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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대화’와 투쟁은 병행 가능한가?

경제 위기 시에는 변변찮은 개혁도 얻기가 쉽지 않고, 조건을 지키려 해도 큰 투쟁이 필요하다. 특히, 지금 경제 위기가 장기화되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얼핏 보면 한국은 극우파가 부상하는 서구 나라들과 달리 문재인 정부의 등장으로 개혁 가능성이 열린 듯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도, 만만하지도 않다.

문재인 정부의 최근 우향우도 경제 위기 악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문제를 봐도, 문재인 정부가 ‘돈 안 드는 개혁’을 추진한 탓에 노동자들의 조건은 거의 개선되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이 불거졌다. 조선업과 한국GM, 금호타이어 등의 구조조정 과정은 문재인 정부가 일자리를 만들기는커녕 일자리 학살에 앞장섰음을 보여 준다.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 원’ 공약은 아예 노골적으로 내던져졌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는 노동조합 고위 상근간부층을 사회적 대화에 끌어들여 포섭하려 애쓰고 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조건이 괜찮은 노동자들의 양보를 끌어내려는 것이자, 노동자들의 투쟁을 억제하려는 것이다.

문성현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이하 경사노위. 노사정위의 후신) 위원장은 이 점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조직노동자들의 양보와 희생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노조 있는 곳의 노동자는 임금이 한껏 올랐다. 그때부터는 굳이 투쟁하지 않아도 된다.” 인터뷰 진행자가 “그러면 경사노위는 싸움을 말리는 곳입니까?” 하고 묻자 문 위원장은 “그렇죠” 하고 답했다.(YTN 생생인터뷰 2018년 8월 28일)

문재인 정부의 이런 시도가 안정적으로 추진되고 실현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 등장 이후, 노동조합 운동은 잠재력을 보여 주고 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선두에 섰고, 새로운 노동자 부문들도 투쟁에 나서고 있다. 이런 투쟁들은 주로 항의 형태로 전개되기는 했지만, 최근에는 파업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투쟁들이 그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가령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이 누더기가 되고, 최저임금 인상을 상쇄하는 개악이 추진되면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이 높아졌지만, 이런 불만이 실질적 개혁을 얻어 낼 만한 수위의 투쟁으로 확대되고 있지 못하다.

수동성

6월 30일 7만 명 규모의 노동자대회를 치른 후, 민주노총 지도부의 관심은 빠르게 대화 복원으로 옮겨졌다. 7월 3일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의 대통령 면담에서 시작된 이런 행보는 8월 16일 노사정대표자회의 복귀 결정으로 이어졌다.

이런 지향은 민주노총 집행부가 하반기 계획을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 데서도 잘 드러났다. “[민주노총이] 대중 투쟁을 확장해 왔고 대중 투쟁력을 높여 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제도화된 초기업적 노사관계를 구축하지 못한 채 즉자적 대응 투쟁, 반대와 저지 투쟁에 머물러 있다.” 여기서 ‘반대와 저지에 급급한 투쟁’이라는 문구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대화로 무게중심을 이동할 때 항상 꺼내 드는 표현이다.

물론 민주노총 지도부는 대화 일변도가 아니라 “투쟁과 교섭의 병행”을 강조하고 있다. 하반기 총파업 계획도 내놓았다. 그러나 이런 투쟁을 하려면 문재인 정부의 우향우와 그 본질을 폭로하고 그에 맞서 일관되게 싸우자고 독려해야 하는데, 지도자들이 정부와의 신뢰 회복을 전제로 대화를 추진하면서 이런 효과를 기대하기는 난망하다.

민주노총 중집이 노사정대표자회의 복귀를 결정하고 나서 지난 3주 동안 각종 대화가 빠르게 진행됐다. 문성현 경사노위 위원장과의 면담, 노사정대표자회의 실무협의, 노사정대표자회의 의제별 위원회와 업종별 위원회 회의, 청와대 시민사회수석과의 간담회, 정부 부처들과의 노정협의, 민주당 당대표와의 간담회 등등이 그것이다.

이런 각종 대화는 민주노총이 최소한의 신뢰 회복 조처로서 문재인 정부에 요구했던 것들이 거듭 무시되고 우향우 정책이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중단없이 추진됐다. 쌍용차나 전교조 법외노조 같은 현안 외면, 규제완화법 추진, 환노위 고용노동소위에서 이정미 의원 배제, 이명박 정부 시절의 노동부 차관 이재갑을 신임 노동부 장관으로 지명한 것 등이 그런 사례다.

이처럼 노조 지도부가 대화 추진에 주력하며 부산한 분위기를 (언론 등을 통해) 지켜보는 보통의 노동자들은 노조 지도자들의 총파업 계획을 현실감 있게 느끼기가 어려울 것이다. 누군가 협상장에서 노동자들을 대리한다는 생각이 만연하면 수동성이 강화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싸움을 말리는” 사람들이 바라는 바다.

왜 모았지? 6월 30일 문재인의 배신에 실망한 노동자 8만 명이 모였다. 그런데 민주노총 지도부는 사회적 대화를 재개하겠다고 해 조합원들을 실망시켰다 ⓒ조승진

싸움을 말리는 게 임무인 문성현 위원장

문성현 경사노위 위원장은 자신이 “싸움을 제일 잘 말릴” 것으로 기대돼 “문재인 대통령이 경사노위를 맡긴 것”이라고 말했다. 문성현 씨는 금속연맹 위원장이자 민주노동당 대표를 지냈다.

이 밖에도 최근 민주노총 위원장을 면담한 이용선 청와대 시민사회수석과 강문대 청와대 사회조정비서관 등이 그런 인물들이다. 이용선 씨는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이자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대표 출신이고, 강문대 씨는 민변 노동위원장이자 단병호 의원 보좌관 출신이다.

이들의 구실은 민주노총이 문재인 정부를 상대로 싸우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친문 인사들은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노동운동의 저항 탓으로 돌리는 어처구니없는 남 탓 타령을 해 왔다.

이들이 민주노총을 사회적 대화로 복귀시키는 데 열을 올리는 당면 이유는 지지율이 50퍼센트대로 떨어진 문재인 정부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서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추락하고 노동자들의 불만이 높아진 지금 노사정 대화에 복귀하는 것이 특히 문제인 이유다.

이들이 민주노총을 사회적 대화로 복귀시키는 데 열을 올리는 좀 더 장기적인 이유는 한국 자본주의의 경쟁력을 위해서 노동자들의 양보를 얻어 내는 것이다. 문성현 위원장은 “노사 갈등관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공멸”한다며 공공연히 노동자들의 임금 양보를 강조한다. 그는 “상생기금 1퍼센트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면서 “임금 스펙트럼 가운데 중간 어디쯤으로 사회적 합의를 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또, 문성현 위원장은 최근 “성동조선해양 상생 협약”을 중재하면서 이를 구조조정의 모범인 것처럼 제시했다. 이것은 정리해고를 철회시킨 협약으로 알려졌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노동자들은 무려 28개월간 무급휴직을 하고 M&A(인수·합병)와 경영정상화에 협력한다는 거의 백지 위임에 가까운 희생을 강요당했다.

이런 사례들은 경사노위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준다. 그것은 한편으로 한국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노사 협조(계급 협조)이다. 문성현 씨 표현을 빌리면, “노동자이지만 사용자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는 “노사 공동운명체 정신”이다.

경사노위의 과제는 다른 한편으로 “이해관계 당사자”라는 이름으로 노동계급 내부를 이간질하는 것이다. 가령 손영우 경사노위 전문위원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과정이 기존의 정규직 노조, 비정규직 노동자, 노동시장의 외부자 간의 갈등으로 개혁이 가로막[혔다]”면서 “이해관계자 간의 사회적 대화” 필요성을 주장한다(«노동사회» 202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그러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이 누더기가 된 근본 원인은 돈을 들이지 않으려는 정부 정책 때문이었다.

연대

요컨대 사회적 대화의 위와 같은 성격 때문에 대화와 함께 투쟁을 강력하게 병행하기가 어렵다.

한편, 민주노총 집행부는 문재인 정부가 경제 민생 문제에서는 후퇴하고 우경화하고 있다고 보면서도,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 문제에서는 잘하고 있다는 진단을 내놨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려는 평화체제 로드맵과 반민주-분단 적폐청산은 “노동진영의 개혁과제와 공존하는 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드 문제 하나만 봐도 잘 드러나듯이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평화와 제국주의 문제에서 결코 일관된 진보 입장이 못 된다.

또, 지배자들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심화 노력이라는 조건에서 민주주의적 요구에 우선순위를 놓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지금은 노동자 계급의 고유한 과제·요구들과 함께, 여성과 성소수자 차별 반대, 난민과 이주자 방어, 반제국주의 문제들을 더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 노동자들은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문재인 정부로부터 독립적으로 정치 투쟁을 해야 한다.

만약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 문제에서는 문재인 정부를 지지한다면 십중팔구 문재인 정부에 맞서 일관되게 투쟁하기 어렵다. 최근 민주노총은 남북 정상회담(9월 18~20일)과 겹친다는 이유로 예정된 집회 일정 등을 취소했는데, 이 사례는 그런 문제점을 얼핏 보여 준다.

글 서두에서 지적했듯이, 지금처럼 경제 위기가 장기화되는 상황에서는 변변찮은 개혁도 얻기가 쉽지 않고 조건을 지키려 해도 큰 투쟁이 필요하다. 민주노총이 하반기 과제로 제시하고 있는 것들도 대개 그렇다. ILO 핵심협약 비준도 선언에 그치지 못하게 하려면 마찬가지다.

민주노총의 좌파 활동가들은 문재인 정부의 우향우 정책의 문제점, 사회적 대화의 효과와 그 합의 내용의 문제점, 정부와 사용자의 노동자 이간질을 폭로하고 그에 맞설 수 있도록 노동자 계급정치를 바탕으로 연대가 확대되도록 애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