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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4차 산업혁명이 노동의 미래를 바꿀까?
② 새로운 성장 동력이라는 허풍

디지털화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겠다며 요란을 떠는 것이 한국 정·재계만의 예외적 현상은 아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 경제의 디지털 전환을 강조하고, 빅데이터·사물인터넷·인공지능에 열광하며, 그것을 성장의 기회로 활용하겠다고 나서기는 미국·영국·독일·일본 등도 마찬가지다.

독일은 인더스트리 4.0을 통해 정보통신기술과 제조업의 융합을 시도하고 있다. 독일이 인더스트리 4.0 개념을 내놓은 것과 비슷한 시기에 미국도 첨단기술과 제조업의 접목을 추진하는 “국가 제조업 혁신 네트워크” 정책을 마련했다. 일본과 중국도 각각 “로봇 신전략”과 “메이드 인 차이나 2025 전략”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자본주의 생산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경제를 장기 침체에서 끌어내어 새로운 성장 시대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은 헛된 기대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도 컴퓨터 기술 도입에 따른 생산성 향상으로 지속적 성장이 가능해졌다는 주장이 유행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로 상징되던 미국 “신경제”가 퇴조하면서 그런 신화는 산산조각났다.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J 고든은 “디지털 혁명”이 생산성 증가에 그리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 영향은] 1996년부터 2004년에 이르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나타났[고], … 지속적이 아닌 일시적 현상이었[다.] … 2004~2014년 동안의 10년은 미국 역사상 생산성 증가가 가장 둔화된 시기였다.”(로버트 J 고든, 《미국의 성장은 끝났는가》, 생각의힘)

미국의 생산성 증가율: 디지털 혁명이 생산성을 향상시키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한편,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고(故) 크리스 하먼은 컴퓨터와 소프트웨어가 그 발전 속도 때문에 다른 자본 설비보다 빠르게 구식이 된 것, 즉 고정자본의 수명 문제를 지적했다. 기업들은 수명이 다하기도 전에 컴퓨터와 소프트웨어를 빠르게 교체해야 했기 때문에 처음 투자해서 얻는 이윤 증가분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또, 신기술이 산업 전체로 확대되면서 신기술로 생산된 상품의 가격이 폭락하고 경쟁이 격화됐다. 컴퓨터 기술 혁신이 지속적인 호황을 만들어 내지 못한 이유다.

반복되는 불황 같은 기존 경제의 난점을 정보통신기술이 극복하게 해 준다는 허풍스러운 낙관은 흔히 “무어의 법칙”을 하나의 근거로 삼았다. 인텔 공동 창업자인 고든 무어가 1965년에 발표한 “무어의 법칙”에 따르면, 컴퓨터 칩에 집적할 수 있는 트랜지스터 수는 18~24개월마다 갑절로 증가한다.

그러나 로버트 J 고든은 2006년 이후 무어가 예측한 발전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음을 보여 줬다. 2009년에는 트랜지스터 수가 갑절이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8년으로 치솟았다.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고든은 앞으로 “닷컴 시대 같은 상황[일시적이나마 생산성을 증가시킨]이 재현될 조짐은 전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세계경제가 미국발 금융 공황에서 시작된 장기 침체를 겪고 있는 지금, 정보통신기술이 생산성 증대와 지속적인 성장을 이끌었다는 주장을 고수하기는 어려워졌다. 클라우스 슈밥조차 정보통신기술의 혁신에도 불구하고 생산성이 증대하지 않았고, 2008년 대침체 직후 고성장 패턴을 회복할 것이라는 기대가 실현되지 않고 있다고 인정한다(클라우스 슈밥, 《제4차 산업혁명》, 새로운현재).

그래도 디지털 혁명에 대한 과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위기가 장기화할수록 자본주의 옹호자들은 로봇과 인공지능이 인류를 대침체에서 끌어내어 새 세계로 이끌 것처럼 허풍을 떤다. 마치 지금 혁신 투자 붐이라도 일고 있는 듯이 말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사뭇 다르다. 기술 혁신이 경제 활력을 이끌기보다 오히려 세계경제의 장기 침체가 기계화·자동화의 속도를 억제하는 양상이다. 기업들은 이윤율이 낮기 때문에 투자에 조심스럽다. 가령 반도체 기업들은 2016년 마침내 “무어의 법칙”을 폐기하고 속도를 늦췄는데, “개발비에 걸맞은 수익을 내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 이유의 하나였다. 기존 속도를 유지하려면 개별 공장당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설비투자를 해야 한다고 분석가들은 설명했다.

한국 기업들의 설비투자도 지속되는 경제 불황과 함께 뚝 떨어졌다. 상장기업들의 설비투자 증가율은 2010년 이후 4년 연속 마이너스였다. 특히, 설비투자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기계류 투자의 감소가 설비투자 감소를 이끌고 있다.

일부 논평가들은 기술 혁신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생산성 향상과 경제 성장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경제의 커다란 수수께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미 오래 전에 그 동역학을 설명했다. 개별 자본가들은 혁신 기술을 도입해 노동생산성을 끌어올리고 경쟁자보다 우위에 서려 한다. 하지만 이 경쟁적 축적은 체제 전체 차원에서는 이윤율 하락을 압박한다. 노동만이 가치를 만들므로, 노동절약적 기술 진보가 이뤄지면 투하 자본에 비해 적은 가치만이 창출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이 지속되면 생산은 위기를 겪게 되고, 그러면 신기술 도입으로 생긴 이득은 사라진다.

신경제의 파탄부터 2008년 이후 경제의 장기 침체는 정보통신 분야의 기술 진보가 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 축적의 모순을 결코 비껴가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체제의 옹호자들이 모순투성이 체제에 새 이름 ⎯ 신경제든 신자본주의든 포스트자본주의든 ⎯ 을 붙여 줘 왔을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