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위대한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100년 전인 1919년 1월 15일에 사망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기여와 유산을 세이디 로빈슨이 돌아본다.


100년 전 1월 15일, 우파적 준군사 조직 자유군단이 개혁주의 정당 독일사회민주당(SPD, 이하 사민당)의 명령에 따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했다.

이들이 룩셈부르크와 그녀의 동지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살해한 것은 독일 노동자 혁명을 멈추기 위한 시도의 일부였다.

룩셈부르크는 단호한 혁명가였고,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발전시킨 글을 썼다.

그녀는 노동계급 스스로의 행동이 사회 변혁에서 핵심이라고 봤고, 개혁으로 사회주의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들에 맞서 싸웠다.

유럽 전역의 좌파 개혁주의 정당들이 제1차세계대전에서 자국 지배계급을 지지한 후에도 룩셈부르크는 국제 사회주의를 위해 계속 투쟁했다.

룩셈부르크는 1871년 폴란드의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학생 때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16살에 폴란드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프롤레타리아당에 가입했다.

나중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에 대한 폴란드 독립 요구를 프롤레타리아당이 지지하는 데 반대하며 탈당해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수감을 피해

룩셈부르크는 수감을 피해 1889년에 스위스 취리히로 갔고, 이후 1898년에 독일 베를린으로 옮겨갔다.

그녀는 1904년에 “황제 모독죄”로, 1906년에 “폭력 선동죄”로 수감됐고, 이후에는 제1차세계대전에 반대한 것 때문에 3년 반을 감옥에서 보냈다.

룩셈부르크는 새로운 나라에 온 젊은 여성이었지만, 더 저명한 사회주의자들에 도전하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사민당에 입당한 룩셈부르크는 개혁주의 사상의 위험성을 감지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다.

사민당은 공식적으로는 혁명적이었지만 실천에서는 개혁주의적이었다.

사민당의 주요 인사였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자본주의는 위기에서 멀어졌고 더 공정한 사회를 향해 전진할 것’이라고 주장한 후 공개적 논쟁이 벌어졌다.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의 주장에 반대했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성장한다고 해도 사장들 사이의 경쟁이 끝나기는커녕 더 파괴적인 규모로 벌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룩셈부르크는 혁명 대신 개혁을 선택한 사람들은 “같은 목표로 나아가는 더 차분하고 평온한 길이 아니라, 아예 다른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에게 사회주의는 “불가피”했는데, 이 말이 룩셈부르크가 개혁을 위한 투쟁을 무시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녀는 개혁을 위한 투쟁은 노동자들이 혁명을 준비할 수 있게 하는 핵심 열쇠라고 봤다. 투쟁으로 노동자들의 사상, 경험, 자신감이 발전하기 때문이었다.

룩셈부르크는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러시아 파업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평의회를 세웠다.

이 노동자 평의회[소비에트]는 대안적 정치 권력 기구였으며, 의회보다 훨씬 더 민주적이었다.

이전의 혁명들은 경제투쟁에 기초하지 않았지만, 자본주의는 국가와 경제 권력을 더 가까이 묶어 놓았다.

어떤 사람들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이 별개라고 봤다. 룩셈부르크는 《대중파업》[원제: 《대중파업, 정당 그리고 노동조합》]을 써서 두 전투가 같은 계급투쟁의 다른 측면이라고 주장했다.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썼다. “모든 정치투쟁의 생생한 승리는 경제투쟁의 강력한 동력이 된다.”

그녀는 대중 파업이 “혁명의 살아 있는 심장 박동이며,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파업이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정치적 충격이 “가장 값진 것”이라고 봤다. “왜냐하면 가장 오래 지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룩셈부르크는 혁명에 대한 신념을 꺾기를 거부한 것처럼 민족주의적 전쟁 도발에 굴복하는 것도 거부했다.

러시아 볼셰비키와 불가리아·세르비아의 사회민주당을 제외한 모든 좌파 정당들이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을 지지했다.

룩셈부르크는 전쟁이 자본주의가 “피를 흘리며 오물을 뒤집어 썼다”는 것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그녀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최상의 제국주의 지지자들 중 하나”라고 비난했다.

전쟁에 대한 태도 차이는 자본주의의 성격에 대한 이론적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었고,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문제와 연결돼 있었다.

카를 카우츠키와 같은 사민당 개혁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더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군비에 쓰는 낭비 때문에 자본가들 일부는 전쟁에 반대할 것이라 주장했다.

룩셈부르크는 권력과 새로운 시장을 두고 국가들이 벌이는 경쟁인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이 말은 전쟁 없는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없음을 뜻했다.

조직을 멀리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룩셈부르크의 사상 중 많은 것들이 왜곡됐다.

예컨대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사회주의를 필연적이라 봤으며 노동자들의 “자발성”을 지지해 조직을 멀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룩셈부르크가 노동자들의 자발적 활동을 찬양한 것은, 노동자들이 행동에 나서기를 혁명가들이 수동적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룩셈부르크는 혁명가들이 투쟁에 개입하기를 거듭해서 촉구했다.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의 “전제 조건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회주의가 “의식적인 개입 없이, 노동계급의 정치 투쟁 없이”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룩셈부르크가 볼셰비키를 비판한 것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을 “국제 사회주의의 명예 회복”이라고 찬양했다.

룩셈부르크는, 자유주의자들과 부르주아 세력이 노동자 평의회 대신에 지지한 제헌의회를 볼셰비키가 해산한 것을 비판했다.

하지만 룩셈부르크는 독일 혁명을 겪으면서 부르주아 기구를 수호하라는 요구는 노동자들의 지배를 끝장내려는 것임을 이해하게 됐다.

독일의 개혁주의자들은 의회가 사회의 운영을 감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룩셈부르크는 의회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에 맞서 세워진 반혁명의 요새”라고 말했다.

룩셈부르크에게 결함이 없지는 않았다. 그녀는 민족주의를 적대했기 때문에, 제국주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피억압 집단의 민족 해방 투쟁을 지지하지 않았다.

룩셈부르크는 옳게도 노동자들이 자기 행동 과정에서 경험과 혁명적 의식을 구축한다고 봤다. 하지만 그녀는 혁명적 조직을 혁명적 기간 동안에 만들 수 있는 “과정”으로 보기도 했다.

반면 볼셰비키는 혁명이 성공하려면 조직이 [혁명 이전부터] 건설되고 노동계급에 뿌리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볼셰비키가 옳았음이 입증됐다.

1918년 독일 혁명

1918년 10월 독일에서 혁명이 벌어졌지만, 룩셈부르크와 동료들은 1919년 1월까지 공산당을 창당하지 않았다.

신생 공산당은 매우 작았고 주요 작업장에 당원이 거의 없었다.

공산당은 강령에서 노동계급 다수의 지지 없이는 공산당이 권력을 잡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경험이 부족했다.

정부 타도

[공산당이 창당한] 같은 달 온건 정당인 사민당은 공세를 취했다. 베를린의 영향력 있는 노동자 단체가 정부 타도를 요구했다.

룩셈부르크는 애초에는 이에 반대해, 압도 다수의 독일 노동자들은 정부 타도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다른 공산당원들은 정부 타도 요구를 지지했고 결국 룩셈부르크도 그렇게 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는 1917년 7월 섣부른 봉기에 반대하는 주장을 성공적으로 할 만큼 강력했다.

훗날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는 이렇게 썼다. “노동 대중에게 보편적으로 권위가 받아들여지는 전투적 지도력을 갖춘 중앙집중적 혁명 정당이 독일에는 없었다.”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렀다. 1918년 11월 독일에서 만들어진 노동자 평의회들은 국가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 사민당 정부에 넘겼다.

사민당은 실천에서는 개혁주의적이었지만 매우 좌파적으로 들리는 급진적 언사를 사용했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사민당이 아니라 혁명적 정치를 지지하게 하려면 혁명가들의 조직적 구심점이 있어야 했다.

사민당은 전직 장성들과 함께 준군사 조직인 자유군단을 창설해 혁명을 깨부수려 했다. 사민당 지도자 프리드리히 에버트는 자유군단에게 공산당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1월 15일, 룩셈부르크는 붙잡혀 고문당하고, 머리에 총을 맞았다. 시신은 베를린 운하에 버려졌다. 훗날 자유군단 병사들 다수는 나치에 가입했다.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딜레마에 직면한다고 주장했다. 파시즘과 전쟁의 공포는 룩셈부르크의 주장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룩셈부르크는 혁명만이 사회주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옳게 주장했다.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경고했다.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재산, 이윤, 특권, 착취할 권리를 포기하라는 사회주의 의회의 결정에 저항 없이 순종하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정신 나간 착각이다.

“제국주의적인 부르주아지는 임금 노예 체제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느니 차라리 나라 전체를 폐허로 만들 것이다.

“이 모든 [부르주아지의] 저항을 분쇄해야 한다. 부르주아 반혁명의 폭력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폭력으로 상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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