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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간선거 이후 동아시아와 한반도

이 글은 필자가 2018년 11월에 열린 한 토론회에서 발표한 글이다. 

들어가며

미국 중간선거가 끝난 후에 나온 11월 9일자 〈한겨레〉 헤드라인 기사 제목은 “중간고사 끝낸 트럼프 ‘북미대화 시간표’ 꺼내”였다. 제목만 보면, 트럼프가 교착 상태에 빠진 북·미 대화를 다시 진전시켜 줄 카드나 계획을 꺼낸 것처럼 보인다. 이 기사는 서두에 중간선거 직후 열린 트럼프의 기자회견 발언을 소개하며 이렇게 썼다. “[트럼프가] 중간선거가 끝나자마자, 북–미 대화 동력을 유지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다진 셈이다.”

그러나 기사를 끝까지 읽어 보면, 제목과는 영 딴판인 진술들이 있다. “조속한 제재 완화를 요구하는 북한과 ‘선 비핵화, 후 제재 해제’를 고수하는 미국의 간극이 [크다.] … 두 나라가 접점을 찾지 못하면 회담이 계속 미뤄지면서 동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북–미 고위급 회담이 늦어지면서, 남북 합의사항 이행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 남북관계가 앞서 나가면 안 된다는 미국의 입장을 고려하면, 남북 합의 이행이 쉽지 않아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니까, 북·미 협상 상황을 낙관하는 일면적 제목을 뽑고는, 관련한 걱정거리들은 기사 뒷부분에 슬쩍 넣은 것이다. 요즘 〈한겨레〉〈경향신문〉 등 친정부 중도진보계 언론이 한반도 평화 문제를 다루는 주된 방식이다. 요즘 이런 일면적 보도가 너무 많다.

부풀리기식이거나 일면적인 보도가 중도계 언론에서 많이 보이는 까닭은, 사실은 전망에 대한 낙관이 강하지 않아서일 수 있다. 내심 불안해서 소망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확신 결여는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때와는 사뭇 다른 점이다.

그런 불안감의 실체는 바로 한반도 바깥의 국제 정세에 있다. 문재인 정부와 중도진보계 언론 모두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성공하려면 이른바 “국제 사회”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평화 프로세스를 보장해 줄 국제 사회 주요 강대국들의 사이가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다. 이 갈등의 파고가 언제 지금의 협상 테이블을 덮칠지 모르기에 불안한 것이다.

우리는 중도진보계 언론의 일면적 보도(나 심지어는 ‘가짜 뉴스’) 이면의 맥락을 이해하고, 그것이 자아내는 환상과 대결해야 한다.


계속되는 무역전쟁

중간선거 전후로 트럼프 정부가 한 것 중에 주목할 일이 두 개가 있다.

첫째, 중간선거가 끝나자 미국 상무부는 중국산 알루미늄 판재에 반덤핑·반보조금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중간선거 전에 트럼프가 무역 문제에서 중국과의 합의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그것이 중간선거용 제스처에 불과했음이 금세 드러난 셈이다.

앞서 10월 말에 상무부는 미국 기업들이 중국 국유기업인 푸젠진화반도체에 소프트웨어와 기술 등의 수출을 제한하는 조처를 내렸다. 그러면서 해당 반도체기업의 활동이 미국의 국가 안보에 반하는 심대한 위협이라고 했다. 미국 국가 안보 때문에 중국 기업을 제재한다는 얘기다. 이 사례는 무역전쟁의 진정한 성격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둘째, 중간선거 날 북·미 고위급회담이 개최 직전 취소됐다. 미국과 북한 양측 모두 일정이 분주해서 일단 회담을 연기하기로 했다는 설명이 나왔다. 그러나 그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추후에 언제 열린다는 말 없이 회담이 취소되면서, 미국 주류 언론들은 일제히 북·미 대화가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고 보도했다. CNN은 “북한이 미국한테 진짜 화났다”고 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간선거 이후에도 무역전쟁은 계속된다. 트럼프는 중간선거 직후 후반기 임기 동안 자신의 주요 정책들을 더욱더 밀어붙이겠다고 못 박았다.

물론 미국은 중국 말고도 일본·유럽연합·한국 같은 전통적 동맹국들도 겨냥해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의 1등 지위에 도전하지 말고 굴복하라는 신호를 내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트럼프 정부의 가장 중요한 타깃은 중국이다. “전략적 경쟁자”로서 중국을 미국 제국주의 패권의 가장 큰 위협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중국에 대한 트럼프 정부의 총체적 인식은 10월 4일 부통령 마이크 펜스가 허드슨연구소에서 한 연설에서 드러났다. 그는 중국이 “[불공정] 관세, 수입 제한, 환율 조작, 기술이전 강제, 지적재산권 절도” 같은 정책들을 동원해 미국의 이익을 훼손하고, 미국의 막대한 무역 적자를 초래하고, ‘중국제조2025’ 같은 계획을 세워 첨단 군사 지식을 포함한 미국의 첨단 기술을 훔쳐 간다고 비난했다. 펜스가 보기로 중국은 국제 질서를 자국에 유리하게 바꾸려고 시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훔쳐 간 기술을 이용해, 중국은 보습(쟁기 같은 농기구에 끼우는 쇳조각)을 대대적으로 칼로 바꾸고 있다.”

펜스의 연설이 보여 주는 바는, 무역전쟁의 목표가 비단 대중국 무역적자를 줄이는 데만 그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 첨단 제조업의 성장을 억제하고 미국의 제조업 경쟁력을 유지하겠다는 의지도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이 미국의 군사 우위를 유지하고, 패권을 지키는 데서도 중요하다고 본다.

요컨대, 트럼프 정부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중국 무릎 꿇리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역전쟁은 제국주의 간 경쟁의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

트럼프 정부의 대중국 무역전쟁에 대해서는 미국 지배자들 사이에서 초당적 지지가 형성돼 가고 있다. (물론 동맹국들과의 무역 마찰 문제 등에서는 견해차가 해소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역전쟁 같은 근린궁핍화(이웃 나라 거지 만들기) 정책이 미국 경제의 위기를 제대로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점이 명백해지면, 미국 지배계급 내 갈등과 혼란이 크게 증폭될 수 있다.)

중간선거가 끝난 후 11월 9일 〈파이낸셜 타임스〉는 사설에서 트럼프가 국내에서 좌절을 많이 겪을수록 보호무역주의와 이란 같은 적과의 대결을 강화하는 것을 배출구로 삼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중국과 타협하기보다 대중국 관세를 올릴 공산이 크다고도 진단했다. 관세를 높이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기반뿐 아니라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도 인기가 좋다고 했다.

올해 3월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 낸시 펠로시는 무역전쟁과 관련해, “미국의 노동자와 상품을 수호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하라”고 트럼프 정부에 주문했다. 11월 8일 〈로이터 통신〉은 중간선거 결과로 하원에서 다수당이 된 민주당이 대중국 무역 전쟁을 지지할 뿐 아니라 트럼프를 부추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민주당 정치인들도 중국한테 본때를 보여 줘야 한다고 벼르는 점에서는 트럼프 못지 않다.

트럼프는 2670억 달러어치 추가 대중국 관세를 예고했고, 기존 2000억 달러에 대한 관세율도 내년 초에 10퍼센트에서 25퍼센트로 높일 예정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환율조작국 지정 등 더 많은 수단을 동원할 여지가 있다.


더 큰 충돌의 가능성

그러나 중국은 결코 호락호락한 도전자가 아니다. 미국의 공세와 중국의 대응이 맞물리면서, 전보다 훨씬 더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우선, 중국은 미국의 동맹 체제 바깥에서 성장한 도전자다. 이 점에서 중국은 일본과 유럽연합 등 수십 년간 미국의 동맹 체제에 종속돼 있는 다른 서방 강대국들과는 처지가 다르다. 유럽 강대국들도 경제적·지정학적 문제로 미국과 갈등을 빚곤 하지만, 미국의 동맹 체제에서 벗어나 미국에 정면 도전하기는 앞으로도 쉽지 않다. 그러나 중국은 그런 동맹 구조에 의존하지 않고 성장했다. 그래서 중국의 성장 자체가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와 이러저러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다.

중국공산당 정권은 민족해방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한족 민족주의 정권이다. 국가주석 시진핑은 “중화민족 대부흥”, “중국몽” 등을 표방하며 내부적으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해 왔다. 대내외 위기에 대응하고 내부 불만을 단속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시진핑과 중국 고위 관료들은 미국 같은 “외세”의 압력에 굴복하는 모습을 대중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자칫 공식 이데올로기와 통치 정당성이 훼손될 수 있다.

무엇보다, 중국 지배자들은 지난 30년간 고속 성장을 통해 쌓아 온 중국 국가의 위상과 이익을 지키려고 사력을 다할 것이다. 최근 시진핑이 미국이 기술 장벽을 쌓는 것에 대응해 국유기업들이 첨단 기술을 자체적으로 발전시키라고 독려하며 마오쩌둥 시절의 “자력갱생” 구호를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시사적이다.

트럼프 정부는 군사력에서도 도전자들을 압도하려고 한다. 30년간 유지돼 온 러시아와의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서 탈퇴할 계획을 세웠다. 이 조약에서 탈퇴하면 미국은 자유롭게 중거리 지상발사 탄도미사일·순항미사일의 생산·실험·배치에 돌입할 수 있다.

미국의 중거리핵전력조약 탈퇴를 주도하는 것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존 볼턴이다. 그는 오래 전부터 이 조약에서 탈퇴하자고 주장했다. 이것도 주로 중국 등을 염두에 둔 조처이다.

볼턴은 이미 2011년 〈월스트리트 저널〉에 칼럼을 써서 중거리핵전력조약 탈퇴를 주장했다. 냉전 해체 이후 전략적 환경이 바뀌었다는 게 핵심 이유였다. “[조약 당사국이 아닌] 중국은 순항미사일과 탄도미사일 전력을 급격히 성장시키고 있다. 특히 중국이 남중국해 같은 곳에서 점차 적대적이고 정치적으로 단호하게 나옴에 따라, 이 무기들은 대만뿐 아니라 [역내] 미군의 기지와 해상 전력도 크게 위협한다.” 볼턴은 여기에 북한과 이란 같은 “불량국가”의 미사일 ‘위협’도 추가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중거리핵전력조약 탈퇴 후 “일본이나 필리핀 등 중국 인근에 [지상 발사] 순항 미사일을 배치하는 방안” 등도 거론되고 있다. 미국의 신형 핵무기가 서태평양 일대에 전진 배치되고, 평택 미군기지에도 베이징과 상하이 등지를 겨냥한 중거리 핵미사일이 배치될 수 있다는 뜻이다. 트럼프는 아시아·태평양에서 핵군비 경쟁의 불씨를 댕길 위험한 시도를 하는 중이다.

무역전쟁을 비롯한 제국주의 경쟁의 악화는 미래에 벌어질 더 큰 충돌에 대한 우려를 키우고 있다. 저명한 자본주의 변호론자 프랜시스 후쿠야마조차 최근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미·중 전쟁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전쟁이 일어날 여러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 있다. 그 시작이 한 국가의 다른 국가에 대한 고의적 공격은 아닐 듯하다. 대만이나 북한을 둘러싼 지역 분쟁, 또는 남중국해에서의 대립이 확대되면서 시작될 가능성이 더 크다.”

이런 사태 전개 때문에 양안 문제(중국-대만 간 분쟁) 같은 해묵은 갈등이 폭발할 개연성도 높아진다. 최근 대만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날 선 공방을 주고받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고, ‘하나의 중국’에 관한 미중 합의가 흔들리고 있다. 그러자 중국 정부는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대만의 현상 변경 시도를 막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이에 자극받은 대만이 첨단 무기 수입에 힘을 쏟고 있다.

민진당의 재집권과 트럼프 정부의 등장 등으로 대만 내에서 대만 독립 선언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는 듯하다. 10월 하순에 대만 독립 선언을 국민투표로 결정하자고 요구하는 시위에 8만 명이 참가하는 일이 있었다.

미·중 갈등이 점증하는 가운데, 우발적 충돌이 그 갈등의 전개 속도를 급격히 높일 수 있다. 9월 30일 남중국해에서 중국 군함과 미국 군함이 41미터까지 접근한 사건은 그 위험성을 보여 줬다.

트럼프가 처음 등장했을 때, 우리는 세계가 (초)불확실성의 시대로 접어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불확실성이 자아내는 위험이 서서히 발톱을 드러내고 있다.


북·미 협상의 불확실한 전망

세계 제국주의 체제의 상황은 한반도의 중장기적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북·미 협상은 이런 상황과 맞물려 있다. 우여곡절 끝에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려 트럼프와 김정은이 다시 손을 잡더라도, 그 전망이 근본에서 밝아진다고 보기 어려운 까닭이다.

트럼프 정부는 지난해 내내 한반도에서 긴장을 높이다가, 올해 들어 방향을 바꿔 북한과 대화에 들어갔다. 미국의 유명 언론인 밥 우드워드가 쓴 책 《공포》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초 트럼프는 주한미군 가족들을 한국에서 철수시키겠다는 내용의 트윗을 작성하려고 했다. 그래서 트럼프의 측근들이 그를 심각하게 말려야 했다. 주한미군 가족 철수령은 북한과 전쟁을 시작한다는 신호로 여겨질 게 뻔했다. 트럼프가 김정은과 정상회담을 하겠다고 밝힌 것은 그로부터 불과 3개월 후다. 그만큼 극적인 변화였다.

그러나 냉전 해체 이래, 한반도에서 긴장 국면이 급격히 해빙 국면으로 바뀐 일은 여러 번 있었다.(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30년 동안 미국은 북한 ‘위협’을 부풀려 동아시아에서 자신의 전략을 관철시키는 수단으로 삼아 왔지만, 상황을 관리하고 시간을 벌 필요가 있으면 북한과의 대화에 나서곤 했다.

트럼프는 올해 정상회담까지 열어 김정은을 만났다. 그리고 2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까지 공언했다. 그러다 보니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국내 진보 일각에서는 민주당보다 트럼프의 공화당이 승리하는 게 한반도 평화에 이롭다는 얘기가 나왔다. 트럼프가 미국 국내외에서 저지르는 온갖 악행에는 눈 감는 이기주의적 발상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렇게 위선적이다. 그런데 한반도 상황을 보더라도, 중간선거 전후로 벌어진 여러 일들을 보면, 그런 기대가 과연 타당한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연내에 열릴 것 같던 2차 북·미 정상회담은 내년 초로 미뤄졌다. 6월 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비핵화와 미국의 “상응 조치”를 둘러싼 북·미 협상이 큰 진전이 없다. 6월 싱가포르 합의 이행의 순서와 내용에 대한 해석 등에서 양측에 첨예한 견해차가 있다. 예컨대, 미국은 북한에게 핵물질·무기·운반수단 목록을 신고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은 신뢰 회복 전에는 못 준다고 거절했다. 현 상태로는 미국에게 북한 내 폭격 지점만 알려 주는 꼴임을 알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0~1991년 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가 미국한테 그렇게 당했다. 북한은 그 일을 잊지 않았다.

그 와중에 트럼프 정부는 대북 제재는 지속된다고 강조했다. 9~10월에 국무부가 나서서, 한국 정부와 기업들한테 자신들이 그은 선을 넘지 말고 대북 제재를 지키라고 경고했다. 미국과 한국은 대북 정책 조율을 위한 공동의 실무 그룹을 설치하기로 했다. 미국이 이를 통해 한국 정부의 남북 관계 속도를 제어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북한이 불만을 터뜨렸다. 이번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나섰다. “적대 세력들이 악랄한 제재 책동에만 광분한다.” 북한 외무성은 미국의 협상 태도에 변화가 없다면, 핵무력·경제 병진노선을 부활시켜 핵무기 개발을 재개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김 위원장은 낙후한 경제 재건에 필요한 제재 완화(더 나아가 해제)를 절실히 원한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의 태도가 바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중간선거가 끝난 직후 트럼프는 북·미 관계에서 “서두를 것 없다”고 강조했다. 그 직후에 미국 재무부는 북한의 해외 자산 6300만 달러를 추가로 동결했다. 미국이 올해 들어서만 대북 독자 제재 조처를 취한 게 11건에 이른다. 북·미 고위급회담이 갑자기 연기된 배경일 것이다.

미국 민주당을 비롯한 미국 주류 지배자 다수가 여전히 기존의 대북 정책인 “전략적 인내”를 선호하는 것도 북·미 대화의 또 다른 변수다.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미국의 자유주의 언론들이 앞장서서 북한의 미사일 활동 은폐 의혹을 터무니없이 왜곡·과장해 보도하는 것은 미국 주류 다수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북·미 협상이 지지부진해지고 미국 민주당 등이 협상을 강하게 공격하자, 한국의 친여권 전문가와 언론 쪽에서는 “북한[이] 미국의 유연성을 끌어내기 위해 좀더 진전된 추가 제안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는, 즉 북한이 먼저 양보해 트럼프의 미국 내 입지를 넓혀 줘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 제국주의의 대북 압박에 사실상 편승하는 주장인 데다가, 북한 처지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 협상은 결코 대등한 당사자들의 대화가 아니다. 북한은 세계 최강 미국을 상대로 너무 쉽사리 양보했다가 자칫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처지이니 말이다.

물론 트럼프가 당장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 다시 “화염과 분노” 시절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양측은 정상회담 성사의 조건을 두고 줄다리기에 들어가 있다. 그 과정에서 다시 한 번 잠정적 합의가 도출될 수 있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 협상의 진전을 가로막는 변수들이 협상장 안팎에 너무 많다. 당장 내년 2~3월 키리졸브 한미합동군사훈련 재개 여부가 걸림돌로 부상할 것 같다.

9월의 3차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지 2달도 안 돼, 그 효과가 반감돼 보인다. 그리고 앞으로도 북·미 협상은 계속 엎치락뒤치락할 공산이 크다.


문재인 정부의 강점은 다시 약점이 될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올해 지지층 결집을 유지한 비결은 남북 관계의 해빙에 있었다. 지난해 문재인 정부의 아킬레스건이 되는 듯했던 대외 정책과 남북 관계가 지금은 이 정부의 강점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국제 정세의 불안정은 이 강점을 언제든 다시 문재인 정부의 약점으로 바꿔 버릴 수 있다.

9월 문재인 정부는 미국과의 마찰을 감수하면서 남북 군사합의를 맺었고, 남북 상호 간 적대 행위 종식을 선언했다. 〈한겨레〉 등은 이 합의와 평양공동선언을 묶어서 남북 간의 “사실상 종전선언”이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남북 군사합의와 평양공동선언의 주요 내용은 과거의 남북 주요 합의에도 포함돼 있던 것들이다. 예컨대 남북군사공동위원회 설치는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에, 서해 북방한계선(NLL) 일대의 평화수역화는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의 합의 사항에 있었다. 즉, 평양공동선언 등이 남북 종전선언이라면, 우리는 이미 두 번 세 번의 남북 종전선언을 경험한 셈이다. 그런데 그 ‘종전선언’들은 다 파탄 났다. 따라서 그런 합의들이 왜 매번 휴지 조각이 됐는지를 물어야 한다.

남북 군사합의에 따라 서해상 훈련을 중단하고 휴전선에서 GP를 철수한다고 해도, 남북 간 재래식 충돌 가능성이 영구히 봉쇄되는 건 아니다. 남북 관계의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능히 알 수 있다. 남북 간 충돌을 방지하려는 시도의 성패도 결국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간 긴장과 적대가 어찌되느냐에 달렸다.

문재인 정부는 북·미 협상의 중재자 구실을 자임해 왔다. 그러나 중재의 성공 여부는 정부가 뛰어난 중재술을 발휘하느냐로 결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문재인 정부는 대북한·대중국 정책에서 보조를 맞추라는 미국의 지속적인 압력에 직면해 있다.

북·미 회담이 다소 불확실해지면서 김정은의 연내 서울 답방은 어려워지고 있다. 청와대가 김정은의 서울 방문에 관한 얘기를 계속 흘리고 있지만 말이다.

북·미 협상 상황이 여의치 않자, 11월 6일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정의용은 종전선언도 정상이 아닌 실무급 선언으로 격을 낮출 수 있다고 했다. 사실, 평화협정 체결에서 종전선언 채택으로 물러선 것 자체가 커다란 후퇴였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기에 평화협정은 항구적 평화를 보장해 주지 못하는 수단이지만, 평화협정 자체는 한반도 평화 실현에 관한 나름의 완결적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이다.(또는 적어도 ‘그래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한다.) 그러나 종전선언은 국제법상의 지위마저 분명하지 않아 언제든 무효화될 수 있는 “정치적 상징”일 뿐이다. 그런데 이제 이 상징적 조처마저 ‘정상 간’ 종전선언에서 ‘실무급’ 종전선언으로 또 후퇴하는 셈이다. 그마저도 연내 합의는 불가능해 보인다. 이런 일은 제국주의와의 타협으로 평화를 보장받으려는 구상이 근본에서 불안하고 지속 불가능한 시도임을 보여 준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중재가 갖는 한계도 확인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와 달리 친미 쪽으로 확 내달리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많은 문제에서 미국과의 타협을 모색한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국방장관 정경두는 현재 임시 배치된 사드를 정식 배치하겠다고 못 박았다. 문재인 정부는 미국 미사일방어체계(MD) 편입 논란 때문에 한국이 오랫동안 주저해 온 SM-3 미사일 도입도 이미 진행하고 있다. 이것은 지난해 정부가 중국한테 한 ‘3불’[1] 약속을 스스로 깨는 것이고, 중국을 엄청 자극해 사드 갈등이 재연될 수도 있는 일이다.

또, 12월 유엔 총회에서 북한인권결의안이 새로 채택될 예정이다. 북한 인권 문제는 역대 미국 정부와 현재의 트럼프 정부가 북한을 압박하는 소재의 하나다. 문재인 정부는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작성에 동참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북 인권 공세에 협력하겠다는 뜻이다.

이런 점들은 문재인 정부가 노동 분야에서는 문제가 많으나, 평화 문제에서는 협력할 바가 많다는 노동자 운동 일각의 견해가 옳지 않음을 보여 준다. 문재인 정부는 평화 문제에서도 전혀 신뢰할 수 없는 대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문재인 정부를 압박해 견인하는 게 가능할 것이라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어불성설이다. 자본주의·제국주의 세계 체제에 얽히고설킨 한국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넘어 문재인 정부가 그렇게 견인되지 않을 것이다.

과거 경험을 돌아보면, 이런 견해는 투쟁이 어느 수준 이상으로 발전하는 것을 제약하거나 외려 정부의 협조 압력에 노동자 운동이 견인되는 결과를 낳을 공산이 크다.


급작스런 상황 변화에도 대비해야 한다

트럼프의 선거 승리를 바라거나 문재인 정부의 중재에 기대를 거는 것은 모두 국가 간 협상으로 항구적 평화가 가능하리라는 기대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항구적 평화는 없다. 자본주의의 장기화된 구조적 위기 속에 강대국 간 전쟁 가능성을 배제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오늘날에는, 더더욱 이 문구를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 오로지 노동계급 자신의 투쟁만이 항구적 평화를 실현시킬 것이다.

앞으로도 올해 같은 분위기가 지속되리란 보장은 없다. 불확실성의 시대답게 상황이 급격히 달라질 수 있고, 그것에 따라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 자신의 방향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그럴 때 신속하게 행동할 만반의 태세가 갖춰져 있어야 한다.



[1] “사드 추가 배치 없고, 한·미·일 군사동맹 없고, 한국이 미국 MD에 참여하는 일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