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 유럽학 교수이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중앙위원장인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마르크스주의 계간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160호(2018년 가을)에 기고한 ‘Legends of the fall’을 차승일 기자가 번역·요약한 것이다. 캘리니코스는 얼마 전 10주년을 맞은 리먼브러더스 파산을 화두로 10년간의 “장기 불황”을 설명하고, 그와 연결된 서구 정치의 양극화와 극우의 성장을 다룬다. 글의 후반부에 영국 정치 관련 논의가 많지만 한국 좌파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위기를 이해하기

2018년 9월 15일에 10주년을 맞은 월스트리트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은 언론의 큰 관심을 끌었다. 이와 관련된 주요 쟁점은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절정에 이른 금융 위기와 2008~2009년 세계경제를 휩쓴 대불황의 관계다.

[자유주의 경제사학자] 애덤 투즈는 이 위기에 관한 방대한 비판적 역사서 《붕괴》에서 이 주제를 체계적으로 다룬다. 투즈는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은행들에 구제 금융을 제공하고 양적 완화를 시행한 덕분에 위기가 해소됐다는 관점에 이의를 제기한다. “우리는 2012~2013년의 상식과는 달리 위기가 사실은 끝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 … 2007~2012년의 금융·경제 위기는 2013년과 2017년 사이에 탈냉전 질서 전반의 정치적·지정학적 위기로 변모했다. 그리고 그것의 명백한 정치적 함의를 제쳐 놓아서는 안 된다. … 2012년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은 중도적 자유주의의 승리도 틀린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포퓰리즘”의 성장이 [2008년의] 위기와 대불황과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다.

먼저 경제 위기를 살펴보자. 투즈가 보기에, 이 위기는 자신이 “달러를 기반으로 한 대서양 양안 시스템”이라고 부른 것의 위기이다. 투즈는 1970년대 초 이래,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 동안에 미국과 유럽이 하나의 “금융 순환체계” 속에 묶이게 됐다고 주장한다. 미국과 유럽의 은행들은 미국에서 또는 1950년대 이후로 시티오브런던[영국 금융 중심지]에서 발전한 역외 달러 시장에서 돈을 빌려서는, 주로 수익성이 좋은 미국 시장에서 대출을 해 줬다. 유럽 은행들은 1999년 유로화 도입에 뒤따른 신용 호황 때 이 모델을 차용하면서 유럽 대륙 전역에서도 자산 거품을 일으켰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미국 부동산 거품의 붕괴와 관련해 위험했던 것은 서브 프라임 모기지가 불량 채권으로 바뀌면서 은행들이 서로 돈을 빌리고 빌려 줄 때 이용한 시장의 기능이 2007년 8월에 멈췄다는 것이다. 대서양 양안의 “순환체계”를 먹여 살리던 달러의 흐름이 중단된 것이다. 이는 은행뿐 아니라, 달러 시장에 자금을 조달하던 공업·상업 기업들도 위협했다.

투즈에 따르면,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은 그 과정을 가속했지만 촉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 여파로 자금 시장은 완전히 얼어 붙었다. 사태를 뒤집은 결정적 조처는 미국 중앙은행이 취한 단호한 노력이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는 정말로 극적인 혁신을 이뤘다. 연준은 세계 은행권이 기댈 수 있는 최후의 유동성 공급자로서 자리 잡았다. 연준은 뉴욕으로 오는 모든 은행에 달러를 공급했다. 그 은행이 미국계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았다. 연준은 이른바 통화 스와프를 통해 몇몇 주요 나라 중앙은행들에게 수시로 달러를 발행해 줬다. … 이 통화 스와프를 통해 유럽중앙은행 등은 유럽 은행들에 수조 달러를 투입했다.”

투즈는 이렇게도 지적한다. “위기 이전에 대서양 양안의 역외 달러 시스템은 명확한 지도적 중심이 결여돼 있었다. [그러나] 2008년 이후에 그 시스템은 연준과 연준의 유동성 공급을 중심으로 공공연히 조직됐다.”

이런 주장은 2007~2008년에 미국 헤게모니의 종말이 시작됐다는 주장을 거의 부인하는 것이다. 미국 연준과 재무부가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을 데리고서 위기 관리를 조율했고, 이것이 미국 헤게모니의 결정적 측면이라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잠재적 위기

투즈의 분석의 강점은 대서양 양안의 금융 시스템에 집중하고 그 시스템이 국제 정치 질서(특히 미국과 유럽의 정치 질서)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투즈는 위기가 남긴 매우 중요한 유산을 포착할 수 있다. 그것은 미국 국가에 의해 구원받은 그 시스템이 계속해서 새로운 잠재적 위기를 창출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미국 연준은 금리를 매우 낮게 유지하고 양적완화 정책을 실시해 막대한 달러를 세계시장에 풀었고, 그 덕분에 “신흥 시장” 경제들이 [2008년] 대불황을 비교적 쉽게 극복할 자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연준이 양적완화를 줄이고 금리를 올리며 달러를 매우 싸게 공급하는 일을 중단하자 문제가 생겼다.

올해 여름, 특히 미국의 금리 인상 때문에 터키 리라화의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고 아르헨티나 페소화가 거의 붕괴했다. 아르헨티나는 특히나 흥미로운 사례이다. 현임 우파 대통령 마우리시오 마크리가 전임 대통령들의 온건한 케인스주의 정책을 뒤집어 정설 신자유주의로 회귀했다고 크게 칭송받고 있던 터에 그런 일이 터졌기 때문이다.

《붕괴》의 약점은 그 장점과 동전의 앞뒷면 관계이다. 바로 정치적 리더십의 구실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투즈는 미국의 위기 대처에서 핵심적이었던 인물들은 두드러지게 긍정적으로 그리는 반면, 유럽연합 지도자들은 힐난한다.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 유럽중앙은행 총재를 역임한 장클로드 트리셰와 마리오 드라기 등 ‘브뤼셀 패거리’가 보인 서투름과 냉담함은 확실히 비난받을 만하다.

그러나 “정치적 선택·이데올로기·행위”에 몰두하다 보면, 안토니오 그람시가 중대한 위기 때 드러나는 “치유 불가능한 구조적 모순”이라고 부른 것을 간과할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투즈는 왜 대서양 양안의 달러 시스템이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에 세계 자본주의에서 그토록 중요했는지 결코 묻지 않는다.

그 질문에 대한 중요한 답변은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이 내놨다. 바로 생산적 자본의 이윤율이 최근 수십 년 동안 비교적 낮았고, 그래서 투자자들이 금융 시장처럼 수익을 빠르게 회수할 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즉, 투즈의 분석에서 생산은 전혀 중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자본주의가 씨름한 장기적 이윤율 문제의 뿌리는 생산에 있다. 즉, 노동력에 대한 투자보다 생산수단에 대한 투자가 더 빠르게 증가하는 현상(마르크스의 표현으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상승)과 이와 관련된 자본의 집적·집중 과정에 있다. 소수 대기업이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자본의 파괴”로 경제가 회복되는 과정의 중대한 걸림돌이다. 은행에 구제 금융을 제공한 탓에 여전히 소수의 (전보다 더 커지기도 한) 대형 은행들이 금융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좋은 사례이다.

따라서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 자본주의는 치유되지 않았고 “장기 불황” ― 그람시의 표현 “구조적 모순”을 반영하는 장기적 저성장의 시기 ― 에 사로잡혀 있다.


전진 태세의 극우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기초 자체에서 위기의 뿌리를 찾는 것은 장기 불황의 정치학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서도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최근에 투즈는 다음과 같이 썼다. “대중 민주주의의 비이성적 열정에 맞서 기술관료적 정부를 옹호할 이유가 충분하다.” 이렇게 투즈는 “대중 민주주의의 비이성적 열정”을 가볍게 내치면서, 위험하게도 신자유주의적인 극단적 중도파의 오만함에 다가선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포퓰리즘”의 반란을 낳은 일차적 요인은 신자유주의를 지속하기로 한, 아니 더 극으로 밀어붙이기로 한 서구 지배계급의 고집이었다.

게다가 그 격변이 끝나 간다는 징후는 전혀 없다. 사실 현재 서구 정치의 가장 유력한 특징은 인종차별적 우익 포퓰리즘이 대서양 양쪽 모두에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의 집권은 그런 일이 일회성 사건이 아님을 입증했다. 트럼프는 국제적으로 두 가지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첫째, 그의 자국 우선 경제 노선과 관계된 것으로, 중국과의 전면적 무역전쟁을 개시한 것이다. 둘째, 유럽 극단적 중도파의 아성, 특히 독일의 메르켈을 겨냥해 여러 쟁점(무역, 나토, 이민)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메르켈은 지난해 총선 결과로 이미 약해진 상태였다. 가까스로 구성된 연립정부의 정통성은 약했다. 정부에 포함된 정당들의 총 득표가 급격히 줄었기 때문이다.(최근 여론조사 결과로는 지지율의 합이 50퍼센트가 안 된다.) 또한, 극우 정당인 독일을위한대안당(AfD)이 총선에서 3위를 해 창당 이래 처음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독일을위한대안당이 훨씬 더 성장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 메르켈은 자기 정당 내 정적들을 비판하면서도 이민자에 대한 혹독한 단속을 개시했다.

인종차별

이런 이민자 탄압은 트럼프의 유럽 동맹자들도 촉구하는 것이다. 이탈리아 부총리 마테오 살비니, 헝가리 총리 빅토르 오르반, 오스트리아 총리 제바스티안 쿠르츠가 그들이다.(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정부에는 파시스트들도 있다.) 올해 3월 이탈리아 총선의 결과로 오성운동과 ‘동맹’의 연립정부가 들어선 것은 유럽의 극우가 크게 강해졌음을 보여 주는 일이다.

올해 6월 말 열린 유럽이사회(유럽연합 최고 의사 결정 기구)에서 극단적 중도파는 이민자 문제를 두고 극우에게 굴복했다. 유럽이사회는 이민자에 대한 인신매매·납치·강간이 성행하기로 악명 높은 리비아에 이민자 억류 시설을 설치하기로 했고, 지중해에서 활동하는 NGO [난민] 구조선을 단속하기로 했다. 유럽연합의 국경 수비대 프론텍스는 증강되고 있다.

브라질에서 집권한 극우 정치인 보우소나루 ⓒ출처 브라질 정부

한편, 극우는 계속 전진하고 있다. 올해 9월 스웨덴 총선에서 [파시스트들이 창당한 극우 정당인] 스웨덴 민주당은 득표율을 세 갑절 이상으로 끌어올렸다(4.6퍼센트에서 17.5퍼센트로).

요즘의 극우는 정치적으로 여러 조류가 섞여 있다. 그중 유력한 경향은 부르주아 정치를 이민자 배척적 인종차별과 이슬람 혐오와 유럽 통합 회의론을 기초로 재편하고자 한다. 경제 정책을 두고는, 특히 신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촉진한 세계화 과정으로부터 얼마나 거리를 둘 것이냐를 두고는 의견이 갈린다. 그러나 주된 메시지는 같다. 국가 주권을 훼손하고 이민자들이 물밀듯 유입되는 것을 허용해 온 자유주의 엘리트들에게 국민이 배신당했다는 것이다.

인종차별적 우익 포퓰리스트들의 성장은 진정한 파시스트 세력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독일을위한대안당은 “국민적·보수적” 분파와 “국민적·혁명적” 분파로 나뉘어 있는데, “국민적·혁명적” 분파는 당내에서 성장하고 있는 파시스트 세력을 대표한다. 곳곳에서 극우가 성장하고 있다.


“헤게모니의 위기”와 좌파

신자유주의 프로젝트가 궁지에 몰리고 기성 정치권이 대중으로부터 거부당하며 서구 자본주의는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그람시가 “헤게모니의 위기”라고 부른 현상이다. “헤게모니의 위기” 상황에서 지배계급은 인구의 상당 부분을 설득하지 못한다. “헤게모니의 위기”는 인종차별적 우익 포퓰리즘이 성장할 기회를 열어 주고, 그들은 그 기회를 잘 살리고 있다.

중요한 질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어떻게 하면 급진좌파와 혁명적 좌파가 광범한 노동계급 대중 ― 적어도 일부는 최근 극우로 이끌리고 있는 대중 ― 에게 대안을 제공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한 필수적 조건 하나는 진정한 대안을 내놓는 것이다. 그래서 아우프슈테텐(독일어로 “일어서라”라는 뜻) — 디링케(좌파당)의 지도적 인물인 자라 바겐크네히트와 오스카 라퐁텐이 사민당과 녹색당 지지자들을 좌파당 쪽으로 끌어당기려는 목적으로 올해 여름에 시작한 운동 ― 은 적격이 아니다. 이민 규제를 강화하자는 우파의 요구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영국 노동자 운동 안에도, ‘축구 사나이 연맹’과 [파시스트인] 토미 로빈슨 등의 이슬람 혐오적 언행 일부를 좌파가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제러미 코빈이 이끄는 노동당은 훨씬 더 잘 해 왔다. 게다가 코빈과 그의 예비내각 재무장관 존 맥도넬은 신자유주의와 단절하는 경제 정책을 내놓았다.(비록 케인스주의와 선별적 재국유화를 합친 것 정도지만 말이다.) 9월 말 당대회에서 맥도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물려받은 쓰레기가 클수록 우리는 더 급진적이 돼야 한다. 변화의 필요성이 클수록 우리가 그런 변화를 창조할 기회가 더 커진다.”

올해 초 영국 런던에서 열린 인종차별·나치 반대 집회 ⓒ출처 가이스몰만

그러나 코빈의 처지는 진정한 대안을 제시할 때 뒤따르는 위험도 보여 준다. 올여름 코빈에 대한 공격이 재개됐다. 그가 유대인 차별적이라는 공격이었다. 노동당 우파, 이스라엘 친화적 유대인 단체, 언론이 개시한 이 비방 운동은 진정으로 유대인 차별에 맞서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만약 그랬다면, 그 운동의 초점은 유대인 차별을 존중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극우였어야 한다. 예를 들어, 헝가리 총리 빅토르 오르반은 올봄 총선에서 [유대인] 조지 소로스를 선거 운동 내내 공격했다.

코빈 비방 운동의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 인종차별 반대 활동가로서 그의 신인도를 떨어뜨려서 그의 지도력을 약화시키고 가능하면 파괴하는 것이다. 둘째, 노동자 운동 안에서 이스라엘 비판의 정당성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중 둘째 목표는 유력 유대인 신문들이 7월에 발표한 공동 사설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 글은 노동당 전국집행위원회가 국제홀로코스트추모동맹(IHRA)의 일관성 없고 선별적인 유대인 차별 규정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그 주장의 핵심인즉,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나 체계적 차별과는 아무 관계 없이 그저 이스라엘 국가가 인종차별을 기반으로 해서 세워졌고 여전히 그렇다는 명징한 역사적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유대인 차별이라는 것이다.

후퇴

9월 초 노동당 전국 집행위원회는 이 압력에 굴복해 국제홀로코스트추모동맹의 규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는 이스라엘과 그 지지자들의 중대한 승리였다. 이 때문에 노동당 안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을 조직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워질 것이다. 이런 후퇴는 더 큰 패턴의 일부다.

이제 코빈은 브렉시트 문제를 놓고 테리사 메이 정부가 겪고 있는 곤경에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는, 훨씬 더 까다로운 문제를 다뤄야 한다.

메이는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한 뒤로도 유럽단일시장에는 남기 위해 유럽연합의 여러 정책을 상당히 유지한다는 구상을 내놨다. 영국이 유럽연합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기를 바라는 보수당 내 강경파의 압력,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더라도 경제적으로는 되도록 변화가 없기를 바라는 영국 대기업들의 요구 속에서 나온 구상이었다.

메이는 자기 구상대로 해야만 유럽연합과 합의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보수당 강경파의 목소리가 누그러지기를 소망했다. 그런데 유럽연합이 메이의 제안을 단칼에 거부해 버렸다.

메이가 겪은 수모를 보면, 그가 어떤 협상 결과를 들고 오더라도 그것이 의회를 통과하지 못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코빈에게 희소식이다. 총선이 앞당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이 정부의 실패가 낳을 더 가능성 높은 결과는 영국과 유럽연합의 관계를 둘러싼 국민투표를 재실시하자는 운동의 추진력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민중 투표’라는 조직이 선봉에 서 있고, 그 안에서 자민당과 노동당 우파가 매우 유력하다.

코빈은 국민투표를 다시 하자는 주장에 저항해 왔다. 영국이 계속 유럽단일시장에 남아 있으면 자신이 총리가 된 뒤에 시행할 경제 정책들이 제약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2016년 6월 국민투표에서 탈퇴에 투표한 노동당 지지자들이 소외감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당 내에서 아직도 영향력이 상당한 노동당 우파는 물론이고 코빈을 지지하는 [당내 의견그룹] ‘모멘텀’도 국민투표 재실시를 지지하라고 코빈을 압박한다. 영국노총은 9월 초에 ‘민중 투표’를 지지하며 악역을 자처했다. 결국 노동당 당대회에서 코빈과 멕도넬은 총선 실시 요구를 우선하지만 국민투표 재실시를 전보다 더 강조한 결의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연합과 합의된] 브렉시트의 조건을 국민투표에 부쳐야 한다는 생각은 얼핏 보면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실, 2016년 6월 실시한 국민투표를 다시 하자는 것이다. 유럽연합이 바라는 답이 나올 때까지 국민투표를 다시 하자는 것인데, 이는 추악한 역사가 있는 일이다.

단결

‘민중 투표’의 진정한 문제는 정치적인 것이다. 2016년 6월 국민투표 결과는 영국 사회에서 유럽연합을 보는 태도가 양극으로 쫙 갈려 있음을 드러냈다.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낮을수록 탈퇴에 투표했을 가능성이 높다. 국민투표 재실시는 당시 탈퇴에 투표한 유권자의 상당수가 느낄 사회적·정치적 소외감을 강화할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떻든, 국민투표 재실시는 보수당 내 유럽 통합 회의론자들과 극우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그들은 2016년 6월 국민투표 결과를 무시하려는 “엘리트”에 대한 대중의 배신감을 체계적으로 이용하며 이민자 배척적 인종차별을 더 부추길 것이다. 그런 환경은 파시스트 조직의 성장에 유리하다. 브렉시트 국민투표의 결과로 영국 사회가 우경화할 것이라던 예측은 꽤나 틀린 것으로 판명됐지만, 국민투표 재실시는 그런 효과를 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국민투표 재실시는 2016년에 잔류냐 탈퇴냐를 놓고 분열했던 좌파를 더한층 분열시키고 코빈을 고립무원의 상태로 둘 것이다. ‘모멘텀’은 국제홀로코스트추모동맹의 유대인 차별 규정을 지지하고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서 철수하는 경향을 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중 투표’도 지지했다. 이는 코빈을 지지·지원한다는 ‘모멘텀’의 존재 이유와 크게 모순을 일으킨다. 극우가 제기하고 있는 위험은 좌파가 인종차별과 파시즘에 맞서 단결할 필요성을 극명히 보여 준다.

지금은 담대함이 필요한 때다. 전 세계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정당성이 위기를 겪고 있다. 영국 국가는 폭풍우 치는 바다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 합의 없는 브렉시트 전망이 강해지고 있어서다.

보수당의 우왕좌왕에 대응해서 코빈과 맥도넬이 대기업들에 대한 도전 수위를 올리는 것은 아주 옳은 일이다. 그래야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기회 삼아, 금융권의 이윤 벌이를 촉진할 금융 거품 일으키기에 의존하지 않는 경제 모델을 개발할 수 있다.(그 모델을 실현하려면 만만찮은 투쟁이 필요할 테지만 말이다.)

장기 침체와 그것이 낳은 헤게모니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려면 경제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인종차별적 우익과 그 안의 나치에 맞선 반대를 최대한 강력하게 결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