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은 1월 10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올해는 경제에서 성과를 보여야 한다.” 정부와 여당의 신년 행보를 보면, 이 말은 기업 주도 성장으로 성과를 내겠다는 뜻임이 분명하다.

문재인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친기업 기조를 대단히 강조하고 닷새 만에 그는 대기업 총수 중심으로 130명이 참석한 기업인들과의 대화를 열었다. 앞서 1월 7일에는 중소·벤처 기업인들과 대화 자리를 가졌다.

화기애애 문재인의 진짜 친구들 ⓒ출처 청와대

1월 15일 대기업 소유주들과의 만남에서 KT 황창규, SK 최태원, 현대차 정의선, 삼성 이재용 등 참석자들은 모두 정부에 규제 완화와 투자 지원 등을 요청했다. 문재인 신년사에서 다 강조됐던 내용이므로, 다짐을 받는 차원에서 한 요청일 것이다.

규제 샌드박스(신기술 분야에서 규제 면제·유예)의 추가 강화, 벤처 투자 지원 강화, 전기·수소차나 데이터 등 혁신 경제 지원, 기술 인력 양성 투자, 임금 억제 등등. 여기에 국가가 보유한 개인정보에 기업이 접근하고 그것을 활용하게 해 달라는 황창규의 요구가 추가됐다.

이런 한목소리는 지난해 확대경제장관회의와 2019년 경제정책 방향부터 신년 기자회견까지 문재인 정부가 충실하게 기업 프렌들리로 나아왔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해찬도 15일 금융투자협회를 방문해 금융 규제 완화와 감세를 약속했다.

경제 상황이 안 좋아지자 문재인은 이제 정부 지출과 규제 완화 등으로 기업 투자를 지원해서 일자리를 늘려 보자고 말한다. 당연히 그에게는 기업주가 동반자이고 노동자들의 요구는 억제돼야 한다.

물론 삼성 등 몇몇 재벌 총수들을 대상으로 여전히 검찰 수사가 벌어지고 15일 회동에서 한진 조양호 등이 제외되는 등 정부와 기업주들 사이에 긴장이 다 없어지진 않았다.

그러나 법원이 재판 거래 사건 수사를 대놓고 망치는데도 정부는 3권 분립을 명분으로 말을 아껴왔다. 게다가 정부는 뇌물죄 재판 중인 기업인을 사실상 국정 동반자로 공개적으로 싸돌고 있다. 또한 1월 10일 국무총리가 삼성 공장을 방문해 이재용을 만났고, 문재인도 조만간 방문할 계획이다. 이런 일들을 보면 문재인 정부의 기본 방향은 분명하다.

이는 기업주들이 수조 원을 투자할 수 있는 진정한 지배자, 결정권자이기 때문이다. 이재용은 15일 회동에서 대규모 투자를 문재인에게 약속했다.

돌아보건대 문재인은 대통령 취임 후 첫 방문이 인천공항 비정규직이라고 자랑했다. 그러나 그때 이미 문재인은 “기업 부담”을 언급하며 노동자가 무리한 요구를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반면 기업인들에게는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라고 말한 적이 없다.

문재인의 1월 8일 청와대 인사도 이 방향을 가리킨다. 전반적으로 다선 의원 출신을 전진 배치해 정무적 기능이 강화했다. 이는 임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여권 단속과 함께 한국당과의 의회 협치에 중점을 두겠다는 것이다. 주중대사에서 새 비서실장이 된 측근 노영민은 기업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후 줄곧 친기업파로 일해 왔다. 국회신성장포럼을 만들어 대표까지 지냈다. 그와 관련해 문재인도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노 비서실장은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에 오래 있었고, 위원장도 했기 때문에 산업 정책에 있어서도 밝고, 그 분야 인사들과 충분히 교류할 수 있는 인사다. 그런 장점도 발휘되기를 기대한다.”(10일 신년 기자회견)

노영민도 소명을 잘 안다. 그는 신임 인사차 국회 정당들을 방문해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은 친기업적 마인드를 갖고 있으며, 시장 기능의 중요성도 잘 안다 … 제게 기업들이 신나게 투자하고, 성장과 포용이 이뤄지도록 적극적인 역할을 해 달라고 했다.”

소득주도성장의 초심을 잃지 말라는 이정미 정의당 대표의 말에 노영민은 선을 딱 그으며 솔직하게 말했다. “모두에게 좋은 경제는 없는 것 같다. 선택의 문제가 많다. 선택의 문제에 있어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경제에 대한 철학을 굳건히 세우고 갈 수밖에 없다.” 기업 주도 성장이 먼저고, ‘포용’은 그 보완일 뿐이라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2기 본색

여권의 최근 언행들은 문재인의 기업 프렌들리 기조에 확고히 서 있다. 이는 문재인 신년사에 포함된 모순된 구절 중에 무엇이 포장지이고, 무엇이 알맹이인지 보여 준다.

문재인은 10일 신년사에서 “소득주도성장”, “사람 중심 경제” 같은 그럴듯한 말을 써서 마치 진보적 어젠다를 여전히 유지하는 것처럼 말했다. 심지어 “낙수 효과는 끝났다”는 표현까지 썼다.

그러나 노동 개악에 대한 질문에는 낙수 효과를 노동계가 인정하라는 취지로 답했다.

“노동자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도 우리 전체 경제가 함께 살아나는 과정에서 가능하다 … 경제가 어려워지면 종국에는 노동자들조차도 일자리가 충분하지 않게 된다.”

사실 신년사에서 문재인이 “혁신적 포용국가”를 말했지만, “혁신”이라는 단어를 21번 말할 동안 “포용”은 9번만 말했다. 성장(자본 축적)과 복지의 우선순위가 드러난 것이다. “경제”(36회), “성장”(29회), “기업”·“산업”(각 8회), “투자”(7회)·“자영업”(4회)을 반복해 언급한 반면, “노동자”와 “최저임금”은 딱 1번씩 언급했다. 그나마도 최저임금은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자영업자의 고충을 해결해 준다는 문맥에서 나왔다. 안전 중시 기조를 이어가겠다면서도 “김용균”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복지”라는 단어가 한 번도 안 쓰였다는 것이다. 대신 “고용안전망”(2회), “사회안전망”(4회), “지원”(9회, 그중 5회가 서민 복지 의미로 쓰임) 같은 단어가 쓰였다. 이 정부의 노동·복지 정책이 서민층의 삶을 시장에 맡긴 후 사후 보완하는 성격임을 보여 주는 용어법이다. 

노무현 정부 시즌2 정부답다. 문재인의 “혁신적 포용국가”는 김대중이 시작하고 노무현이 발전시킨 한국판 제3의 길인 “사회투자국가” 노선의 재탕이다. 

사회투자국가 노선은 국가의 생산성 투자를 중시한다. 노동과 복지는 생산성 투자(“혁신”)를 위한 보조 투자(“포용”)로 자리매김된다. 가령, 당시 민주당 정부는 교육부의 명칭을 교육인적자원부로 바꿨다.(민주당 김진표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김병준이 이때 장관을 지냈다.)

노동생산성이 늘어나려면 경쟁이 강화돼야 한다고 봤으므로 기업 간 경쟁이나 취업 경쟁에서 “기회의 균등”, “과정의 공정”이 강조된다. 이렇게 해서 기업이 성장하고 경제가 성장하면 일자리가 늘어난다고 한다. 문재인 본인이 부정한 낙수 효과를 기대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정부가 2월 국회에서 통과시키겠다는 탄력근로 기간 확대안은 장시간 노동을 제도로 보장하는 것이다. 기존 인력을 더 써먹겠다는 것으로, 일자리 늘리기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문재인의 말과 실천 사이의 이런 모순은 기업 지원에 확고한 우선순위가 있기 때문에 생긴다.


투쟁 기회 허비 말아야 

기업 프렌들리를 한다면서도, 정부는 노동계 지도자들의 양보를 얻어 내고 싶어서 사회적 대화를 하자고 한다.

현재의 사회적 타협은 투자 효율을 높일 노동 유연성(노동조건 문제에서 사용자의 자율성)을 늘리는 대신 사후적 보완(체제 유지 관점에서 제공되는 안전망)을 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 불공정 교환에 정당성의 분칠을 하고 싶어 한다.

마치 1998년 1월 민주노총 배석범 지도부가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제·파견근로제 도입을 합의한 것에 조합원 압도 다수가 반대했는데도, 이 악법들이 정당하게 도입된 법이라는 외피를 썼듯이 말이다.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위원장 문성현은 민주노총이 투쟁과 교섭을 병행할 생각이라면 차라리 경사노위에 불참하라고 했다. 이것은 민주노총 내 대화파를 압박하는 발언이자 사용자들에게 안심하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한편, 청와대는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을 비밀리에 만나며 경사노위 참가를 유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부 임기 첫해부터 사회적 대화를 하고 싶어 한 노동계 대화파에게 1년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서는 그 1년 동안 최저임금 도로 삭감 등 온갖 개악을 저지른 쪽은 문재인 본인이다. 바로 이 경험이 지난해 10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경사노위 참가가 지지받지 못한 이유다.

노동 개악은 우파 정당들도 바란다. 노동운동이 우파를 의식해 문재인 비판과 대정부 투쟁을 회피할수록 우파는 오히려 더 신이 나는 이유다.

지금도 문재인은 2월 국회에서 탄력근로제 확대안을 통과시키겠다고 한다. 투쟁 기회를 허비할수록 ‘경사노위에 안 들어오면 더 나쁜 개악이 될 것’이라는 문성현식 협박은 점점 더 진실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민주노총이 [경사노위에 안 들어가서] 국민 밉상이 됐다”는 〈한겨레〉의 헛소리를 인정한 것은 불길하다.

“국민 밉상”이 1년에 10만 명 넘게 조합원을 늘렸을까? 십중팔구, 같은 기간 〈한겨레〉 구독자 수는 줄었을 텐데 말이다. 반토막 난 문재인 지지율은 또 어떤가?

현 상황은 불리할 게 없다. 그러나 상황이 언제나 같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대화파 지도자들이 부질없는 소망으로 시간만 까먹는 것이 진짜 문제다. 청와대를 만날 게 아니라 투쟁의 조직에 매진해야 한다. 이 위선적인 시장주의 정부와 맞서는 걸 망설일 이유가 없다. 노동자대회는 본격적 투쟁 자체가 되기보다는 본격적 투쟁의 신호탄이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