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꿈: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평전》 | 김순천 지음 | 후마니타스 | 2011년 | 10,000원

《인간의 꿈》은 부조리에 항거해 분신한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열사의 평전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배달호와 전태일이 겹쳐졌다. 소박하고 인간미 넘치는 모습이나 동료에 대한 깊은 애정, 그리고 책임감까지 두 열사는 닮은 점이 많았다.

하지만 배달호의 삶과 투쟁은 《전태일 평전》을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 현재성 때문이다. 1960년대 평화시장 전태일의 삶이 오늘과는 다소 떨어진 느낌이라면, 김대중 정부 하에서 민영화를 겪으며 분신에 이른 배달호의 삶은 오늘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배달호가 “닫힌 문”이라고 느낀 손배·가압류는 지금도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절망에 빠뜨리려는 정부와 사용자들의 더러운 무기이다. 경제 위기의 책임을 오롯이 노동자들이 짊어지는 와중에 막대한 이익을 챙긴 두산의 행태는 한국GM, 금호타이어 같은 최근의 구조조정 사업장을 떠올리게 한다. ‘중공업의 위기’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들의 조건을 공격하기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1987년을 겪으며 투사로

가난하게 자란 배달호는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했다. 하지만 특유의 손재주와 성실함으로 스물여덟 살이 되던 1981년 한국중공업에 입사했다. 당시 한국중공업은 공기업이었다. 한국중공업에 입사한 배달호는 열심히 일해서 행복하게 살 날을 꿈꿨다.

하지만 현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관리자와 노동자들이 밥 먹는 자리도, 반찬도 다를 만큼 차별적이고 권위적이었다. 잔업과 철야는 선택이 아닌 필수여서 불응하면 불이익을 당했다. 탈의실 냄새가 심해서 환풍기를 하나 달아 달라고 했다가 ‘권고사직’을 당한 동료가 있었다. 작업 중에 크고 작은 사고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지만 산업재해로 처리되는 일은 없었다.

배달호가 본격적으로 노동자로서의 삶에 눈을 뜬 것은 1987년 7~8월 대투쟁 이후였다. 6월항쟁과 울산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투쟁에 영향을 받은 한국중공업 노동자들은 그해 8월 쌓인 불만을 터뜨렸다. 공장문을 폐쇄하고 진행된 점거 파업에 수천 명이 참가했다.

공장 내 집회 장소에 모인 노동자 4000명은 트레일러 위에 마련한 단상에 사장을 세웠다. 이렇다 할 대표도 없이 구두로 진행된 협상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노동자들이 소리쳤다. “임금!”

그러자 사장이 답했다. “5퍼센트”

노동자들: “적다!”

사장: “8퍼센트”

노동자들: “적다!”

사장: “10퍼센트”

노동자들: “좋다!”, “민주 노조 인정하라!’

사장: “생각해 보겠다.”

노동자들: “민주 노조!”

사장: “해주겠다.”

민영화라는 부조리

노동조합을 만든 이후 배달호는 새로운 삶을 맛봤다. 배달호의 마음속에 자신감과 동료들에 대한 믿음이 들어찼다. 그러나 한국중공업이 민영화 돼 두산으로 넘어가면서 다시금 고통이 찾아왔다.

1998년 7월 김대중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중공업을 포함해 11개 공기업의 민영화 방침을 발표했다. 한국중공업은 10년째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고 1998년에도 768억 원 흑자를 냈다. 그래서 마산·창원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우량 기업을 민영화해선 안 된다는 여론이 높았다. 노동자들도 민영화 반대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결국 민영화가 확정됐다. 2000년 12월 12일 정부의 경쟁 입찰에서 한국중공업이 어느 기업으로 넘어갈지 결정될 때 노동자들은 참관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정부는 노동자들과 합의를 통해 입찰하겠다던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던졌다.

두산그룹은 자산이 5조 원에 달하는 한국중공업을 고작 3057억 원에 인수했다. 전문 경영체제를 약속했지만 한국중공업을 차지한 것은 ‘족벌’ 기업이었다. 지분을 분산하겠다던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요구한 민영화의 전제 조건들은 모두 무시당했다.

한국중공업을 인수한 두산은 곧이어 해고와 외주화, 하청화를 추진했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더 적은 임금으로 하청업체에 고용돼, 원래 하던 일과 똑같은 일을 했다.

두산에 인수된 지 3개월 만에 회사는 적자로 돌아섰고, 반면 두산그룹은 점점 거대해졌다. 노동자들은 피땀으로 만들어 놓은 회사가 두산 재벌에 의해 뜯어 먹히는 꼴을 지켜봐야 했다.

노조 파괴와 손배·가압류

노동자들은 두산에 맞서 힘겹게 저항했다. ‘소사장제’를 파업으로 막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두산중공업 회장 박용성은 본격적으로 무지막지한 탄압의 시동을 걸고 있었다.

사측은 파업에 참여한 조합원 201명을 전원 징계했다. 그리고 임단협을 거부하고 단체협약 해지를 통보했다. 노동조합은 항의하지만 사측은 노조 간부들을 고소·고발했다. 두산은 노조 파괴에 11억 5600만 원의 예산을 투여했다.

사측은 친노조 노동자와 비노조 노동자 사이를 이간질했다. 거기에 더해 손배·가압류로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숨통을 조였다. 사법부는 두산의 불법적 노조 파괴 행위를 처벌하기는커녕 사측의 노동자 고소·고발을 다 받아 줬다. 악랄한 두산은 노동자들의 개인 재산, 통장, 급여까지 가압류했다.

이즈음 배달호도 가족들과 함께 살던 집을 차압당했다. 그의 월급은 가압류를 제하고 2만 5000원에 불과했다. 2003년 1월 9일 새벽, 배달호는 두산의 악행과 그것을 두둔하는 사법부를 규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정든 공장에서 몸에 불을 붙였다.

노무현 정부

배달호의 죽음에 항의해 벌어진 투쟁을 노무현 정부는 매몰차게 대했다. 당시 민주노총을 방문한 노무현은 “신자유주의는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이므로 “시대의 흐름을 수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배달호의 죽음 이후에도 두산 사측은 끈질기게 그의 동료들을 박해했다. 하지만 결국 전국적인 지지와 연대에 밀려 두산은 개인 손배·가압류를 전부 취하하고 일부 해고자들을 복직시켰다.

배달호 열사의 분신은 민영화의 폐해, 손배·가압류의 부당함, 그리고 사법부와 민주당 정부의 계급적 본질을 똑똑히 보여 줬다.

그 의미는 지금도 유효하다. 배달호 열사가 분신으로 항거한 지 15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손배·가압류, 민영화와 구조조정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많다. 살아서 투쟁하고 있는 오늘의 배달호들인 것이다.

이런 투쟁을 지지하고, 그 경험으로부터 배우고 싶은 청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