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세가 답방 성사와 성공 여부의 불확실성을 키웠다 ⓒ출처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영화 〈공작〉을 보면, 안기부(현 국정원)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우파인 한나라당 이회창의 당선을 위해 북한에 무력 시위를 해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대가로 거액의 달러를 북한에 준다고 한다. 이것은 실화다.

〈공작〉은 이 요청을 두고 북한 관료들이 격하게 언쟁을 벌이는 모습을 그린다. 시장의 도입과 관련된 관료 내부의 이해관계에 따라 견해가 엇갈렸던 것이다.

지금도 북한 권력층 내에서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을 듯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을 놓고 말이다. 9월에 김 위원장이 답방을 약속했을 때 이미 그의 참모 다수가 반대했다고 알려졌다.

김 위원장이 서울에 온다면, 그는 우파들의 대규모 항의 시위에 직면할 것이다. 북한 권력층이 보기에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은 여러모로 정치적 부담이 큰 선택이다.

게다가 서울 답방으로 북한이 무엇을 얻을지가 불확실하다. 최근의 북·미 협상 상황을 보면, 북한이 이미 한 차례 취소한 답방을 감행할지 고심할 만하다.

트럼프식 ‘전략적 인내’?

물론 문재인 정부는 김 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을 성사시키려고 애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연내 답방 가능성이 열려 있다며 김정은 위원장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도 1~2월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고 했다. 12월 3일 판문점에서 북·미 접촉도 있어, 양측이 2차 정상회담을 위한 의견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가장 원하는 제재 완화(해제)에 대해 미국이 근본에서 태도를 바꿀 것 같지 않다. 트럼프 정부는 올해 들어서만 독자 대북 제재를 9번 단행했다(10월 기준). 그리고 11월 30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 대통령은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달성하기 전까지” 제재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발표했다.

2차 정상회담이 곧 열릴 것이라면서도 제재는 꾸준히 강화하자, 트럼프식 ‘전략적 인내’가 시작된 것 아니냐는 얘기마저 나온다. ‘전략적 인내’는 제재를 가하면서 북·미 대화에는 소극적이었던 트럼프 이전의 미국 대북 정책을 가리킨다.

일각에는 미국이 내년 봄에 열릴 한미 연합훈련인 독수리 훈련의 규모를 축소하고, 남북 철도 공동조사를 대북 제재의 예외로 인정한 조처에 주목하는 견해가 있다. 그런 견해의 사람들은 이런 ‘양보’에 북한이 화답할 차례라고 한다.

그러나 한미 연합훈련에 관한 트럼프의 애초 약속은 축소가 아니라 중단이었다. 오히려 주목할 점은 11월에 한미 해병대 연합훈련이 진행된 데 이어 연합훈련의 재개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단된 훈련을 재개하면서 ‘축소’ 운운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다.

북·미 협상에 진전이 없고 미국의 제재가 안 풀리면, 남북 관계도 그에 연동돼 더디게 풀릴 수밖에 없다.

북·미 간에 2차 정상회담을 위한 잠정 합의 도출이 성공할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김 위원장이 정말 서울에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수용하기 어려운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를 고수하고 있다. 무엇보다 ‘90일 휴전’ 선언에도 불구하고 미·중 무역전쟁을 비롯한 제국주의 간 경쟁은 계속 악화할 것이다.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일으킬 정치적 파장은 작지 않겠지만, 그것이 문제 해결의 획기적 계기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답방을 둘러싼 태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 답방 문제가 대두하자, 우파들은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답방 논의를 계기로 ‘종북’ 단체들이 공공연히 김정은을 찬양한다고 불만이다. 통일부의 새 ‘남북관계 발전 기본계획’에 연평도·천안함 사건 언급이 빠지자, 우파들은 김 위원장의 답방 길에 “멍석을 깔아 주려”고 삭제한 것 아니냐며 성화다.

우파들은 대북 적대가 핵심인 냉전 이데올로기를 여전히 유지하고 남북 대결에서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답방에 반대한다. 이들의 수구적 고집불통을 보면 참으로 볼썽사납다.

한편, 노동자 운동 일각에는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 성사에 노동운동이 역량을 집중하자는 주장이 있다.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항구적 평화)을 얻는 계기가 될 수 있으므로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협조하자는 것이다. 노동자 운동의 다른 현안은 그다음에 따질 일이라는 견해를 함축한다.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은 애써 반대할 일은 아니다. 답방의 실현은 노동계급이 정치적 교훈을 배우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세계 제국주의 체제 속에서 정부 당국 간 협상으로 항구적 평화 실현이 가능하지 않음을 배우는 정치적 경험 말이다.

흔히들 국가 지도자들 간 협상으로 항구적 평화가 정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국주의 세계 체제의 상황이 훨씬 더 결정적인 요인이다.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경제적·지정학적 경쟁 체제는 심지어 트럼프나 시진핑 같은 강대국 지도자조차 통제할 수 없다.

하물며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그 자신들의 의지로) 한반도에서 항구적 평화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무망한 일이다.

2000년대의 경험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은 당시에 참으로 획기적인 발전으로 여겨졌다. 분단의 낡은 질서와 이데올로기가 곧 무너질 것이라는 낙관이 있었다. 그러나 18년이 지난 오늘날, 한반도 상황이 근본에서 바뀐 게 없다. 이번에는 다를 수 있을까?

게다가 협상의 당사자인 문 대통령은 긴장 완화에 필요한 중장기적 조처들 ─ 군축, 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 해체 등 ─ 에는 전혀 의지가 없다. 외려 그 반대로 행동하는 데 의지를 발휘할 때가 많다.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미래지향적 협력”을 지속하겠다는 것이나,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환수해도 한미연합사 체제를 유지하기로 미국과 합의한 게 그런 사례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각각 남한과 북한에서 노동계급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체제의 최상층에 속해 있다. 그 둘과 남북 노동계급 사이에 근본적인 이해관계 대립이 존재한다. 비단 경제적 이해관계뿐 아니라 평화 문제를 놓고서도 그렇다.

더구나 문재인 정부는 친시장·반노동 공세를 펴고 있다. 경사노위에 민주노총을 참가시켜 양보를 이끌어 내려고 애쓰면서 말이다. 노동자들의 불만과 분노가 커지는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는 그 분노를 달랠 여러 책략을 쓰는데, 현 맥락에서는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도 그 카드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노동자 운동의 ‘중심’이 무엇이어야 하느냐는 물음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남북한 화해·협력(특히,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 성사)을 중심에 놓으면, 문재인 정부의 반노동 공세에 맞선 투쟁은 그만큼 부차화돼 제 효과를 발휘하기 힘들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위해 투쟁에 나설 때 자신감과 의식이 성장할 수 있다. 그래야 평화를 위한 반제국주의 운동에 노동계급이 자신의 잠재력을 (일부라도) 발휘하는 게 가능해진다. 노동자 정치 조직들이 노동계급과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국가 지도자들 간 대화를 수동적으로 지지하도록 애쓰기보다, 노동계급이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애쓰는 것이 더 가치 있고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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