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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 도미노의 한 조각?

5월 12일부터 우즈베키스탄 안디잔과 카라수 지역에서 대중 시위가 발생했다. 직접적 계기는 23명의 지역 기업인들이 “급진 이슬람”이라는 누명을 쓰고 재판을 받은 것이었다. 이날 수백 명의 군중이 감옥을 습격해서 기업인들과 다른 죄수 2천여 명을 풀어 줬다.

13일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카리모프는 병사들에게 부상자까지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5백∼1천 명의 비무장 시위대가 학살됐다.

다음 날 대중 투쟁은 이웃한 페르가나 계곡의 카라수로 확대됐다. 지금 안디잔과 카라수는 모두 정부군이 통제하고 있다.

사실, 이번 대중 항쟁이 갑작스럽게 폭발한 데는 근본적 원인이 있다. 우즈베키스탄인은 대부분 국제적 빈곤선(하루 1달러) 이하의 소득을 벌고 있다. 그러나 일부 언론 보도처럼 경제 위기의 책임이 순전히 스탈린주의 유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사기업화의 정도는 낮지만 국가와 밀접히 연관된 소수의 사적 대자본가들이 형성돼 있고, 핵심 산업에서는 다국적 기업과 합작한 기업이 설립돼 있다.

지방 관료들이 대자본가와 결탁해 다른 자본가들의 재산을 압류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 때문에 ‘경제적 자유’를 요구하는 일부 자본가와 중간계급 지식인이 형성됐다.

우즈베키스탄은 세계 제2의 면화 수출국이며 외화의 60퍼센트를 면화 수출을 통해 얻는다. 우즈베키스탄 경제는 면화의 세계 시장 가격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

국가와 대자본가들은 이런 불안정성을 이용해 구매 가격을 낮춰 부담을 농민들에게 떠넘겼다. 최근 항쟁의 중심지였던 안디잔과 페르가나 계곡은 면화 생산 중심지였다.

지지 기반이 취약한 카리모프는 억압으로 사회를 통제해 왔다. 가장 온건한 야당조차 합법적인 활동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는 인구의 85퍼센트가 수니 무슬림인 나라에서 ‘급진 무슬림’뿐 아니라, 온건 무슬림 단체까지 탄압하기 시작했다.

2002년 우즈베키스탄 주재 영국 대사 크레이그 머레이는 카리모프가 비공인 모스크에서 예배를 봤다는 이유로 한 온건 무슬림을 끓는 물에 넣는 고문을 자행했다고 폭로했다.

이런 끔찍한 만행에 대해 미국은 위선으로 일관해 왔다.

2002년 카리모프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조지 W 부시는 그의 인권 탄압 기록에 침묵했다. 사실, 미국은 우즈베키스탄에 중앙아시아 최대 미군 기지를 보유하고 있다.

2001년 이후 미국은 우즈베키스탄에 매년 거의 1억∼5억 달러를 지원해 왔고, 그 중 3천만 달러는 고문을 자행하는 보안 경찰 훈련에 책정됐다.

역대 한국 정부도 이런 위선에 한 몫 했다. 한국은 우즈베키스탄 최대 투자자 중 하나다. 삼성 등 한국 자본은 우즈베키스탄에 10억 달러를 투자했다. 카리모프는 1990년대에 3번이나 한국을 방문했지만 아무도 인권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 노무현도 이번 5월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해 “우즈베키스탄 정부와 한국 정부는 모든 중요한 문제에서 입장이 같다”고 말했다. 최근 울산건설플랜트나 하이닉스 매그나칩에서 한국 경찰이 보인 폭력을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러나 내부 탄압과 외부 지원에도 불구하고, 카리모프 정부가 일부 부르주아와 중간계급 지식인을 소외시키고, 인구의 압도 다수인 소농과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상황에서 정치적 안정이 있을 수 없었다.

특히, 2004년에는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대중 시위가 빈번해졌다. 서방의 일부 언론과 정세 분석가들은 2004년 말 우즈베키스탄의 불안정이 커지고 있으며, 서방 정부들이 이에 대비한 정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상황은 아직 유동적이다. 카라수에서는 5월 20∼21일에도 시위가 계속됐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넓고 인구도 가장 많을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가장 강력한 나라다.

이런 나라의 정치적 불안정은 상당한 파급 효과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즈베키스탄은 키르기스스탄에 이어 중앙아시아 대중 투쟁 도미노의 한 조각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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