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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은 평화·통일 문제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동반자가 돼야 하는가?

올해 봄부터 남·북/북·미 정상회담이 잇달아 열리면서, 많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평화·번영·통일 시대가 왔다”는 기대감을 품게 됐다. “화염과 분노”로 점철된 지난해에 견줘 분명 극적인 변화다.

많은 노조 지도자와 활동가들은 남·북(정부들)의 협력, 즉 민족 공조가 한반도에서 대화 국면을 지속케 할 가장 주된 동력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촛불의 힘으로 탄생한 덕분에 한반도 평화의 운전자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시각은 노동자 운동의 실천에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노동자 운동 내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노동존중, 노동기본권 보장에서 우유부단한 문재인 정권에 한편으로 저항하고 비판하면서도 평화번영, 통일의 길에서는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계급적, 계층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 각계 민중이 하나로 뭉치는 길[에] 민주노총은 확고한 전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민족 공조로 제국주의의 위협에서 벗어나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는 남·북한 당국의 의지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북·미 관계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한반도 상황은 세계 제국주의 체제의 상황과 연동돼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체제의 정치·경제 상황과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관계가 한반도 상황에 훨씬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지금 세계는 장기 불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면서 강대국 간 경쟁과 갈등이 점증하고 있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머지않은 미래에 매우 위험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 한반도 정세에, 그리고 트럼프의 대북 정책을 좌우하는 주요한 변수다. 따라서 지금은 트럼프가 북한과 대화하고 있지만, 상황 변화에 따라 그 기조는 언제 다시 바뀔지 모른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는 제국주의에 일관되게 저항할 정치 세력이 아니다. 남·북 군사합의, 대북 제재 문제 등에서 트럼프 정부와 견해가 다소 다르지만, 미국과의 공조를 근본에서 흔들 선택은 하지 않으려 한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 정부를 자임하면서도 지난해 내내 평화 문제에서 촛불의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했다. 사드 임시 배치, 위안부 문제 등이 그런 사례다. 트럼프 정부가 국내 정치적 이해관계 등으로 대북 정책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면, 문재인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 추진도 실현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에도 문재인 정부는 문제 있는 결정들을 내리고 있다. 국방장관 정경두는 현재 임시 배치된 사드를 정식 배치하겠다고 못 박았다. 정부는 미국 미사일방어체계(MD) 편입 논란 때문에 주저해 온 SM-3 미사일 도입도 이미 진행하고 있다.

12월 유엔 총회에서 북한인권결의안이 새로 채택될 예정이다. 북한 인권은 분명 문제이긴 하지만, 트럼프 정부가 북한을 압박하는 수단의 하나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는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통과에 동참하고 있다. 북한처럼 인권 문제가 심각한(불법 월경 이민자에 대한 발포, 트랜스젠더 천대, 여성 비하 등등)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북 공세에 협력하는 것이다.

일각에는 문재인 정부를 압박해 견인하는 게 가능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그런 견해는 어불성설이다. 문재인 정부는 자본주의·제국주의 세계 체제에 얽히고설킨 한국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그 나름으로) 표현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경험을 돌아보면, 외려 문재인 정부의 협조 압박에 조직 노동자 운동 지도층이 견인될 공산이 크다.

견인?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다시 커지는 가운데, 정부는 노동계급을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 와중에 남북 관계 개선을 노동자들의 불만을 달래는 카드로 이용한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남북 화해·협력을 중시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11월 5일 여·야·정 협의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는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초당적 협력에 합의했다. 동시에 규제혁신, 탄력근로제 확대, 광주형 일자리 등도 꺼내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 실제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연말 서울 답방이 성사된다 해도, 그것이 외형적으로 평화 프로세스의 진전으로 여겨지겠지만 동시에 청와대는 김 위원장의 답방을 탄력근로제를 비롯한 연말 노동 개악 시도에 대한 분노를 희석시키는 데도 이용할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 운동 내 일각에는 연말에는 판문점 선언 비준을 위해 정부·여당과 공조해 자유한국당을 압박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 되면 정부·여당의 노동악법 통과에 맞서 효과적으로 투쟁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이처럼 노동자 운동이 남북 화해·협력을 위한다며 계급을 초월한 단결을 노동계급의 이익보다 중시하면(심지어 동등하게 여기더라도), 지배자들의 공세에 대처해 자신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개별 사업장의 경제 투쟁에는 어느 정도 열의를 보일지라도, 투쟁이 어느 수준 이상으로 발전하고 확산돼 정부를 흔들 만큼 되는 것은 주저할 테니 말이다.

한반도는 남북 민중의 의사와 무관하게 제국주의 두 열강에 의해 분단됐다. 따라서 남북은 남북의 주민 다수가 원하는 방식으로 통일할 수 있어야 하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를 지지한다.

그런데 분단된 후 남북에는 각각 독립적인 국가가 건설됐고, 산업 성장에 성공했다. 이것은 남북 각각의 내부에 선명한 계급 분단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계급투쟁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노동계급에게 통일은 그보다는 분명 부차적인 과제다.

제국주의 열강에 맞서 평화와 통일을 쟁취하는 데서는 민족 전체가 단결할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압력은 민족 구성원들이 계급을 초월해 단결하는 외적 압력으로 작용하기보다는, 내부에서 계급투쟁을 뚜렷하게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해 왔다.

통일을 최우선 과제로 여기고 계급투쟁을 그에 종속시키려 한다면, 제국주의 세계 체제에 맞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실현할 진정한 동력을 약화시킬 것이다. 바로 노동계급의 사회 변화 잠재력 말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계급적 요구를 위해 투쟁해야,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 투쟁도 동력을 얻을 수 있다.

한국 현대사를 돌아봐도, 노동계급의 거대한 진출이 있을 때 남북 자유 왕래 등을 요구하는 대중적 통일 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 투쟁을 통한 항구적 평화 실현이 당장에는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으로 보일 순 있다. 그러나 종전선언 한다면서 제주에서 관함식을 열고 무기 수입에 열 올리는 모순투성이 정부에 기대를 걸고 그 정부와의 협력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훨씬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대안이다.

11월 21일에 제목과 문장 몇 곳을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