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농과 농업 노동자들이 일부 악질적인 백인 농장주들의 토지를 점령하면서 지난달에 짐바브웨의 정치적 위기가 주요 국제 뉴스로 떠올랐다.

짐바브웨는 왜 정치 위기를 겪고 있는가? 먼저, 식민지 정책과 인종주의 때문에 수백만 명에 이르는 흑인들의 삶이 파탄났던 짐바브웨의 근대 역사부터 살펴보자.

원래 짐바브웨는 가장 선진적인 초기 아프리카 사회들 가운데 하나였다. 짐바브웨의 석조(石造) 유적을 보면 이미 12세기에 쇼나1왕국이라는 부유하고 복잡한 아프리카 흑인들의 사회가 번영을 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훗날 백인 이주자들은 이것을 보고 너무 당혹스러운 나머지 모든 증거를 무시한 채 “외부인들”이 그 석기 건축물들을 만든 게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쇼나의 후예들은 오늘날 짐바브웨 인구의 약 4분의 3을 차지한다. 19세기 초에는 엔데베레족이라는 또다른 흑인들이 짐바브웨에 들어왔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영국 제국주의의 우두머리 세실 로즈가 이끄는 백인들이 짐바브웨를 침략했다. 영국은 짐바브웨와 조약을 체결해 광업권을 따냈고 그 대가로 무기를 대주면서 짐바브웨를 ‘보호’해 주었다. 로즈의 브리티시 사우스아프리카 회사는 무력과 속임수를 써서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기네 땅에서 떠나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게 된 아프리카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2년 간의 전쟁 기간 동안 백인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아프리카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다. 백인들이 승리하자 그들은 짐바브웨의 광물 자원을 추출하기 위해 가장 야만적인 방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강제 노동 체제 아래서 흑인 광산 노동자들은 폐쇄된 수용소에 갇혀 겨우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임금을 받았다. 1978년 국민 1인당 소득은 백인이 7천 달러, 흑인이 470 달러였다! 백인들은 가능한 모든 토지를 장악했다. 그들은 하인들, 수영장이 딸린 대저택, 호화 사치품을 자신의 타고난 권리로 여기게 됐다.

1965년에 백인들은 영국 정부가 자신들의 여러 특권 가운데 일부를 폐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흑인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땅에서 모든 권리를 거부당했다. 흑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특수부대와 경찰들이 수천 명을 도살했다. 흑인 해방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은 재판 없이 투옥됐다. 현재 짐바브웨의 대통령인 로버트 무가베도 1964년부터 1974년까지 1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이 기간 내내 백인들로만 이루어진 정부를 이끌었던 사람이 바로 이안 스미스였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 만큼 흑인 차별이 심하고 폭압적인 정권에 맞서는 흑인들의 저항은 시위와 파업에서 무장 투쟁으로 옮아갔다. 백인 정권의 기반은 겨우 인구 25명 당 한 명이었다. 국내외에서 계속된 흑인들의 투쟁과 유엔의 권고에 따른 세계 각국의 경제 제재를 견디다 못한 백인 정권은 마침내 손을 들었다.

흑인 정권의 탄생

1980년 2월 최초의 자유로운 총선에서 로버트 무가베의 ZANU(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동맹) 당이 승리를 거뒀다. 4월에 마침내 인구의 95퍼센트를 차지하는 흑인들의 정부가 들어섰고 나라 이름도 짐바브웨로 바꿨다. 수백만 명이 한 세기에 걸친 소수 백인의 억압 통치가 끝난 것을 축하했다. 신임 대통령 무가베는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지만 새 정부는 떠나가는 백인 정권이 의도적으로 망가뜨린 경제를 물려받았다.

소떼의 규모는 3분의 1로 줄었고, 수천 마일의 도로가 쓸모없게 됐으며, 7년 동안 학교의 3분의 2 이상이 문을 닫았다. 그래도 어쨌든 무가베는 개혁을 시도했다. 국제 은행가와 기업들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지만 말이다.

흑인 통치 초기에 보통 사람들의 삶이 굉장히 좋아졌다. 1980년에서 1985년 사이에 영유아 사망률은 대략 절반으로 떨어졌다. 1979년에서 1990년 사이에는 1인당 교육에 대한 [정부] 지출이 2배 이상 올랐다. 초등 교육에 대한 지출은 거의 3배로 늘었다.

1980년대에 제조업 부문은 30퍼센트 이상 성장했다. 토지 개혁은 미미했다. 그 이유는 백인 정권을 종식시키는 과정에서 맺은 협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흑인 농민들을 마케팅위원회에 끌어들이거나 저장 시설을 늘리는 사소한 조치들만으로도 괄목할 만한 효과를 거뒀다. 1980년에서 1985년 사이에 전체 곡물 공급은 3배로 증가했다. 1982년에 가뭄이 닥치자 더 부유한 농부들에게는 소득세를, 기업에게는 법인세를 매기고 저소득층에게 무상으로 식량을 배급했다.

이 기간 동안 백인 지주들은 특권을 상실하지 않았지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들은 매우 관대한, 가끔은 지나치리만큼 관대한 대우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백인 인종주의 정권 시절의 범죄들에 대해 해명하라는 요구를 받지 않았다. 1에이커의 토지라도 상실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약탈했던 것에 대한 보상을 강요받은 사람도 없었다. 백인들은 쓸데없이 놀리고 있던 백인 토지에 흑인들을 이주시키려는 시도를 봉쇄했다. 그들은 과거 인종주의 지도자였던 이안 스미스의 정당 로디지아 전선을 계속 후원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국제 은행가와 자본가들은 무가베에게 정책을 바꾸라는 압력을 넣었다. 그들은 짐바브웨가 시장 개혁으로 급격히 바뀌고 사회 변화에 관한 모든 논의가 종식되기를 바랐다.

시장 경제가 부른 참혹함

결정적 시기는 1991년에 찾아왔다. 실업률이 거의 50퍼센트에 이를 지경이었다. 겨우 1만 개에 불과한 신규 일자리를 얻기 위해 30만 명의 학생들이 경쟁하고 있었다. 짐바브웨의 주요 수출 품목인 담배와 면화의 국제 시장 가격도 급격하게 떨어졌다.

그런데도 무가베 정부는 국제 금융가들과 절충한 계획에 따라 부채를 상환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짐바브웨의 빈민들과 전투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됐다. 그 전투는 IMF와 세계은행이 주도했다. 당시 IMF 총재였던 미셸 캉드쉬는 하라레로 와서 짐바브웨의 지도자들을 지지한다고 선언하고 이제 “현실주의적인 계획”에 동의했다고 발표했다.

그래서 ESAP, 즉 경제구조조정계획(Economic Structural Adjustment Programme)이 생겨났다. 얼마 뒤 ESAP는 ‘아프리카 민중의 영원한 고통’(Eternal Suffering for African People)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무가베 정부는 사회 복지 지출의 대폭 삭감, 국영 기업의 민영화, 식량 보조금 폐지, 다국적 기업의 진입 장벽 제거, 물가와 임금의 “시장 결정”에 동의했다. 그 계획이 실행에 옮겨졌을 때 공교롭게도 짐바브웨에 가뭄이 찾아들었다. 그것은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이 기억하기로는 최악의 가뭄이었다. IMF와 짐바브웨 정부의 자유시장 정책이 1990년대의 경제적·사회적 위기를 낳았다.

자유시장 정책 때문에 가뭄에 대처하는 것이 훨씬 더 힘들었다. 가뭄의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 ESAP는 식량 가격을 인상했는데 가뭄은 인상된 가격을 한층 더 높였다. ESAP는 운송 비용도 인상시켰는데 이것이 다시 식량 가격을 끌어올렸다. ESAP에 따르면 한편으로는 곡물을 수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옥수수를 수입해야 했다.

1992년 3월 짐바브웨는 곡물을 수출한 다음 그 3배의 가격으로 되사와야 했다. 짐바브웨의 평범한 사람들은 43퍼센트나 인상된 수업료와 40퍼센트가 오른 의료비에 직면했다. 비용 부담 때문에 산모들이 병원에 가지 않아 출산 도중 사망한 산모의 수가 40퍼센트나 증가했다.

최저 임금도 사라졌다. 시장이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연간 평균소득은 389파운드에서 279파운드로 떨어졌다. 독립 초기의 모든 성과는 ESAP의 몇 년 사이에 파괴되고 말았다. 진료소와 보건 교육의 축소, 그리고 빈곤 때문에 에이즈 확산에 가속도가 붙었고 현재 성인 인구의 25퍼센트가 HIV 양성 반응을 보이고 있다.

물론 짐바브웨 사람이 모두 똑같이 고통 받았던 것은 아니다. 경제구조조정계획은 계급 차별을 더 날카롭게 만들었다. 하라레의 유명한 쇼핑몰 샘 레비스에는 철갑상어 알이나 바닷가재 같은 신종 수입 식품이 등장했다. 한편 수백만 명이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었다. 바클레이나 론로 같은 대기업들과, 영미인들은 너무도 쉽게 돈을 벌었고 그렇게 번 돈을 국외로 빼돌렸다. 혜택을 누린 소수 엘리트들은 피부색을 가리지 않았다. 오늘날 짐바브웨의 가장 부유한 10퍼센트가 상품의 34퍼센트를 소비하지만 하위 10퍼센트는 겨우 3퍼센트만을 소비한다.

자유시장 정책은 노동자와 농민, 학생들의 저항을 낳았다. 하지만 무가베는 지역 유지와 다국적기업과 IMF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자신을 믿었던 사람들이 고통에 겨워 신음하는 것을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대안

1992년에 등록금이 엄청나게 오른 것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학생 시위가 터졌다. 1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짐바브웨 대학에서 쫓겨났고 시위는 가혹하게 진압됐다. 무가베의 군대는 하라레 동쪽의 금광 지대에서 더 나은 환경을 요구하며 시위하는 부녀자와 학생들에게 총을 쏘았다. 이러한 무가베의 조치들은 서방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금광 지대에서 대량 학살이 있은 직후 미국 군대가 짐바브웨에 파견돼 군사 기동 훈련을 했다. 1995년에 IMF와 서방의 은행가들은 파리에 모여 무가베가 “자유화”를 더욱 장려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수치보다 더 많은 금액을 제공했다.

하지만 위기를 막거나 저항이 증대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집권당과 연계를 맺고 있었던 노동조합 운동이 아래로부터 압력 때문에 과거와 결별하기 시작했다. 1997년 12월과 1998년 1월에 약 1백만의 노동자들이 직장을 이탈해 세금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에 합류했다. 보건의료 노동자, 공무원, 운송 노동자,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성공적으로 파업을 벌였다. 동시에 많은 타운쉽 ― (비유럽인이 거주하는) 지역이나 교외 ― 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독립 후 5년이 지난 1985년에 짐바브웨는 국민총생산(GNP)의 1.2퍼센트를 부채 원리금 상환에 지출했다. 오늘날 짐바브웨의 부채는 GNP의 1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반면 교육 예산은 8.5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무가베는 더이상 짐바브웨 노동자, 농민, 실업자들의 친구가 아니다.

1980년에 신생 독립국의 대통령이 됐을 때 무가베는 대기업과 대토지 소유자들과 협력할 것인지 아니면 그들과 대결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다. 그는 정치범을 석방시킬 만큼 용감하긴 했지만, 사유재산을 존중하고 다국적 기업에 협력하라는 압력에 저항할 만큼 강력하지는 못했다. 짐바브웨의 해방은 단순한 정치 권력의 이전을 넘어선 것이어야 했다. 그것은 사회혁명, 즉 실업자에게는 일자리를 주고 농민들에게는 토지를 주는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무가베는 부자들에게 협력하는 길로 나아갔고 그것이 비극의 씨앗이었다. 그는 오히려 스미스에게서 물려받은 법률들을 사용하여 흑인 노동자들의 파업을 짓밟았다. 수백만 명이 절대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데도 무가베 자신은 사치스럽게 생활했다. 소수 엘리트에게는 부와 토지를 잔뜩 선사한 반면, 흑인 농부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하는 것은 거부했다.

올해 세계의 이목을 끈 토지 점거는 애초에 빈농과 농업 노동자들의 자생적 운동으로 일어났다. 물론 전체 백인 농장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계급적 운동이 아니라 일부 악질적이고 잔인한 농장주만을 겨냥해 일어난 것이었다.

일부 언론은 토지 점거를 무가베가 부추겨서 일어난 일로 보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무가베는 이를 이용해 지지를 확대하려 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무가베를 지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농민들의 토지 점거 운동을 지지하며 전면적으로 확대되기를 바란다. 농민들은 토지를 장악한 뒤 정부에게 씨앗·농기계 등 설비·비료 등을 제공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보수적인 언론과 정치가들은 무가베가 짐바브웨를 결딴냈다고 한다. 하지만 보수적인 언론과 정치가들은 무가베의 장기 집권 동안 “현실주의적인” 경제 정책과 좌익적 표현의 중지를 칭찬해왔다. 무가베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의 요구를 충실히 수행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1985년에 영국 보수당의 총리 매거릿 새처는 무가베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안정과 경제 성장을 보장할 수 있을 거라고 믿을 만한 인물이다.” 하지만 짐바브웨를 좌절시킨 것은 바로 이런 자본주의 프로그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