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채택된 유엔 세계인권선언 13조는 이렇게 규정한다. “모든 사람은 자국을 포함하여 어떠한 나라를 떠날 권리와 또한 자국으로 돌아올 권리를 가진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무기력하다. 떠날 권리가 있다 해도, 떠난 뒤 어떤 국가로 들어가려면 비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동 등에서 벌어진 제국주의 열강의 개입과 전쟁은 끊임없이 난민을 양산하고 있지만 미국, 유럽 등 선진국들의 난민 수용은 매우 제한적이다.

올해 열린 유럽연합 정상회담은 유럽연합 회원국 내에서 난민의 이동을 제한하고, 외부 장벽을 강화한다는 내용에 합의했다. 아동뿐 아니라 난민 가족 전체를 북아프리카에 억류시키는 난민 강제수용소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트럼프가 불법 이민자에 대해 잔인한 가족 분리 정책을 밀어붙이려다 반발에 부딪혀 철회한 직후에 그랬다.

각국 지배자들의 반反이민 정책에 힘입어(또는 그것을 강화하며) 유럽에서는 파시스트들이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다. 최근 독일 켐니츠에서 극우와 나치 5000여 명이 시위를 벌였고, 스웨덴민주당 등 극우 정당들이 득세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우익들은 제주도에 있는 예멘 난민들이 청년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테러 등 범죄를 일으키기 위해 잠입한 ‘가짜 난민’이라는 거짓말을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난민 보호에 대한 책무”를 운운하면서도 난민 신청자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인종차별적 우익들의 거짓말을 방관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이집트 등 난민이 많은 나라들을 대거 무사증 입국 국가에서 제외했다.

난민뿐 아니라 이주노동자들도 ‘불법 체류자’로 몰려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요당하고 있는데, 문재인 정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도 강화했다. 올해 1월 법무부는 특별 단속 지역, 합동 단속 기간, 단속 인원을 모두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이주노동자들은 고용허가제 때문에 국내에서 사업장을 이동할 자유조차 없다. 이런 경제적 조건과 차별 때문에 본국에 두고 온 가족들과는 사실상 생이별하게 된다.

국경이라는 장벽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은 피부색 다른 외국인들만이 아니다.

8월 20일부터 일주일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지만, ‘통 큰 만남’에 대한 이산가족들의 기대와 달리 100명 안팎으로 제한된 상봉 규모는 그대로였다. 2000년대 이래 지금껏 13만 2000여 명이 상봉 신청을 했지만 실제 상봉을 한 사람은 3만여 명이 못 되고 신청자 중 사망자만 8만여 명이다.

그런데 이런 제한적인 이산가족 상봉조차 꿈꿀 엄두를 못 내고 숨죽이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탈북민들이다. 탈북민들 중에는 ‘할 수만 있다면 북한으로 돌아가 가족을 만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남한에서 그들은 국정원의 감시 하에 놓여 있고, 밉보였다가 간첩으로 몰리기도 하기 때문에 조용히 입 다물고 살아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이산가족과 탈북민은 제국주의 열강의 점령, 전쟁, 그 뒤로 이어진 남북 간 체제 대결로 점철된 한반도 역사의 희생자들이다. 그러나 정작 지배자들은 자신들이 쌓아 올린 국경에 별로 제약받지 않는다. 보통의 탈북민들이 목숨 걸고 두만강을 건널 때, 김정은은 스위스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요새화된 유럽’(국경 순찰과 단속 강화) 정책 때문에 2015년 비극적으로 숨진 시리아 난민 아동 아일란 쿠르디 ⓒ출처 Nilufer Demir

만국의 노동자

지배자들은 국경을 넘어 다국적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고, 해외 관광 사업을 고무하고, 좀 더 ‘값싼’ 노동력을 이동시켜 이득을 볼 때에는 “세계화”를 찬양한다.

그러나 비참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피난처를 찾으려 하면 못 들어오게 하고, 시민권을 박탈하고, 박해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역겨운 이데올로기들을 만들어 낸다.

지배자들은 국경 통제가 사라지면 갑자기 많은 이주민이 밀려 들어 국가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빈곤, 실업, 주택난 같은 사회 문제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탈북민들도 남한 정부로부터 받는 턱없이 부족한 지원금을 이유로 복지 재정을 깎아먹는다는 은근한 비난의 눈초리를 받는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그 국가의 생산에 참가할(따라서 자본가에게 이윤을 가져다 줄) 노동자도 는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사실 사람들의 삶이 팍팍한 것은 경제 자체가 불황이고 지배자들이 인간의 필요보다 이윤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경 통제와 그에 뒤따르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에 대한 차별은 계급 문제라는 진정한 쟁점을 숨기고 분노를 희생양에게 돌리는 효과를 낸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국민 국가의 관점이 아닌 국제주의 시각에서 이런 문제들을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가 ‘각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가 아닌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하고 말했듯, 국제 노동계급의 단결과 그것을 위한 교류의 관점에서 국경 통제에 단호하게 반대해야 한다.

마르크스 자신이 당대 영국과 아일랜드 이주 노동자들의 단결을 촉구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평범한 영국 노동자들은 아일랜드 노동자들을 자신들의 생활 수준을 낮추는 경쟁자로 여겨 증오한다. 아일랜드 노동자들에 관한 한, 영국 노동자는 자신이 지배 민족의 일원이라고 느끼고 따라서 아일랜드에 대항해 자기 조국의 귀족과 자본가들의 도구가 되고, 그 결과 자신을 지배하는 귀족과 자본가들을 강화한다. ... 아일랜드인은 이자까지 덧붙여서 보복을 한다. 그는 즉시 영국 노동자를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의 공범자이자 그것의 어리석은 도구로 보게 된다. … 이러한 적대 관계야말로 영국 노동계급이 자신의 조직을 가지고 있음에도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비밀이다. ... 그[자본가] 계급은 그 사실을 완전히 알고 인식하고 있다.”

이렇듯 마르크스는 국경을 기준으로 노동계급 사이를 이간질하고 분열을 부추기는 것이 지배자들의 핵심 지배 전략이라는 점을 일찍이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자유왕래나 이주의 자유는 먼 미래에나 가능할, 또는 비현실적인 요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원칙은 지금 유럽과 한국에서 모든 이민 통제와 인종차별에 반대하면서 난민 방어 운동을 건설하는 과제와 매우 밀접하다. 지금 배 위에서, 국경에서, 난민 수용소에서 죽어가고 있는 난민들에게 이주의 자유는 더 나은 삶 이전에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절박한 요구다.

한 나라 안에서도 중요한 원칙이다. 특히 본국 노동자와 이주노동자 사이의 이간질에 반대하는 것(한국에서는 대표적으로 건설 노동운동 안에서 이주노동자 방어하기)은 노동운동이 강력하게 단결된 투쟁을 건설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계다. 앞서 다뤘듯, 경제 위기가 심화할수록 지배자들은 노동계급을 인종, 성별, 종교, 고용 형태, 나이 등으로 갈라치기하고 약화시키려 한다.

이윤 체제와 세계적 불평등, 제국주의의 난도질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주와 난민 (통제) 문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주의 자유와 자유왕래는 부유한 나라의 부자 시민들의 특권이 아닌 보편적 권리가 돼야 한다. 국경을 넘어선 교류 속에서 국제 노동계급에게는 공동의 경험이 축적되고 나아가 국제적 단결의 토양이 만들어질 수 있다.

우리는 노동계급의 국제적 이동을 제약하고 통제하려는 모든 시도에 단호히 반대하면서, 동시에 자유로운 교류와 그를 통한 단결 도모를 한결같이 옹호하는 세력이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