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1월 2일 열린 노동자연대의 한 회의에서 저자가 한 발제를 약간 수정한 것이다


1. 2008년 9월 세계경제에 공황이 들이닥친 이래 10년이 지났다. 그러나 10년이 지났어도 당시 공황이 드러낸 모순들은 해결되기는커녕 완화되지도 않았다

2008년 9월 공황은 1929년 10월 대공황 이래 가장 파괴적이고 가장 광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월스트리트의 거대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하고, 세계 최대 보험회사 AIG도 파산 위기에 처했다.

세계 금융 시스템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그래서 공황은 전 세계 금융시장으로 급속하게 확산됐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에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등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금융 시스템의 붕괴를 막는다며 수조 달러 규모의 돈을 지출했다. 물론 다른 경기부양책들도 시행됐다.

하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을 거의 20년간(1987~2006) 지낸 앨런 그린스펀은 당시 의회에 출석해 이렇게 말했다. “시장이 내 이론적 모델대로 작동하지 않아 혼란스럽다.”

당시 주요국 정부들은 ‘구제금융’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의 정책들을 시행했다. 그러나 그 정책들은 금융 투기자들의 손실을 보상해 주는 데 맞춰졌다. 그자들의 투기와 범죄 행위들이 금융 공황을 촉발시켰는데도 말이다.

금융기업 경영인들이 여전히 천문학적 액수의 연봉과 보너스를 계속 챙기는 동안 수많은 노동계급 가족들은 거리로 나앉는 등 빈곤으로 내몰렸다.

특히, 유럽 정부들은 긴축 재정정책을 실행했다. 복지와 공공서비스 지출이 대폭 삭감됐다.

그러나 이 모든 정책들은 지난 10년간 경제를 회복시키지 못했다. 주요 경제들의 생산·고용·소득은 모두 2007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2015년 통계로, 선진국 클럽 OECD 소속 나라들의 전체 가정 중 3분의 2가 2005년보다 생활수준이 낮다. 또한 당시 공황의 전야인 2007년에 비해 지금 부채 비율은 40퍼센트가 더 늘었다. 그래서 지금 세계 부채는 세계 총생산의 217퍼센트나 된다.

2. 트럼프 ‘무역전쟁’은 세계 제국주의 체제라는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

이제 미국 지배계급은 트럼프 정부를 통해 무역 보호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의 ‘무역전쟁’은 단지 무역적자를 줄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중국 측이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을 늘리겠다고 제안했는데도 그 제안을 거절한 것을 보면 말이다. 미국의 요구는 특히 첨단기술(하이테크) 산업분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중국 측이 미국 측의 요구를 실제로 받아들일 리는 없다. 미국 측의 요구가 중국의 무기 현대화는 물론, 지금 추진하고 있는 경제 개발 계획을 전면 포기하라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미국의 무역전쟁은 중국더러 경제적 군사적 열위(劣位)를 감수하라는 압력이다.

게다가 미국의 무역전쟁은 중국뿐 아니라 전통적 동맹들인 유럽과 일본도 표적으로 삼고 있다. 이 점은 다섯 달 전 미국이 유럽연합을 “적”이라고 부른 것에서 드러났다. 또, 그 직후에 열린 G7 회의, 즉 서방 선진 7개국 회의에서 미국 측이 다른 참석자들에게 관세율 대폭 인상을 선포한 데서도 드러났다.

따라서 미국의 무역전쟁은 경제 규모 1위인 국가가 경제 규모 2위인 몇 개 국가들에 미국을 따라잡을 생각은 감히 엄두도 내지 말라는 경고이자 압박인 것이다.

여기서 1등이 2등들한테 추격 포기를 호령하고 위협하는 것이 국가 안보를 이유로 들어 행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2위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국가 안보를 얘기한다.

요컨대 열강의 제국주의가 진정한 쟁점인 것이다. 세계경제 문제는 반드시 제국주의 문제로 연결돼야 한다.

3. 이윤율이 근본 문제다. 그러나 “구조적 모순들”이 해결되지 않아, 이윤율은 회복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얘기한 일들은 모두 자본주의의 이윤율이 회복되지 못해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이윤율이 높고 또 올라가고 있으면, 자본주의 경제는 비교적 건강한 상태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이윤율이 높지 않고 또 증가하지도 않고 있으면, 경제 공황과 불황은 점점 더 자주 발생하고 점점 더 가혹해진다. 그리고 제국주의 열강의 군국주의도 점점 더 노골적이 되고 점점 더 가차없어진다.

자본주의가 이윤율을 회복하려면 수익성 없는 자본들이 파괴돼야 한다. 즉, 더는 충분한 이익을 내지 못하는 기업들이 파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쉽지 않다. 축적으로 자본의 규모가 커지고 그 수가 적어지는 것, 즉 소수 대기업들이 경제를 지배하는 것 때문이다. 앞에서 주요국 정부들이 파산 위기에 처한 은행들을 구제했다고 했는데, 이 일도 수익성 없는 자본의 파괴를 막는 것이다. 그러나 시스템 붕괴를 막으려면 지배자들로서는 어쩔 수 없이 구제를 해야 한다.

이윤율 회복을 위해서는 또한 부채도 없애거나 대폭 줄여야 한다. 특히, 기업들이 이자 부담을 덜어야 한다. 그러나 이 일도 쉽지 않다. 애초에 기업들이 대출을 많이 한 건 수익성이 떨어져서였다. 체제 전반의 이윤율 수준이 올라가지 않는 한은 기업들이 수익성 상승을 바라기는 쉽지 않다. 수익성이 증가하지 않으니 부채 감축도 쉽지 않다.

이윤율을 올리려고 또한 로봇, 인공지능, 인터넷 등 기술 진보가 촉진된다(소위 “제4차 산업혁명”). 하지만 기술 진보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증대시킨다. 그러면 다시금 이윤율이 낮아지는 경향이 있게 된다.

결국 경제 불황은 지속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구조적 모순들”로 말미암은 “유기적 위기”(그람시)이기 때문이다.

ⓒ이미진

4. 낮은 수익성과 불황 지속 전망 때문에 지배자들은 임금 억제에 계속 열을 올릴 것이다

임금 억제는 개별 자본들의 이윤 증대에 직접적 효과가 있기 때문에 사용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방책이다. 또한 지배자들(사용자들과 국가 관료)은 신자유주의에 계속 집착할 것이다. 우리는 문재인이 겨우 집권 1년 만에 규제완화 등 (전임자들이 시행했거나 시행하려 했던 것과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들로 돌아간 것을 봤다.

5. 신자유주의의 지속은 여러 나라들에서 포퓰리즘을 자극했다

포퓰리즘이 지지를 얻게 되는 것은, 믿었던 권력자들이 자기들을 배신했다고 서민들이 느끼는 때이다.

그 권력자들이 박근혜 같은 우익이면 중도파와 진보파(중도좌파)가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다. 반면 그 권력자들이 진보파나 중도파이면 보수 우익이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우익이 포퓰리즘의 등장을 주도해 득을 보고 있다. 트럼프의 등장이 대표 사례다. 하지만 유럽에서 다양한 극우 정당들이 성장하는 것도 서민층의 포퓰리즘 정서를 이용(악용)한 것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박근혜 퇴진 운동이 포퓰리즘의 분출을 대표했다(이하에서 좌파적 포퓰리즘은 특별히 민중주의로 일컬을 것임). 그리고 그 덕분에 중도 포퓰리스트 세력인 문재인 정부가 등장했다.(한국 포퓰리즘의 핵심 관심사는 남·북한 관계 문제와 재벌 문제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와 여당은 임금 억제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치적 양극화가 급발전하고, 조만간 공식 정치 영역에서의 수혜 세력은 우파 정당들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최근 논문에서 지적했듯이, 2015년경부터 시작된 포퓰리즘의 세계적 부상은 결코 반짝 성공이 아닌 듯하다(http://isj.org.uk/legends-of-the-fall/). 이 점은 무엇보다 트럼프 집권이 증명하고 있다. 그는 무역 보호 정책과 대중국 무역전쟁을 본격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중도 세력의 아성인 독일의 중도우파 정부를 무역 문제, 나토 문제, 이민 문제 등 다방면에서 공격하고 있다. 포퓰리즘의 성공이 일시적인 것이 아님은 여러 나라에서 우익 포퓰리스트 정당들이 전진하고 있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최근 특히 한국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엄중한 경고로 여겨야 할 사례는 브라질이다. 브라질 노동자당 PT는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발전한 투쟁적 노동조합 운동으로부터 출현했다. 그런 PT였건만 그들의 정치도 민중주의 사상이 강력히 득세했다. 민중주의는 한줌 엘리트만 제외하고는 계급을 가로질러 협력하자는 사상이다. 계급 협력주의가 내재적 논리가 된다. 따라서 개량(이하 개혁)주의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개혁주의는 자본주의의 부패에 대한 면역력이 없다. 개혁주의 정부의 일부 관료와 정치인들이 부패하는 건 자본주의의 부수적 산물이다. 2003년 집권한 PT 정부가 부패로 2016년 몰락한 건 바로 이런 개혁주의 논리를 따른 결과의 일부이다. 그리고 급기야 올해 매우 우익적인 자본가 계급 정치인(비록 파시스트는 아니지만)이 집권한 건 이런 역사적 전개의 연장인 것이다.

6. 극우의 부상은 전쟁 위험을 높인다

우익 포퓰리스트들이 전진하면 파시스트들이 득을 본다. 파시즘은 단순한 극우가 아니라 매우 특별한 극우, 즉 중간계급 서민층의 포퓰리즘적·인종차별적·민족주의적 대중운동을 기반으로 대의제 민주주의와 모든 노동자 조직을 파괴할 목적을 가진 극우다.

이 점을 안다면, 주요국 중 하나에서 파시즘이 집권하는 상황이 세계 정세에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 수 있다. G7, 즉 서방 선진 7개국의 하나에서 파시즘이 집권하면 그것은 대규모 전쟁 위험을 지금보다 한 단계 더 높이는 일이 될 것이다.

화약고는 중동일 수도 있고, 동유럽일 수도 있고, 남중국해나 대만해협일 수도 있고, 한반도일 수도 있다. 이 화약고들은 모두 뿌리(제국주의)가 같으므로 서로 연결돼 있다. 하나가 발화되면 다른 곳도 조만간 발화될 개연성이 있다.

7. 한국 노동운동은 여전히 탄력성을 보이고 있다

인상에 치우치는 경험주의자들은 외형적 전투성만으로 노동운동을 판단하려 드는 경향이 있는 데다 그들의 잣대는 우리 나라 일국에 한정돼 있다.

그러나 다른 OECD 나라들에 견줘 우리 나라는 노동계급 운동이 비교적 강력하다. 해마다 세계노동절과 전국노동자대회에 수만 명씩 모이는 것만 봐도 서구 노동운동과 달리 탄력적임을 알 수 있다.

노동조합 정치 면에서도 그렇다. 바로 직전에 집행권을 행사한 한상균 지도부가 민주노총 좌파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은 제쳐놓더라도 지난해 연말 치러진 민주노총 임원선거 1차투표 결과를 보면, 대정부 협상을 강조한 윤해모 후보조는 겨우 11.5퍼센트만을 득표했다. 협상과 투쟁을 동시에 얘기한 김명환 후보조가 46.5퍼센트를 득표했다. 투쟁을 비교적 강조한 이호동 후보조는 17.6퍼센트를 득표했다. 16.6퍼센트를 득표한 조상수 후보조도 전통적인 좌파 기반으로부터 나온 선본이었음을 감안하면 민주노총 좌파는 여전히 조합원의 3분의 1가량 되는 기반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윤해모 후보 같은 매우 온건한 노조 관료가 가뿐하게 과반을 얻고, 좌파 후보는 5분의 1도 못 넘기기 일쑤다.

올해 초, 문재인 정부 초기인데도 사회적 대화 참여 반대가 민주노총 대의원 30퍼센트가량의 지지를 얻었다. 그 밖의 다른 주요 의사결정 회의에서도 좌파적 성격의 동의안은 30퍼센트 안팎의 지지를 얻었다.

한 달 전에 열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무산된 것도 지도부의 사회적 대화 참여 방침에 반감을 가진 대의원의 일부가 불참하면서 빚어진 일이다.(그렇지 않다고 강변하는 김명환 위원장님에게는 미안하게도 말이다.)

며칠 전, 다소 아쉬운 잠정합의안을 놓고 실시된 철도노조 투표에서도 서울지역에서는 47퍼센트가 반대표를 던지거나 기권했다.(철도 노동자들은 매우 지방 분산적임을 감안해야 한다.)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는 올해 여름부터는 노동자들이 항의 수준을 넘는 형태의 투쟁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문재인 취임 직후 몇 달 동안은 노동자들이 지켜봤던 듯하다. 그 뒤로는 항의하기 시작했고, 올해 여름부터는 실제로 싸우기 시작했다. 특히 파업이 늘어났다.

아직 대규모 사업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지 않았으므로 파업 참가자 수나 파업 손실액이 현저하게 증가하지는 않았을 성싶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는 시기의 징후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선진국들에 견줘 우리 나라 노동운동은 비교적 강력하다. 11월 10일 6만여 명이 모인 전국노동자대회 ⓒ이미진

8. 급진 노동조합주의와 민중주의 사이의 동요와 결합으로부터 개혁주의적 경향이 부상하다

노동운동이 상당히 회복될 것 같다는 전망보다 더 중요한 점은 노동자들의 의식을 주의깊게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브라질에서처럼 한국에서도 노동자 운동은 ‘급진 노동조합주의’와 ‘민중주의’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 동요하는 경향이 있다. 남아공에서는 급진 노동조합주의를 ‘노동자주의’라고 (부적절하게) 불렀다. 필자는 위에서 좌파적 포퓰리즘을 ‘민중주의’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노동조합들은 어떤 때는 김대중-노무현-문재인 같은 포퓰리스트 개혁파 정치인들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는다. 그러다가 노동조합들은 이들에게 배신당하고 반발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노동조합 쟁점들에만 집중하고 더 폭넓은 정치 활동은 피하는 급진 노동조합주의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다가 그들은 다시 포퓰리스트 개혁파 정치인들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리고 또다시 배신당하고 반발한다.

1990년대 초반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와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구분, 1990년대 후반 국민파와 현장파의 구분, 2000년대 ‘(민주노총)우파’와 ‘(민주노총)좌파’의 구분 등으로 호칭이 달라졌기는 해도 이러한 구분들은 본질적으로 민중주의와 급진 노동조합주의의 구분을 반영한다.

민중주의와 급진 노동조합주의 사이의 이러한 동요 또는 결합(최근 ‘사회운동 노동조합주의’가 이런 결합을 반영한다)은 한국 사회의 특성들이 반영된 것이다. 산업 노동계급이 급속히 형성됐지만, 다른 중요한 역사적 요인들이 있다. 제국주의(일본에 이어 미국)에 의한 오랜 민족자결 침해의 역사, 노동계급에 대한 천대와 매우 심한 억압, 해결되지 않은 민주적·민족적 문제들(가령 분단의 지속과 빈번한 대북 적대 정책, 친북좌파 탄압 등) 등의 요인들 말이다. 이런 요인들 때문에 남아공과 브라질처럼 한국의 노동계급은 민중주의 정치를 잘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 흔한 결과는 노동자들이 포퓰리즘 정치를 수용했다가(민중주의),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아무것도 가져다주는 게 없자 그에 반발해 다시 급진 노동조합주의 방향으로 선회하는 것이다. 그때 노동자들의 반응은 정치 운동·활동을 피하는 것이다. 정의당 같은 대중 정당에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적은 것도 그렇지만, 특히 소수 급진적 조합원들이 (소위 ‘현장조직’과는 구분되는) 혁명적 정치조직을 구축해 혁명적 정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불충분하고 사실상 결여돼 있다. 심지어 혁명적 조직의 회원인 조직 노동자도 종종 사업장 바깥에서는 혁명적 토론을 해도 사업장 안에서 조합 동료들과 혁명적 토론과 활동, 조직을 해야 한다는 인식은 대체로 불충분하거나 결여돼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 같은 신흥국들의 특성상 노동자들이 정치 운동·활동을 그냥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감한 문제(가령 안보 위기)에 부딪힐수록 더욱 그렇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다시 민중주의 정치 쪽으로 견인되게 된다.

김대중이 공약을 어기고 IMF 조건들을 다 받아들였을 때 급진 노동조합주의가 다시 분출하면서, 1998년 2월 정리해고제를 수용한 배석범 민주노총 위원장직무대행을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몇 달 후 급진 노동조합주의는 이갑용 전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을 민주노총위원장 자리에 앉혔다. 후임인 단병호 위원장도 재임 중 급진 노동조합주의 경향을 대표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 그의 발밑에서 그의 기반은 현장파와 중앙파로 분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단 당시 위원장은 사실 중앙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가 개혁입법의 필요성을 느껴 당시 민주노동당과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급진 노동조합주의는 2014년 말에야 비로소 민주노총 집행권을 다시 되찾는다. 당시 노동전선과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원회(현 변혁당), 노동자연대 세 조직이 한상균·이영주·최종진 선본을 구성해 선거에 참여했다. 그러나 2017년 말 치른 선거는 박근혜 퇴진 운동 성공과 문재인 정부의 취임으로 다시 강화된 민중주의에 힘입어 김명환 집행부가 등장했다.

정부의 엉터리 공공부문 비정규직 전환에 항의하는 투쟁인 한국잡월드 점거 파업 ⓒ김어진

그러나 문재인에게 기대를 걸었던 민주노총 노동자들이 (불균등하게) 이반하기 시작했다. 이것도 민중주의/급진노동조합주의 패턴의 재연을 알리는 것이다. 지난 1년간 문재인 정부에 항의하다가 최근 쟁의로 나아간 노동자들은 대부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고 내년에는 다른 직종, 다른 부문 노동자들도 가세할 것 같다.

남아공·브라질처럼 한국의 노동운동도 급진 노동조합주의와 민중주의 사이의 이러한 동요를 끝내지 못하는 것은 조직 노동계급 속에서 혁명적 조직이 약하기 때문이다. 만일 혁명적 조직이 강력하면 혁명가들은 노동자들의 경제투쟁 및 경제적 불만을 국가 권력 문제와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가령 2008년 촛불 집회가 한창일 때 노동조합들은 대부분 이를 ‘패싱’ 했다. 최근인 지난 6월 30일에도 민주노총 주최로 열린 8만 집회 참가자들은 지도부로부터 아무 지시도 받지 못해, 바로 옆에서 열린 난민 방어 집회 현장을 그냥 지나쳤다. 이런 사례는 부지기수다. 특히, 낙태 권리 문제는 노동자 운동이 만만찮게 달려들어야 할 노동계급 쟁점인데도 말이다.

아쉽게도 남아공·브라질처럼 한국의 정치적 좌파도(특히 혁명적 좌파가 조직 노동자들 사이에서 약하면 약할수록) 노동운동이 민중주의와 급진 노동조합주의 사이에서 갈팡질팡 갈피를 못 잡고 동요하는 양상을 끝장내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민중주의와 급진 노동조합주의의 이러한 동요와 결합은 개혁주의 정치의 발전을 촉진할 수 있다. 사회 개혁 운동(또한 주로 그 운동을 하는 정당)도 민중주의와 급진 노동조합주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에 내포돼 있는 경제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의 분리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민중당도 시스템 개혁 운동과 민중주의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물론 민중당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아니라 스탈린주의 정당이다. 하지만 1980년대와 달리(당시 명칭 ‘NL’이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줄임말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민중당은 혁명이 아니라 개혁 노선을 걷고 있다. 자본주의적 계급 관계가 발전하고 국가 형태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인 조건에서 민족해방 ‘혁명’은 실천에서는 개혁주의로 나타난다.

그러나 세계경제와 한국 경제가 모두 장기 불황이어서 개혁 노선은 운신의 폭이 매우 제한돼 있으므로, 제대로 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9. 지난 30년은 한국 노동계급의 기초학습 기간

우리는 1987년 이래 한국에서 전개된 대중적 노동운동을 일종의 학습 과정으로서, 즉 노동계급이 자신의 힘을 보여 주고 자신의 힘을 느끼고 상이한 해결책들을 시험해 본 기초학습 과정으로 봐야 한다.

한국 노동자들이 배운 잠정적 교훈은 김대중-노무현-문재인으로 대표되는 포퓰리스트 개혁파 부르주아 정치인들에 대한 환상이 점점 더 깨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때 혁명가들이 영향력을 획득하려면 노동자 의식의 모순과 자본주의 내 개혁 노선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럴 때만 시스템 개혁 운동의 허를 찌를 수 있다.

부르주아적 질서가 이례적인 위기를 겪는 가운데, 혁명적 정치조직 건설은 매우 중요한 과제다 ⓒ이미진

10. 리더십의 위기와 혁명적 리더십의 사활적 필요성

개혁주의의 대안으로, 혁명가들이 기층 노동자와 청년·학생 속에서 성장하지 못하는 동안 노동운동은 계속 민중주의와 급진 노동조합주의 사이에서 동요할 것이다.

또한 공식 정치 영역에서도 정의당 등 개혁주의 군소정당들이 원기를 회복한 한국당 등 우파 정당들에 맞서 힘겹게 저항하는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민주당은 최소 저항만을 하고).

1920년 레닌은 자본주의의 위기가 아무리 심각해도 지배계급에게 “절대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런 생각이 공허한 현학이거나 말장난일 뿐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부르주아적 질서는 지금 세계적으로 이례적인 혁명적 위기를 겪고 있다. 우리가 증명해야 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절대적으로 절망적인 상황 같은 게 아니라 혁명적 당의 실천을 통해 당이 충분히 의식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즉, 당이 피착취 대중과 연관 맺는 조직화 사업이 충분하며 이 위기를 이용해 혁명을 성공시키고 승리로 이끌 투지와 이해력이 있느냐를 실천을 통해 증명해야 한다.

레닌의 경고는 그의 사후 스탈린주의의 등장, 중국 혁명의 실패, 독일 반나치 공동전선의 좌절과 히틀러의 집권 등을 생각해 보면 지금도 뼈아프게 느껴진다.

1930년대 후반에도 트로츠키는 “리더십의 위기”에 대해 얘기해야 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혁명적 리더십의 부재가 문제였다. 그때는 1938년으로, 1929년 대공황이 10년째 대불황으로 이어지고, 세계대전이 재발될 위험이 공공연하게 거론되던 때였다.

혁명적 리더십, 즉 혁명적 정치조직의 건설이 사활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다행히 오늘날의 상황은 트로츠키가 부심하던 1930년대 후반보다 혁명가들에게 덜 불리하다. 당시에 소련은 각국 노동운동 투사들에게 거의 신적 존재였다. 각국 공산당은 자국의 노동자 혁명을 위해 고민하기보다는 ‘신’의 주권과 영광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산당 자신도 ‘신’의 후광을 업고 ‘신’의 대행자로 여겨지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소련도, 그 대행자인 이른바 ‘국제 공산당 운동’도 없다.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만, 오직 믿음만이 북한을 미국과 대등한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는 심지어 트로츠키 때보다도 취약하다. 1990년대 후반부터 바로 얼마 전까지 거의 20년간 서유럽 전역에서 집권하면서 사회민주주의 정부들은 ‘사회자유주의’ 또는 ‘극단적 중도파’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며 몰락했다.

물론 좌파적 사회민주주의가 주류 사회민주주의가 물러난 자리를 메우려 애쓰고 있다. 시리자의 선례는 그다지 좋은 본보기가 되지 못했고, 제러미 코빈 대표가 이끄는 영국 노동당이 선진 자본주의 나라의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기대주이자 유망주로 떠올랐다. 영국 노동당이 순항하면 정의당 좌파, 노동당, 변혁당 등을 비롯한 좌파적 개혁주의 정당들이 고무될 것이다. 혁명적 좌파인 우리도 고무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영국 노동당의 앞길이 그저 창창하기만 한 건 아니다. 당내 우파의 비방과 모략이 심각하게 야비해서 보수당의 대리인들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반면 당내 코빈 지지자 그룹인 ‘모멘텀’은 당 안팎 오른쪽으로부터의 공격에 직면해 비굴하리만큼 기회주의적이다. 아마도 최대 장애물은 자본가들이다. 그들은 벌써부터 자본 도피를 통해 코빈을 위협하고 그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2010년대에야 비로소 90년 전의 서구처럼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스탈린주의 정당이 분화된 진보·좌파 정치 지형이 형성됐다. 그러나 그런 정당들이 부상해서 집권까지 해야만 노동계급이 학습을 완료하는 건 아니다. 이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진전되고, 세계화로 경제적으로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통합 수준이 매우 높아진 상황에서는 개혁주의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데 가속이 붙을 것이다.

한국 같은 신흥국들은 여전히 레닌이 말한 “자본주의 사슬의 약한 고리”다.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오랜 기간 격동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새 세대도 거기서 많이 배울 것이다. 그 학습 과정을 혁명가들과 함께하면 어쩌면 전세대보다 더 잘 배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