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좌파 포퓰리즘은 성공 가능한 전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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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샹탈 무페의 새 책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문학세계사)가 한국에 번역·출간됐다.(무페는 대표적 좌파 포퓰리즘 이론가로, 국내 좌파 중에는 특히 노동당의 새 대표단이 무페가 주장하는 좌파 포퓰리즘 전략에 친화적이다.) 오늘날 포퓰리즘은 한국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좌우 양쪽에서 부상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우파가 차지한 ‘포퓰리즘’ 모델을 좌파가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국내에서도 나오고 있다. 엑토르 푸엔테 시에라가 그런 주장들의 문제점을 분석한다.
주류 매체는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제러미 코빈의 인기, 브렉시트 국민투표 같은 다양한 현상들을 ‘포퓰리즘’의 결과라고 설명해 왔다. 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이 지배적 정치·경제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를 일축하는 데에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를 남용한다. 그런 제기를 이탈리아의 새 내무부 장관 마테오 살비니로 대표되는 인종차별적 우파가 하든, 급진 좌파가 하든 말이다.
그렇게 보면, 평범한 대중의 감정을 휘젓기 위해 고안된 “무책임한 약속들”을 하는 경향이 우파와 좌파를 묶어주는 공통점이다. 이에 맞서 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은, 모든 곳에서 긴축을 강요해
좌파 중 일부는 포퓰리즘이라는 비난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2014년 만들어진 스페인 정당 포데모스가 대표적이다. 포데모스의 지도자들은 좌파 포퓰리즘의 선구적 이론가들인 샹탈 무페와 고
정도는 달라도 장-뤼크 멜랑숑의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그리스의 시리자와 거기서 분열해 나온 민중연합, 미국의 버니 샌더스나 영국의 코빈의 선거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또한 좌파적 버전의 포퓰리즘 정치를 모색하고 있다.
무페와 라클라우가 각각 쓴 두 책이 최근 출판된 것을 보면 좌파 포퓰리즘 정치에 대한 관심이 다시 떠올랐음을 알 수 있다. 무페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이 책의 주된 논지는 이렇다. 2007~08년 경제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합의에 균열이 생겼고,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 정당들이 별반 다르지 않은 정책을 옹호하며
이어서 무페는, 권력자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에 맞서 서로 다른 집단들의 불만을 모아 ‘민중’을 창출해 내는 정치 담론을 표명하는 것이 좌파 정당들이 직면한 과제라고 주장한다. 그런 담론이 헤게모니·지배력을 쟁취하는 데에 사회 운동과 시민 사회가 중요한 구실을 맡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포퓰리즘 정당의 집권이다.
라클라우는 2005년 저서 《포퓰리즘적 이성》 개정판에서 포퓰리즘의 작동 방식을 더 상세하고 또한 더 학술적으로 설명했다. 라클라우에게 포퓰리즘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정치를 하는 방식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이런 개념들은 낯설지 않다. 마크르스주의자들은, 혁명가들이 차별에 맞서고 더 나은 조건을 요구하는 모든 투쟁에 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로 다른 투쟁들이 결합되고, 그 투쟁들이 자본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정치 기구들에 대한 정치적 공격으로 일반화될 수 있도록 말이다.
인류 전체
노동계급은 자신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활동하면서 인류 전체의 조건을 향상시킬 수 있는 보편적 집단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와 포퓰리즘은 어떻게 다른가?
라클라우와 무페는 1985년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노동계급 운동은 참담한 패배를 겪어 그 영향으로 지속적으로 사기저하했다. 이 맥락에서 라클라우와 무페는 이렇게 주장했다.
라클라우와 무페가 보기에 이것은 마르크스주의가 결정론적
이들의 마르크스주의 거부는
첫째, 마르크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가 동질적인 혁명적 의식을 갖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일상적 상황에서 노동계급은 매우 분열돼 있고, 이 때문에
계급은 라클라우와 무페가 말하듯 “담론적 분절”이 아니라 객관적 관계이며, 노동자들은
둘째, 스탈린주의 같은 우스꽝스럽게 왜곡된 마르크스주의만이 경제적 변화가 기계적으로 반영돼 정치·이데올로기·법률·사회적 변화가 생긴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특정한 사회의 생산관계가 다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규정하고 그 한계를 정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 말이, 그 영역들이 고유한 특성이 없다거나 경제의 작동과 충돌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 같은 섬세한 접근을 포퓰리즘 이론가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마르크스를 초월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마르크스가 거의 200년 전에 비판한 관념으로 퇴보했다. 사람들의 정신이 그 자체로 역사를 만드는 힘이라는 사상 말이다.
예컨대, 1980년대 대처가 헤게모니를 장악한 것에 대한 무페의 설명은, 대처 이전에 사회민주주의·케인스주의 복지가 정당성의 위기에 빠진 더 넓은 경제적 맥락, 전후 호황이 끝나고 이윤율이 떨어졌다는 것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무페는 우파가 기회를 잡는 데 더 능숙했고, 계급에 대해 본질주의적으로 집착한 좌파보다 우파가 더 매력적인 담론을 제시했다는 식의 설명에 몰두했다.
이렇게 경제의 구실을 무시하는 것은 중요한 결과를 낳는다. 무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이 때문에 무페는, “자유민주주의 정권의 구성적인 정치적 실천과 그 실천이 제도화된 사회경제적 실천 사이에 서로 다른 분절”이 있다는 것이 오늘날 좌파 포퓰리스트들에게 중요한 점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무페는, “개혁과 혁명 사이의 잘못된 딜레마” 때문에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자유민주주의 기구가 융합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무페는 자신이 주장하는 “제3의 길”은 국가와의 완전한 단절을 추구하지도 않고 전통적 개혁주의처럼 체제에 순응하지도 않는 “혁명적 개혁주의”라고 주장한다. 이어서 무페는, 혁명적 개혁주의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소유 관계에 도전하면서도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무페는 국가가 중립적 지역이라고 믿는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지만, 그 자신도 국가의 자본주의적 본질을 부정한다. 무페에 따르면 국가는 “대항 헤게모니 투쟁을 위한 중요한 장소”다. 이런 생각은 무페의 “경합적 민주주의 모델” 개념과 연결된다. 이 개념은 “상대가 파괴해야 할 적이 아니라 그 존재가 정당하다고 여겨지는 경쟁 상대로 간주되는” 체제가 있다면 정치적 갈등이 있더라도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자본가의 지배
이런 생각은, 자본가 지배를 거스르는 상황에서는 “경합적” 체제 온존이 단지 정치적 의지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무시한다.
“불행히도 유럽연합의 잔혹한 대응 때문에 시리자는 자신의 반긴축 강령을 이행할 수 없었다”, “명백히도 이는,
유럽연합의 반동적 구실에 대한 이러한 진지한 평가는 매우 환영할 만하지만, 자유민주주의 기구에 대한 민주적 통제에 한계가 있는 이유를 유럽연합 때문으로만 국한해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떠한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군대, 사법부, 기성 매체는 자본주의적 이익의 담지자들과 “혁명적 개혁주의자들”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은총을 입고 당연스레 통제할 수 있는 기구들이 아니다.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개혁과 혁명이라는 이 문제를 100년도 더 전에 중요하게 다뤘다.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썼다.
“
룩셈부르크에게 국가와 국가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태도 문제는 “잘못된 딜레마”가 아니라 근본적 전략 문제였다.
이렇게 보면, 포퓰리즘 전략은
무페는 유럽 전역에서 극우의 부상에 어떻게 맞설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지만, 좌파 포퓰리즘은 사회에서 지배적인 사상에 대한 순응으로 이어질 수 있는 선거주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다. 인종차별과 민족주의가 너무나 광범해서 그것들을 어느 정도 수용해야만 헤게모니를 쥘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긴축을 강요하고 난민을 박해한 시리자 정부의 사례가 매우 유의미하다. 하지만
만약 사회주의가 헤게모니를 쥐고자 한다면, 우리는 더 강력한 반자본주의 좌파를 건설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좌파는 권력자에 맞서 천대 받는 사람들을 단결시키려 염원할 뿐만 아니라 국제주의와 인종차별 문제에서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결정적으로, 의회주의의 한계와 국가의 성격에 관해 그리고 싸울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에 관해 명확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