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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인권센터의 ‘입장’에 대한 반론
난민들은 스스로 싸울 수 있다. 노동자 대중의 지지와 연대를 이끌어 내는 게 중요하다

12월 12일 필자는 ‘김앤장 등 로펌들의 난민인권센터 등 인권 단체 후원: “사회 공헌” 이름으로 추악한 기업 이미지 세탁하기’ 기사를 발표했다. 김앤장 등 반노동·반인권·친제국주의 로펌들이 난민인권센터 등 인권 단체들을 후원하는 “사회 공헌”을 통해 자신들의 추악한 실체를 가리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그 기사에서 필자는 난민인권센터가 이런 로펌들과 법률 지원 업무협약을 체결해 후원을 받는 것이 매우 부적절한 일이라고도 비판했다. 무엇보다, 그런 방식은 난민들이 스스로 활동하고 투쟁하도록 돕고 난민 연대 운동을 대중 운동으로 성장시키는 데 해악적일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난민인권센터는 12월 14일 ‘공익로펌네트워크와의 협약에 관한 입장’(이하 ‘입장’)을 발표했다. 필자의 기사에 대한 답변으로 보인다.

난민인권센터는 ‘입장’에서 “먼저 사과[드리고] 본 협약에 대해서 우려를 느끼는 점에 있어 깊이 공감”한다고 밝혔다. 또한 “앞으로도 일부 법무법인이 일으키는 사회적 물의와 인권침해에 침묵하지 않을 것”이고, 협약을 맺은 로펌들이 협약을 근거로 “‘이미지 세탁’을 시도한다면 이에 대해서는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김앤장 등 대형 로펌들의 반인권·반노동 행태와 그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최근 불거진 일이 아니다. 임종인 전 의원과 장화식 씨가 공저한 《법률사무소 김앤장》이 첫 출판된 것이 2008년이다. 이 책은 한국의 재벌과 투기자본이 법적 문제가 생길 때마다 앞다투어 찾아가는 김앤장의 부패와 타락을 과감히 들춰냈다. 이 책의 부제는 ‘신자유주의를 성공 사업으로 만든 변호사 집단의 이야기’다.

난민인권센터가 로펌공익네트워크와 업무협약을 맺은 때는 이 책이 나온 지 9년이 훌쩍 지난 2017년 8월이었다. 그런데 〈노동자 연대〉의 공개 비판에 직면하고 나서야 “사과”한 것이다.

게다가 난민인권센터는 로펌들과의 협약을 중단하겠다고는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일부 법무법인”의 문제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정도에 머문다. 난민인권센터가 진정으로 사과하고 돌아보는 것인지 의구심이 드는 이유다.

운동 전망의 차이

난민인권센터가 ‘입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할애한 부분은 오히려 협약을 맺게 된 ‘불가피한’ 사정이다. “난민 신청자가 법 절차 앞에서 ... 열악한 지위에 놓일 수밖에 없는 상황, 그리고 난민 사건을 대리할 수 있는 변호사가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은 노동자연대와 난민인권센터 사이의 핵심 쟁점이 난민 연대 운동의 목표와 방법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노동자연대는 난민들이 스스로 투쟁에 나서고 그 투쟁을 한국의 광범한 대중이 적극 지원하는 일이 난민 연대 운동의 발전에 관건이라고 본다. 난민에 대한 법률 지원이나 법 개정 활동은 필요한 일이지만, 아래로부터의 운동 건설에 도움을 준다는 맥락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반면, 난민인권센터는 법·제도 개선과 법률 지원 자체을 목표로 한다. 이조차 대중운동을 통해 쟁취한다는 관점이 없다 보니, 난민 자신들보다 변호사·전문가의 구실이 더 중요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논리가 발전하면 법률 지원을 위해 심지어 김앤장 등의 지원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로펌들의 후원이 오히려 다수 대중에게 환멸감을 불러일으켜 대중운동 건설을 방해한다는 사실은 쉽게 간과된 채 말이다.

혹자들은 현재 난민들의 상태가 너무 열악해 그들 스스로 운동할 수 없으니, 지금은 난민 지원과 제도 개선에 주력하는 게 중요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건이 매우 열악해 도저히 투쟁에 나서지 못할 것 같던 사람들이 스스로 투쟁에 나서 자신들의 조건을 개선한 사례는 너무나도 많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 하나가 2003~2004년 이주노동자들의 명동성당 농성이다. 1990년대에 ‘현대판 노예제’로 악명을 떨친 산업연수제 하에서 국내 거주 이주노동자의 80퍼센트가 미등록 상태로 전락했다. 그러나 이런 조건에서도 이주노동자들은 1990년대 말 투쟁에 나섰고, 명동성당 농성은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투쟁은 (미약하나마) 민주노총의 지지를 이끌어 냈고, 이주노동자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을 크게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지금도 유럽에서는 난민들이 비교적 안정적인 체류 권리를 얻고자 스스로 투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김앤장 등과 협약을 맺게 됐다는 난민인권센터의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자신들의 운동 전망에 따라 대중운동 건설이라는 대안을 도모하기보다 대형 로펌의 후원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 후원과 무뎌지는 비판

(사회운동에 참가하는) 적잖은 엔지오들이 그간 기업(이나 정부) 후원을 받는 것에 관한 문제의식이 크게 무뎌져 그 해악성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심지어 돈의 출처가 어디가 됐든 공익을 위해 사용하면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라고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기업들의 ‘공익 후원’ 목적이 기업 이미지 향상을 통해 착취와 악행을 은폐하기 위한 것일 뿐임을 간과하는 것이다. 기업 지원이 좋은 일에 쓰였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기업들의 이런 목적에 봉사한다.

난민인권센터 같은 엔지오들은 비판은 비판대로 해 나갈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기업을 날카롭게 비판하면 할수록 기업 후원을 받기는 더 어려워질 뿐 아니라, 왜 그런 기업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도 커질 수밖에 없다.

결국 기업에게서 후원받는 일이 정당화될수록(마찬가지 논리로 지배자들 중 ‘개혁적’ 일부가 사회 개혁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볼수록) 엔지오가 자신의 목표를 기업(이나 정부)이 인정하는 수준으로 맞춰야 한다는 생각은 점점 커질 것이다. 이럴수록 언론에 접근하기도 쉬워지고 중요한 기금 모금도 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논리가 발전하면 오히려 유명 기업(이나 정부)에게서 거액을 받을수록 자기 단체의 위상이 올라간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기업 후원을 받는 엔지오를 더욱더 온건하게 만든다.(한편 이런 식으로 단체 운영 재정을 마련하는 것은 부메랑이 돼 돌아온다. 가령,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운동 당시, 이명박 정부는 정부 보조금을 ‘무기’ 삼아 촛불 운동에 참가한 엔지오들을 통제하려 했다.)

옥스팜이나 ‘국경 없는 의사회’ 같은 국제 엔지오들이 점차 북반구 정부들과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밀착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옥스팜은 기금의 4분의 1을 영국 정부와 유럽연합한테서 직접 받고, ‘국경 없는 의사회’는 기금의 거의 절반을 다양한 정부 재원으로 충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옥스팜과 (노동당) 정부 사이의 ‘회전문’ 현상은 유명하다. 또, 2000년대 중반 영국 정부가 임명한 아프리카위원회가 아프리카 대륙의 불행을 치유할 만병통치약으로 사유화와 자유무역을 제시한 장문의 보고서를 출판했을 때, 옥스팜은 이를 칭송했다.

‘국경 없는 의사회’는 남반구의 인권 보장을 위한다며 서방 국가들이 ‘인도주의적 개입’ 운운하며 군사 개입을 하는 것을 지지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런 국제적·역사적 경험들은 기업이나 정부 후원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는 점을 보여 준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태도

한국의 많은 엔지오들은 민주당 정부 같은 부르주아 자유주의적 정부·정당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본다.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 건설보다는 이들을 설득하는 일이 우선된다. 심지어 김앤장 같은 곳의 후원을 받아내는 일이 주류 사회를 설득할 자신들의 영향력을 높여 주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예멘에 폭격을 퍼붓고 있는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 지원을 해 왔다. 12월 7일 문재인 정부와 국회는 아랍에미리트 아크부대 파병연장안을 통과시켰다. 한국 정부도 예멘 난민 대량 발생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즉, 한국 정부는 난민을 발생시키는 제국주의 전쟁의 지원 세력이다. 기업들은 이런 국가의 지정학적 힘을 이용해 돈벌이를 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 이들은 맞서 싸워야 할 ‘적’이지 ‘친구’일 수 없다.

오늘날 경제 위기 때문에 세계 곳곳의 나라들에서 지배자들은 이주민 차별과 난민 배척을 조장하고 있다. 이런 토양 속에서 미국과 서유럽에서는 인종차별적 우익 포퓰리스트들이나 파시스트도 성장한다. 심지어 브라질에서도 극우 정부가 등장했다. 대중의 불만 증대 속에서 속죄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문재인 정부는 우익 정부가 아니라 중도 자유주의 정부다. 그러나 정부는 노골적으로 우경화면서 노동 대중을 배신하고 있다. 이런 정부의 협조를 얻어 개혁을 이루려는 노력은 점점 더 부질없는 일이 될 것이다. 개혁 입법조차 대중운동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개혁 염원 배신으로 말미암은 대중의 불만을 대변하며 독립적인 아래로부터의 운동에 주력해야 하는 이유다.

‘아래로부터’ 강조하기

그러려면 난민 연대 운동은 쉽지 않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재정 독립성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

각자 비슷한 활동들을 각개약진식으로 하지 말고 상호 통합과 재정 통합 등으로 자체 재정을 조달하는 걸 검토해야 한다. 국제적·역사적으로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노동운동의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조합들에서도 재정적 곤란에 직면했을 때 진작부터 이런 방법을 사용했다.

무엇보다 대중적 운동 건설을 통해 난민에게 연대하고자 하는 광범한 대중(대형 노동단체 포함)의 지지를 얻는 식으로 자력갱생을 도모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건대, 운동에 난민들을 동참시키고 난민들이 스스로 투쟁하도록 지원하고 연대를 조직하는 게 중요하다. 난민을 시혜의 대상으로나 보고, 기성 권력자들 일부에게 인정받고 그들과의 협력을 중시한다면 결코 대중적인 난민 연대 운동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위에서 베푸는 개혁에 기대는 것은 대중을 수동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반대로, 난민과 한국 노동자들이 함께하는 운동이 벌어진다면 다수 난민을 위한 더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 눈앞의 현실만 볼 게 아니라 사회 구조의 동학을 봐야 한다. 그래야 대중의 잠재력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