중 가 안은 지난 30년 동안 정부가 제시한 국민연금 ‘개혁’안과 한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비현실적으로 긴 기금 적립 기간을 30년 정도로 단축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국민연금 제도 개혁은 적립된 기금이 앞으로 70년 동안 고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1998년, 2003년, 2007년에 이뤄진 국민연금 ‘개혁’은 모두 40년 뒤면 기금이 고갈된다며 보험료를 인상하고 연금을 삭감했다. 이번에 발표된 것 중 나 안도 2057년이면 기금이 고갈된다며 2087년까지 고갈되지 않도록 보험료를 대폭 인상하고 연금을 삭감하고, 더 늦게(68세부터) 받도록 하자는 안이다.

왜 굳이 70년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국민연금재정추계위원회는 다른 나라에서도 수십 년 앞을 내다보는 재정추계를 한다고 답할 뿐이다. 그러나 재정추계를 하는 것과 그것을 기금 적립의 목표치로 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예컨대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등은 모두 수십 년에서 100년을 내다보고 재정추계를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지급할 연금을 기금으로 쌓아 두지는 않는다. 독일과 영국의 경우 바로 이듬해에 지급할 연금 정도만 확보해 둔다. 미국은 3.3년치, 일본은 3.8년치만 적립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기금의 규모는 연금의 미래와 별 관계가 없다.

사실 단순히 생각해 보면 한 사회의 노인 인구 부양 능력은 그 사회의 생산력에 달려 있다. 그 비용을 마련하는 것도 형식만 다를 뿐 결국 그 사회에서 생산된 부를 분배하는 문제일 뿐이다. 예컨대 한국의 노동자들은 개별적으로 부모를 부양하는(용돈) 반면 연금 제도가 발전된 나라는 그 개별 부양비를 보험료로 거둬 공적연금으로 지급한다. 후자의 방식은 부를 재분배해 노인들의 빈부격차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니 더 나은 방식이다.

그런데 기금 적립은 이런 재분배에 별 도움이 안 된다. 천문학적 규모로 적립된 기금이 현금 다발로 금고에 보관돼 있다면 기금의 가치는 매년 하락할 것이다. 화폐 가치가 매년 낮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보험료를 낸 사람들에게 낸 만큼 돌려주지도 못한다.

그래서 기금은 채권, 부동산, 주식 등 대부분 어딘가에 투자돼 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기금을 어디에 투자할지 정하고 이로부터 수익을 거둬 기금의 규모를 불린다. 그리고 기금 적립이 정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투자로 얻은 수익에서 연금을 지급하는 셈이다.(지금까지 적립된 638조 원의 기금 중 306조 원은 이렇게 추가된 수익금이다.) 그런데 기금의 규모가 커질수록 장기적 수익률은 경제 성장률에 수렴하게 마련이다.(그림 1)

요컨대 얼핏 보면 한국에서는 쌓아둔 기금에서 연금을 지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독일이나 영국과 마찬가지로 현재 경제에서 생산된 가치 중 일부가 현재의 노인들에게 지급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고 나면 연금 지급에 필요한 비용은 기금 투자에 대한 수익이 아니라 세금 등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그럴 수 없는 경제 상황이라면 기금도 급속히 고갈될 것이다.)

실제로 한국 경제 수준은 지금은 물론 앞으로 늘어날 노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할 잠재력이 충분하다. 현재 한국의 연금 지출(전체 지급액)은 GDP의 2.6퍼센트밖에 안 되고(OECD 평균 8.2퍼센트), 지금대로라면 노인인구 비율이 41.2퍼센트나 될 것이라는 2060년에도 GDP 대비 11퍼센트밖에 안 된다. 유럽연합 소속 28개국은 노인인구 비율이 18퍼센트(2013년 기준)일 때 GDP 대비 11.3퍼센트를 공적연금 비용으로 지출했다.

기금 적립이 실제 연금 지급 능력에 끼치는 영향은 거의 없는 반면, 정부가 주식 시장 등을 떠받쳐 기업주들의 이윤을 지켜 주는 데에는 매우 유용하다. 박정희도 (실패했지만) 중공업 육성을 위해 국민연금 제도를 시행하려 했다. 보험료를 거둬 투자 자금으로 쓰려고 한 것이다. 지금도 국민연금은 국내 대기업들의 최대 주주다. 박근혜는 이를 이용해 이재용의 경영권 승계도 도와 줬다. 이를 막기 위해 ‘스튜어드십 코드’(책임 투자)를 도입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까닭이다.

기금 고갈론은 기업주들을 위해 노동자들의 보험료를 올리기 위한 속임수일 뿐이다.

스튜어드십 코드?

‘기관투자자의 책임 투자’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정부가 기업주들의 사익 추구에 공적 재정을 함부로 내줘서는 안 되고 오히려 공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문형표가 이재용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국민연금의 주주권을 행사했는데, 그 결과 오히려 국민연금은 수천억 원의 손실을 입은 사건이 있다. 이 경우에 국민연금은 실제 주인인 국민에게 손실을 입힌 셈이니 이를 미연에 방지하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를 스튜어드십 코드라고 한다. 물론 이 자체는 옳은 문제의식이지만 근본적인 한계도 있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정부 자신이 중립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철저히 관철하려고 하는 시도는 공상적이다. 그리고 공상적 목표에 매달리는 것은 진정으로 필요한 일에 소홀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기 쉽다. ‘사회적 대화’에 매달리다가 투쟁에 소홀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컨대, 일부 개혁주의자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연기금 사회주의’로의 발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즉, 정부가 연기금을 활용해 대기업들을 통제할 수 있다면 선거를 통해 집권한 뒤 사회주의로 나아간다는 개혁주의 전략이 실현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국유화 자체는 사회주의와 별 관계도 없을 뿐 아니라, 이런 전략은 이미 칠레 등 여러 나라에서 비극으로 끝난 바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전략에 조금도 미련을 둬선 안 된다.

국민연금 ─ 덜 내고 더 받아야

한국의 국민연금은 일종의 적금처럼 운영되는데, 퇴직 전까지 낸 보험료를 퇴직 후에 연금으로 돌려받는 식이다. 그러다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낸 보험료가 기금으로 적립된다. 2018년 5월 현재 누적된 기금은 634조 원이다. 2018년 한국 정부 예산이 430조 원가량인 점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규모다. 이 기금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연금을 받는 사람은 얼마 안 되고 액수도 적은 반면 보험료를 내는 사람은 많고 그 액수도 크기 때문이다.

현재 연금을 받는 사람은 367만 명이고, 보험료를 내는 사람은 2182만 명이다. 또, 현재 국민연금 수급자의 절반 이상은 30만 원도 못 받고 있다. 기초연금처럼, 받는 연금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적금처럼 자기가 낸 보험료에 비례해서 받기 때문이다. 2017년 현재 연금을 받기 시작한 노인들은 평균 17년밖에 보험료를 내지 못했다(2018년 현재 국민연금 제도는 40년 동안 보험료를 낼 경우 자기 평균 소득의 45퍼센트를 돌려준다). 일부 소득재분배 장치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도 부익부 빈익빈이기는 마찬가지다.

반면 보험료는 소득의 9퍼센트나 된다. 노동자들의 경우 고용주가 절반을 부담하도록 돼 있지만, 그조차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는 임금이 생계비에도 빠듯하기 때문이다. 월급이 200만 원밖에 안 되는 노동자도 매달 9만 원씩 국민연금 보험료로 징수당한다. 심지어 일부 노동자들은 보험료 9퍼센트를 모두 부담해야 한다.

이번 재정추계에 따르면 국민연금 기금은 2041년쯤 1778조 원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2017년 현재 가치로 1100조 원가량 된다니 정부 예산의 갑절이 넘는 규모다.

이 기사는 발행 뒤에(2018.9.8)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문장이 추가·수정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