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는 최일붕 노동자연대 운영위원이 각각 2017년 5월 12일, 2018년 7월 19일, 2018년 11월 2일 노동자연대 회원 회의나 맑시즘 포럼에서 발표한 글이다

목차

  1. 문재인 정부 초기, 사회주의자 앞에 놓인 전망 [바로가기]
  2. 진정한 진보를 위한 투쟁 [바로가기]
  3. 2019년 세계 상황과 한국 노동운동의 전망 [바로가기]


Ⅰ. 문재인 정부 초기, 사회주의자 앞에 놓인 전망 [맨 위로]

문재인 등장의 경제 환경은 나쁘다

문재인 정부 등장의 맥락을 노무현 정부 등장의 맥락과 비교해 보면 몇 가지 의미심장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드러난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을 때는 한국 경제가 중국의 경제 성장 덕분에 1997~98년의 소위 ‘IMF 공황’에서 벗어나 회복되고 있을 때였다. 비록 회복은 제한적이고 불안정해, 2007년부터 위기에 직면하고, 2008년에는 공황에 빠지게 됐지만 말이다.(‘위기’와 ‘공황’의 구분은 고故 김수행 교수에 따랐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세계경제가 장기 침체 국면에 들어선 가운데 등장했다. 물론 지난달 1일 정부는 반도체와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호황으로 3월 수출이 13.7퍼센트 증가했고 “4월에도 회복 기조가 유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최근 몇 달 새 트럼프의 경기 부양 약속에 힘입어 미국의 주식시장이 상승하고 소비자신뢰지수(경기에 대한 소비자 견해를 보여 주는 지수)도 증가하고 있는 것에 대다수 자본가들이 재빠르게 반응한 결과인 듯하다.

그러나 미국의 실물경제는 전혀 다른 그림을 제시하고 있다. 1/4분기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은 겨우 0.5퍼센트 증가에 그쳐 지난 4년간의 추세를 답습했다.1 또한 제조업 활동(특히 자동차 판매)이 저하했고, 소매 판매도 (가계부채 부담 때문에) 감소했고, 소비자물가지수도 하락했다. 고용 관계 지수도 “실망스럽다.”2

금융시장은 실물경제를 한동안 반영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주가수익률3이 높아도 기대에 따른 것일 뿐이다. 그런데 금융시장의 인수·합병 활동도 감소한 걸 보면, 경제에 대한 불확실성이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미국 재무부 발행 10년 만기 국채의 수익률(금리)도 사상 최저 수준인 2퍼센트대에 불과하다. 또한 IMF는 만일 트럼프 정부의 세금 감면이 경기는 부양하지 못하고 재정 적자와 차입 관련 재무비용이 증가한다면, 미국 기업이 보유한 총자산의 22퍼센트에 해당하는 거의 4조 달러의 자산이 부실해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미국 정부가 설사 내수 증대를 위한 조처들을 취한다 한들 빈부격차가 하도 심해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토마 피케티에 따르면, 미국민 하위 절반의 세전(稅前) 국민소득 비중은 1980년 20퍼센트에서 오늘날 12퍼센트로 하락했다. 반면 상위 1퍼센트의 비중은 12퍼센트에서 20퍼센트로 증가했다. 실질소득으로 말하면, 하위 절반 국민의 경우는 조금치도 늘지 않은 채 저조했고, 상위 1퍼센트의 경우는 갑절 이상(205퍼센트)이 늘었다. 최상위 0.1퍼센트 국민의 경우는 6백36퍼센트가 늘었다.4

세계 자본주의는 구조적 위기를 겪고 있으므로 원만한 해결책은 없다

세계 자본주의는 루카치의 제자인 이쉬트반 메사로쉬가 말한 ‘구조적 위기’를 겪고 있다.5 ‘구조적’이라 함은 경제의 세계화와 일국적(국민) 국가 사이의 기존 모순 심화가 위기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현재 구조적 위기의 증상을 일부만 열거하면 이렇다: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 방향 정책들이 탄력을 받지 못한 채 모순 속에 갇혀 있음; 브렉시트로 대표되는 유럽연합 와해 전망; 우익 포퓰리스트 정당들의 부상; 제국주의 열강의 군국주의 부상; 그리고 물론 세계경제의 계속되는 침체 전망.

매우 잘 알려진 마르크스주의자와 급진주의자의 일부가 현재의 경제 위기를 구조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케인스적 해결책을 제안한다. 마르크스주의자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규칙들 내에서” “세계적 영향력을 가지는 새로운 뉴딜,” 말하자면 좀 더 “시혜적인 ‘뉴딜’ 제국주의”를 유일한 대안으로 거론한다. 비록 “일시적”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말이다.6 역시 마르크스주의자들인 뒤메닐과 레비도 케인스주의를 정치적 대안으로 여긴다.7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급진주의자 나오미 클라인도 케인스가 “더욱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공공의 부를 공동 관리하려” 노력해 그의 사후인 1950년대에 선진국의 케인스 학파는 “눈부신 성공담을 뽐냈다”며 거듭 케인스를 우호적으로 거론한다.8

그러나 1930년대 초에 뉴딜과 케인스주의는 효과가 없었다. 사실 1930년대 내내 서구의 지배계급들은 경제의 회복을 위한 핵심 조건, 즉 경제 위기를 통해 비효율적인 자본들이 파괴돼 시스템이 정화되는 것을 성취하지 못했다. 1937~38년에 다시금 심각한 공황에 빠진 사실이 이를 잘 예증한다. 마침내 군국화가 경제의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점이 드러났다. 소련과 일본과 나치 독일이 서방보다 먼저 경제가 활성화되는 것을 통해서 드러난 것이다. 세계경제가 이윤율을 회복하고 경제가 되살아나게 된 건 제2차세계대전으로 무기 생산이 급등해,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증가율이 완만해지면서였다. 제2차세계대전 동안 이윤율은 급등했고, 이 높은 이윤율이 전후 장기 호황의 선행 조건 구실을 했다.

그러므로 메사로쉬 말대로 “구조적 위기에는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고 구조적 변화는 “가장 격렬하거나 폭력적인 경련도 배제될 수 없다.”9

전후 장기 호황이 붕괴하던 1970년대 초에 미국 등 서구 정부들은 케인스적 경기부양책을 사용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그래서 1976년, 맨 먼저 영국 노동당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채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레이건과 대처 정부에 의해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됐다. 이를 두고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가 계급의 전면적인 반격”이자 “계급 권력을 되찾기 위한 정치적 프로젝트”라고 했다.10 한국에서 이 프로젝트 추진은 김대중과 노무현 같은 자유주의적 중도파 정부가 시동을 걸고 이명박근혜 같은 강성 우파 정부가 가속 페달을 밟았다.

하지만 세계 차원에서든 한국 차원에서든 변화가 충분히 ‘폭력적’이지 못했던 탓인지 구조적 위기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했다.

한반도 주변 정세는 막간의 해빙이 있더라도 곧 긴장될 것이다

글로벌 경제 침체가 지정학적 갈등을 더욱 첨예하게 만들어, 동아시아 정세는 더욱 불안정해질 것이다. 특히, 남한에서 증대되는 미국의 군국주의는 문재인 정부의 최대 시험이 될 것이다. 낙방할 게 뻔하지만 말이다.

미국의 남한 내 군국주의는 또다시 한반도 전쟁 위기설을 만들어 냈을 정도로 급등하고 있다. 심지어 호사가들이 제3차세계대전 가능성 운운할 만큼 두드러지는 듯하다. 물론 이는 당장은 과장이지만, 한반도를 놓고 핵무기 경쟁이 점증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각축전이 미국 대(vs) 중·러 ‘신냉전’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미국의 권력층 내에서는 중국이 주적인지 러시아가 주적인지를 놓고 견해가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에 “우호적인” 듯한 트럼프가 끼어들어 러시아 주적론자들은 트럼프를 맹비난하고 있다.

미국의 군국주의는 미국 국내 정치의 극단적 분열 때문에 더욱 혼란스럽다. 옛 소련 붕괴 직후 “역사의 종말”(즉,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승리)을 선언하며 도취감을 만끽했던 그 유명한 우파 정치학자이자 헤겔주의자 프랜시스 후쿠야먀는 오늘날의 미국을 “실패한 국가”라고 부른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등을 가리켜 호칭했던 용어로 말이다. 미국의 정치 체제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않고,” “잘 조직된 엘리트 계층들이 자기네 이익을 지키려고 지난 수십 년 새 비토 정치(vetocracy: 경쟁 정파의 정책과 주장을 모조리 거부하는 극단적인 파당 정치를 가리키는 후쿠야마 자신의 신조어)를 이용하는 바람에 퇴락을 겪었기 때문이다.” 후쿠야마는 심지어 “우리가 한 세대 전의 공산주의 붕괴와 비교될지도 모를 정치적 붕괴를 겪고 있을 수도 있다”고까지 말했다.11

문재인의 개혁은 더 첨예한 정치적 양극화에 직면할 것이다

경제와 외교의 난관에 직면해 결국 문재인의 어정쩡한 중도 개혁은 좌우의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다.

결국 그는 처지가 어려워지면 연립정부를 제안할 것 같다. 아마 내년 지방선거 이후 개헌 시도와 맞물릴 것 같고, 국민의당이 우선적인 제안 대상일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저항이 강력하면 심상정의 정의당에도 제안할 수 있다. 비록 제안의 우선순위에서 국민의당에 밀리겠지만 말이다. 만약 뒤늦게라도 정의당에 연립 제의가 공개적으로 행해진다면 심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정의당은 내홍을 겪을 것이다. 받아들이면 당내 좌파가 반발하고, 안 받아들이면 참여계 등 당내 우파가 반발할 것이다.

우리는 정의당의 연립정부 참여에 매우 강력하게 반대해야 한다. 그 자체가 배신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심상정을 지지한 사람들은 홍준표의 급부상과 사표 논리에 의해 압박 받으면서도 대부분 멀리 보아 진보 정당이라 해서 정의당을 지지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양당 정치 바깥에서 도전이 들어올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양극화로 사면초가 신세가 될 때, 그때는 한국의 공식 정치도 유럽이나 미국처럼 기성 양당 체제의 와해로까지 나아갈까? 미국의 트럼프는 기존 양당제 바깥의 아웃사이더를 대표한다. 영국에서는 노동당 좌파 지도자 제러미 코빈이 기존 양당 구도의 아웃사이더여서, 노동당 주류인 당내 우파의 견제를 심각하게 받고 있다.(우익 포퓰리스트 정당 영국독립당이 기존 양당제를 위협했지만, 얼마 전 지방선거에서 크게 패배해 보수당이 우파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프랑스에서는 나치인 마린 르펜이 급부상했지만, 좌파적 개혁주의자 장뤽 멜랑숑도 부상했음을(아깝게 1차투표에서 탈락했어도) 잊지 말아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에 출마했을 때 한국경제신문사는 《또라이 트럼프》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그런가 하면 강준만은 《도널드 트럼프: 정치의 죽음》이라는 책을 출판했다.12 한편, 독일의 〈디 차이트〉 2016년 10월 16일치는 이런 제목의 1면 톱기사를 실었다고 한다. “미국인들이 미쳤나?”

그렇지 않다. 미국인들은 미치지 않았고, 트럼프도 “또라이”가 아니고, 트럼프의 부상(浮上)이 “정치의 죽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빈부격차가 격심하고 소외가 심화돼, 대중에게 절망감과 좌절감, 분노만을 안겨 주는 사회에서는 누군가가 대중의 그 심정을 대변한다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애먼 대상에게로 분노와 좌절을 돌릴 수 있다. 특히, 이주자나 성소수자, 소수인종 등에게로 말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착실하게 자리 잡은 이제 한국에서도 국가 기구의 통제에서 벗어난 극우 정당이 성장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더구나 “헬조선”이라는 말이 폭넓은 공감을 얻는 나라에서 왜 그럴 수 없겠는가?

물론 광범한 대중은 박근혜를 쫓아낸 성공적인 대중 투쟁을 통해 자신의 잠재력과 자신감을 느꼈음직하다. 마르크스주의자인 우리도 정말 “사이다 같은” 사건이었다. 그런데 박근혜 퇴진 운동을 통해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다시금 착실하게 자리 잡았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20세기 역사를 통틀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핵심 행위주체는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이들에 기반을 둔 개혁주의 정당이었다. 박근혜 퇴진 운동에서도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 특히, 철도 파업과 전국노동자대회, 실질적이지는 않았지만 정치적 상징 구실은 한 11월 30일 민주노총 하루 파업 등을 통해 노동자들은 박근혜를 탄핵시키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그러나 12월 중순부터는 상층의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주도성을 발휘한 기간이었다. 그리고 이 힘을 공식 정치에서 대표할 수 있었던 건 문재인의 민주당과 심상정의 정의당이었다.

그러나 20세기의 역사는 또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착실하게 자리 잡는 순간부터 그 한계성과 본질이 드러나고, 심지어 매우 빠르게 위기에 직면하기도 한다는 점도 보여 준다. 1929년 대공황 직후 나치당과 공산당 사이에 양극화된 바이마르공화국의 운명이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 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현재 서구 나라들에서 부상하고 있는 파시스트들의 존재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위기를 반영한다. 경제와 사회의 위기, 지정학적 위기, 기성 정치의 위기 등으로 점철된 한국 상황도 비슷하다. 다른 나라에서처럼 이 나라에서도 자본주의의 위기 수준과 노동계급의 정치 의식 사이에 격차가 있다.

개혁주의가 성장하겠지만, 동시에 그 “지도력의 위기”라는 문제가 있다

이 격차를 메우고자 각종 개혁주의 세력이 달려들고 있다. 이 격차를 다양한 개혁주의 세력이 메울 것이다.

그러나 그러자마자 그 지도력의 한계가 속속들이 드러난다. 가장 최근 사례는 시리자이다. 하지만 정부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다양한 기층 투쟁에서도 트로츠키가 1930년대에 말한 노동계급 “지도력의 위기”는 거듭거듭 입증되고 있다. 물론 트로츠키는 개혁주의 “지도력의 위기”만을 말하지 않고 스탈린주의, POUM 같은 중간주의, 스페인 아나키즘 등 노동자 정당 일반의 “지도력의 위기”에 대해 말했다.

독일 혁명 패배(1923년 10월) 1년 뒤에 출판된 트로츠키의 《10월의 교훈》이 “지도력의 위기” 문제를 가장 잘 다루고 있다. 트로츠키는 독일 혁명 패배의 주된 요인이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들의 준비 부족이라고 지적했다. 패배의 결과는 재앙이었다. 노동자 운동이 붕괴했고, 파시즘 운동이 성장했다. 오늘날 《10월의 교훈》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구조적·유기적이 돼 있고, 지배계급이 노동자 계급을 더욱 쥐어짜려 하고, 핵무기 경쟁이 점차 심해지고, 서구에서 우익 포퓰리즘과 파시즘이 등장하는 한편, 한국에서는 우파 정권이 부패 스캔들로 무너지고,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부상하고, 여성 운동이 부상하고, 노동자들이 저항할 것임이 거의 틀림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만도, 그리고 한국에서만도 도대체 얼마나 많은 크고 작은 투쟁들이 지도력의 불충분함이나 부적절함 때문에 불가피하지 않은 패배를 겪었던가. 또는 더 큰 승리를 얻을 수 있었는데도 알뜰살뜰 조리차한 음식에 만족해야만 했던가.

정부의 공무원노조 불인정 공격에 뒤이은 연금 삭감 공격에 대처하는 노조 지도자들과 정치적 개혁주의자들의 회피 또는 기피는 가장 생생하게 기억나는 사례일 뿐이다. 도대체 그들은 알랭 쥐페 총리의 연금 공격에 저항해 1995년 말 분출한 프랑스 공공부문 노동자 파업은 어떻게 볼까? 내가 기억하기로 그들은 당시에 그것을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옳게 보고 크게 반겼었다. 20년 새 변한 것이다. 자유주의적 개혁 정부 10년과 매우 보수적인 수구 정부 10년을 겪으며 사기가 저하하고 고달픈 것이다.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변혁한다는 희망을 잃고 오직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시스템을 다소 ‘인간적’으로 만든다는 실용주의와 (근시안적 의미에서의) ‘현실주의’에 안주하기로 한 것이다.

문재인 개혁이 시시하고 보잘것없다 해서 반드시 우익만 득 보는 것은 아닐 수 있다

파시스트나 우익 포퓰리스트는 개혁주의(그리고 개혁주의 노선을 걷는 스탈린주의 정치조직들도)의 약점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와 결함을 치고 들어온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한국에서는 파시즘보다는 우익 포퓰리즘이 더 전도 유망하다. 역사적으로 정치 운동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오래지 않아 그의 지지자들에게 실망과 환멸을 안겨 줄 것이다. 그러면 우익은 이 약점을 비집고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이 일면적으로 우려하는 것처럼 우익만 득을 보게 돼 있는 것은 아니다. 좌파도 문재인의 약점을 이용해 반자본주의적 노동자 운동을 키울 수 있다.

위에서 필자는 “경제와 외교의 난관에 직면해 결국 문재인은 자기 좌우의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했다. 이 전망은 확실하다. 하지만 우익만이 그 수혜자가 될 것이라는 건 예정돼 있지 않다. 대중 운동이 강력하면 진보·좌파 진영도 기회를 잡을 수 있다. 2004년 봄 우파의 노무현 탄핵 시도가 대중 항의로 좌절된 덕분에 열린우리당 같은 자유주의 중도정당도 큰 수혜자가 됐지만, 당시 진보정당 민주노동당도 10석이나 얻으며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문재인은 배신할 것이고, 노동자들은 결국 싸울 것이다

세계경제의 계속되는 침체 전망은 문재인이 자기를 지지한 다수 노동자들을 공격하고 배신할 것임을 예고한다. 노무현도 자기 지지자들을 배신했다. 둘 다 자본주의를 확고히 지키면서 자본주의를 더 효율적이고 더 생산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부르주아적 개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물론 집권 초기에는 문재인은 비교적 덜 부담스런 약간의 개혁 조처를 실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개혁 조처들은 불충분한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문재인 시대도 개혁과 억압이 어설프게 혼합된 똑같이 모순된 상황으로 점철될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식으로 추론해 볼 수도 있다.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는 모두 대선 직전에 분출한 대규모 운동의 결과로 등장했다. 하지만 그 운동의 사회적 구성과 성격이 사뭇 다르다. 노무현을 권좌에 올려 놓은 촛불운동은 참가자 대다수가 청년·학생이었고 정치적 경험이 일천했다. 그들은 노무현에 대한 착각과 환상, 기대가 컸고, 대통령 취임 후 두 달도 채 안 된 때 노무현이 이라크 파병 계획을 밝히자 크게 환멸감을 느끼며 급속히 탈정치화했다.

반면 문재인의 부상(浮上)에 결정적으로 일조한 촛불운동은 세대와 계급을 초월해 민중적(또는 심지어 국민적)이었지만, 그 다수는 (미조직·비정규) 노동계급 소속이었다. 그리고 조직 노동계급(특히 철도노조)이 운동의 초기 고양에 상당히 기여했다. 그러므로 노무현 초기보다 문재인 초기에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저항 잠재력에 대해 좀 더 희망적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노동계급과 그 지도자들이 견인차 구실을 했지만 정치적 헤게모니(주도권, 지도력)를 행사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제 이들은 이명박근혜의 강성 우파 정부를 10년 가까이 겪어서인지 문재인에 대한 약간의 환상과 착각, 기대를 갖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다수를 차지한 촛불운동으로 박근혜 정권이 물러났고, 이는 분명한 승리다. 승리를 거둔 노동자들이 자기들 덕분에 권좌에 올라선 대통령이 자기들의 염원을 배신하는 것을 저항하지 않고 보기만 할 리는 만무하다.

물론 그 투쟁이 반드시 이기고야 말 것이라는 예측은 할 수 없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불필요한 온건함 때문에 투쟁은 우여곡절을 겪을 것임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투쟁의 패배를 예측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람시는 이렇게 강조한다. 투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그리고 그 승패가 어떻게 갈릴지를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투쟁이 일어날 것임을 예측하는 건 가능하다. 그리고 예측 가능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저항이 일어날 때 혁명가들이 뒷짐 지지 않고 그 한가운데 있는가 하는 점이다. “실천의 철학[마르크스주의]은 헤게모니의 계기를 요청한다.”13

맺음말 ― 문재인 정부에 대한 환상을 조장해선 안 된다

그람시는 또한 이렇게 지적한다. “헤게모니의 계기”는 단지 경제와 정치의 위기에서뿐 아니라, 또 단지 좁은 의미의 계급투쟁에서뿐 아니라 윤리적 쟁점이나 지적 쟁점을 둘러싼 논쟁으로부터도, 또 정치적 대표성과 정당 문제들과 관련된 논쟁으로부터도 등장한다.14

몇 달 전에만 해도 집권당이던 정당이 순식간에 쪼개진 상황, 군소 정당인 사회민주주의적 정의당의 차기 집권 가능성이 점쳐지는 상황, 성폭력 문제를 주제로 한 토론에도, 문재인의 동성애자 관련 발언에 대한 항의에도 수백 명이 스스로 동원되는 상황은 바로 그람시가 말한 “권위의 위기”, “헤게모니의 위기” 상황이다. 이런 위기는 “유기적 위기”이므로 위로부터의 점진적 개혁으로 해결될 성격의 것이 아니다.15

그러므로 문재인 정부가 잘되길 바란다는 덕담 행렬에 동참해선 안 된다. 물론 “문재인 정부가 실패하길 바란다”고 초좌파적으로 말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잘되는 것이 불가능한 데다, 설사 잘돼 봤자 한국 자본주의가 노동계급을 더 효과적으로, 또 덜 낭비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정부를 격려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물론 2004년 우파가 노무현을 국회에서 탄핵했던 것처럼 문재인을 우파가 공격할 때는 우파의 공격을 반대해야 한다. 당시든 지금이든 문재인은 민중주의자(물론 중도 포퓰리스트)로서 노동자 운동의 일부(물론 온건파 지도자들) 및 시민단체 간부들과 연계가 있다. 그리고 이들은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므로 우파를 반대한다는 것은 노동자 및 피차별자 대중과 관계가 끊어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다만, 사회주의적 좌파로서 우리의 대의명분이 개혁주의자들의 그것과 혼동되지 않도록 원칙에 입각한 비판을 필요한 만큼 해야 할 것이다.

한국과 같은 압축 성장과 고속 산업화가 일어난 사회에서 조직 노동자 운동의 좌파는 노동조건과 생활조건 문제에는 투쟁적인 자세(노동자주의)를 보이는 한편, 국가 권력과 사회 변화, 다른 형태의 천대 등의 문제에는 민중주의자들의 개념들을 (때로 약간 왼쪽으로 비틀어)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노동자주의와 민중주의의 이런 상호작용을 통해서 개혁주의 경향이 성장하기 쉽다.(문재인을 무비판적으로 또는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노동운동가들은 과거 한때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자였으나 지금은 민주당이나 정의당, 심지어 노동당을 지지하며 노조 안팎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는 여성주의 운동 같은 새로운 사회운동이 등장해, 개혁주의 정치와 경쟁과 협력의 관계를 가지면서 성장(때로 급부상)한다.

그래서 필자는 위에서 그람시 헤게모니 이론을 요약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헤게모니의 계기’는 단지 경제와 정치의 위기에서뿐 아니라, 또 단지 좁은 의미의 계급투쟁에서뿐 아니라 윤리적 쟁점이나 지적 쟁점을 둘러싼 논쟁으로부터도, 또 정치적 대표성과 정당 문제들과 관련된 논쟁으로부터도 등장한다.”

새로운 사회운동들은 흔히 노동계급과 계급투쟁, 혁명적 좌파,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람시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노동계급 투쟁의 결정적 중요성은 전제에 해당한다.16 그러나 이는 사회주의적 원칙과 전략의 전제라는 뜻이지, 천대받는 다른 사회집단의 차별 반대 투쟁에도 전제로 제시될 수는 없다.17 입증돼야 할 것을 전제로 제시하는 것은 대화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혁명적 좌파는 노동자 계급과 그 일상적 투쟁에 자리를 잡는 한편, 새로운 사회운동, 특히 여성 운동과 성소수자 운동에 관여해야 한다. 그 리더들이 아무리 배척하려 해도 혁명적 좌파는 여성 운동을 지지하는 다수 여성 노동자에게 책임감을 느끼며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물론 대세 추수주의는 혁명가의 존재를 무(無)로 만드는 것이라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Ⅱ. 진정한 진보를 위한 투쟁 [맨 위로]

 현재의 정치 상황

세계경제는 지금 10년째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회복되는 조짐이 두 차례쯤 있었지만 대단찮고 뒷심이 부족해 회복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습니다.

지난 2년 사이에 선진 산업국의 지배계급은 주요한 정치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가혹한 긴축 정책과 빈부격차 증대에 대한 반감 때문에 서구의 중도 세력은 대중의 신임을 잃었습니다. 한국 정치 얘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중도가 거의 몰락한 대신에 영국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 탈퇴가 다수표를 얻고,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가 당선되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또,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중심국들에서 우익, 심지어 극우 세력이 크게 전진하고 있습니다.

우익도 성장했지만 좌파도 전보다 지지가 늘어났습니다. 미국 대선을 위한 민주당 경선에서 민주주의적 사회주의를 표방한 버니 샌더스 후보가 꽤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비록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지는 못했어도 말입니다. 샌더스 지지는 민주당 바깥에서 훨씬 두드러졌습니다.

영국도 노동당 대표로 제러미 코빈이 선출되고 당 대의원대회에서도 좌파 측이 다수가 돼, 당이 전보다 왼쪽으로 이동했습니다.

물론 선진 산업국에서 좌파는 우익에 비해 취약합니다. 매우 취약해서 수십 년 이래 가장 취약한 상태라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경우 요즘 미국 청년들은 좌파 사상에 관심이 많다는데도 당분간 민주당이 이 새로운 좌파 청년 세대 등장의 수혜자가 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정치적 좌우 양극화가 격심해졌습니다. 그래서 기존 정치 체제가 불안정해졌습니다. 그동안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가 서로 번갈아 가면서 선진 산업국들의 지배계급에 안정적인 완충장치가 돼 주었는데, 그만 그들에게 당혹스런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적 불안정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지배자들의 전망도 뒤죽박죽이다

자유 시장경제 정책들은 선진 산업국들의 대중 속에서뿐 아니라 지배계급에게서도 신뢰를 잃기 시작했습니다. 자유 시장경제 정책들로써 자본주의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을 잃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배자들은 자유 시장경제 정책들뿐 아니라 공적자금 투입과 구제금융, 양적완화 같은 경기부양책들도 믿지 못하게 됐습니다.

전에 그들은 시장경제 정책과 국가 개입 정책을 잘 버무려 사용하면 경제의 장기 침체는 겪지 않고 그저 일시적인 경기순환만을 겪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둘 다를 못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 지배자들, 특히 트럼프와 그를 지지하는 일부 미국 지배자들은 무역 보호주의를 강화해, 서유럽과 중국을 겨냥해 관세를 대폭 올리고, 수입 할당량을 대폭 줄이고, 수입 금지 품목을 늘리기로 했습니다. 무역전쟁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서유럽 정부들과 중국 정부도 무역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미·중 무역전쟁은 최근 격화돼 온 두 국가 간 제국주의적 경쟁의 맥락 속에서 봐야 합니다. 미국과 서유럽의 관계는 제국주의적 경쟁 관계가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좀 더 중요한 양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냉전 종식 이래로 미국은 유일 초강대국 지위를 누려 왔지만, 이면에서는 다른 열강에 비해 그 지위가 상대적으로 약화돼 왔습니다. 여전히 미국의 경제력이 1위이지만 그 뒤를 중국과 독일, 일본 등이 추격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중국을 미국은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히 첨단기술 분야 보호 정책은 이 분야에서 중국이 전진하는 것을 막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특히 군사 장비와 관련된 기술이 그렇습니다. 첨단기술 분야의 보호 문제라면 트럼프는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선진 산업국 정치의 요약

앞에서도 말했듯이, 선진 산업국들의 정치는 양극화와 불안정성이 특징이 돼 있습니다. 강경 우익은 기성 보수 정당 안팎에서 중요한 세력이 됐습니다.

좌파 세력의 처지는 뭐라고 한마디로 요약하기가 어려운데, 일부는 그리스의 현 여당인 시리자처럼 스스로 신임을 실추한 경우도 있고, 영국 노동당이나 스페인 포데모스처럼 아직 검증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신임을 잃은 중도 정당들은 우익의 정책 중 일부를 베껴 쓰고 있습니다. 특히 이민자나 난민이나 무슬림이나 안보 문제 등에서 수치스럽게도 그러고 있습니다. 중도 정당 중에는 영국 노동당만이 제러미 코빈의 지도력 아래 진로를 좌경화시켜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신흥국 한국의 상황

지금까지 선진 산업국들의 상황을 훑어봤는데, 신흥국 한국의 상황은 그와 사뭇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아시게 될 것입니다. 공통점과 차이점이 다 있습니다.

먼저,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 가장 역점을 두고 다른 후보와 토론한 문제가 사실은 경제 문제였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자 합니다. 적폐 청산 문제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주류 정치인들은 기업인들과 자산가들의 이익 문제를 경제 문제, 민생 문제라고 부릅니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 후보는 나머지 대선 후보들과 10퍼센트가량이나 되는 청년 실업 문제도 토론했습니다. 청년들은 대부분 시스템이 자기들에게 불리하게끔 부당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의 혜택을 부패한 대기업들이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몇몇 재벌 총수들을 속죄양으로 제사상에 올려 놓았습니다. 분노한 청년들을 달래기 위해서죠. 그래 놓고는 이재용과 지금 악수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미 지난해 12월 5일 국회에서 법인세법 개정안이 통과될 때 정부·여당은 애당초 연간 순이익 2000억 원 이상 기업에 25퍼센트의(기존 22퍼센트) 세율을 적용하는 개정안을 제출했었습니다. 그러나 기업인들의 눈치를 보느라 연간 순이익 3000억 원 이상 기업에만 적용하는 것으로 후퇴했습니다.

또한 문재인 정부의 청년·저소득층 세입자 관련 공약 32개 중 온전히 이행된 것은 1개밖에 되지 않습니다(경실련 보고).

매사가 이런 식입니다. 뭔가 강력한 조처를 취할 것처럼 제스처를 취했다가 슬그머니 용두사미로 끝나는 것입니다.

지난해는 임금과 정부 공공지출을 늘리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올해 임금 상승을 상쇄시키는 조처들을 취하고, 공공지출 증액을 생색내기 수준으로 만드는 조처를 취합니다. 가령 올해 예산에 대해 〈한겨레〉는 1면 제목은 정부가 복지에 많은 재정을 투입하는 것처럼 뽑았지만, 안쪽 면 제목은 정부가 “속도 조절”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에두르는 비판이었지만). 한국은 아동·가족 복지 공공지출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의 절반으로, 35개국 가운데 31위에 그친 수준입니다. 이런 나라에서 생색내기 짓을 하면 안 되죠.

그동안 문재인 정부가 대중의 불만과 볼멘소리를 들은 이슈는 주요한 것만 꼽아도 이렇습니다. 혜화역 몰카 반대 집회에서 나온 항의, 최저임금 개악, 노동시간 단축 유예, 노동 유연화, 공공기관 호봉제 폐지, 전교조 여전한 법외노조, 교원 성과급, 교원평가, 대입제도 개선 약속 파기, 공공기관 비정규직 정규직화 생색내기 수준, 조선업 구조조정으로 인한 노동자 해고 또는 비정규직화, 사드 배치, 위안부 합의 유지, 호전적 제국주의자 트럼프 국빈 초청, 대북제재 지속 등.

특히 지방선거 후 문재인은 우경화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노동정책에 관한 한 그렇습니다. 국민 통합이 우경화의 명분입니다. 그동안 좌경적이었다는 생각을 반영합니다. 그런데 우경화는 이미 지방선거 전에 예고됐습니다. 영남 지방에서 자유한국당 출신자들을 대거 공천했을 때 알아봤습니다. 이렇게 보수 정치인들을 영입한 데엔 경제가 여전히 어려운 것이 한몫했습니다.

이렇게 경제 전망이 어둡다 보니 한국도 선진 산업국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의 양극화와 불안정이 특징입니다. 그렇기에 바로 1년반 전쯤에 대통령을 몰아내겠다며 절정기에 23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지요.

물론 선진 산업국들과 달리 지금 한국에선 중도 세력이 집권하고 있고(터무니없게도 언론은 이들을 ‘진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중도 세력이 보수 세력보다 강력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중도 세력은 자기 지지자들을 배신할 것입니다. 아니, 벌써 배신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지지율이 4주째 하락하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은 이미 지난해 하반기에도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다만 올해 초 남북·북미 정상회담 국면이 새로 전개돼 지방선거에서 정부·여당 지지율이 정점을 찍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중도 세력이 지지자들을 배신해 선진 산업국들처럼 “극단적 중도” 세력이 되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노무현 집권 후반부를 상기하게 됩니다. 2003년 초 천대받는 대중의 기대와 희망을 한 몸에 안고 취임한 노무현은 배신에 배신을 거듭한 끝에 결국 집권 후반부에 접어들면서는 대중에게 쓰라린 환멸을 안겨 줍니다. 이때 좌파의 정치가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선진 산업국들에서처럼 우리 나라에서도 좌파의 세력은 약세입니다. 하지만 좌파가 중도파로부터 정치적 독립성을 확고히 유지하면서도, 중도파를 지지하던 개혁주의자들과 공동 투쟁을 펼친다면 우리는 곧 회생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정의당의 지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정부·여당 지지가 줄면서 그쪽으로 옮겨가고 있는 모양입니다.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운명도 상기해야 합니다. 통합진보당은 당내 경선 부정 문제를 놓고 분열했습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당 핵심 간부들인 경기동부계의 전쟁 대비책을 내란음모로 몰아 국가가 강제 해산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쟁점은 당내 자민통계의 친북 사상을 유시민·심상정·노회찬 씨들이 싫어하고 우려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에서 제국주의적 갈등 문제가 중요해진 2010년대 상황에서 북핵 문제는 진정한 쟁점이 아닙니다. 이 점을 통합진보당 지도자들은 몰랐습니다. 만약 그들이 북핵이 아니라 미·중 갈등이 진정한 쟁점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한국의 좌파는 미·중 간에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반대하기로 했다면 괜스레 분열하지 않아도 됐을 것입니다. 국가의 공격에도 훨씬 잘 저항할 수 있었을 것이고요.

지금 정의당은 북핵을 반대하는 입장으로 대체로 통일돼 있습니다. 이제 북한 문제로 분열하지는 않을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정의당이 민주당 지지 하락의 반사이익을 얻는 것은 결코 무한정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파 정치 세력도 민주당 지지 하락의 반사이익을 얻고자 분투할 것입니다. 그리고 민주당 안에는 정의당보다는 우파 정당들을 명백히 선호하는 자들이 명백히 더 많습니다.

결국 우파는 어쨌거나 세력을 꽤 되찾을 것입니다. 그들이 지배계급의 제1 선호 정당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에 대항해 정의당은 자기보다 왼쪽에 있는 세력과 함께 저항해야 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정의당의 성장은 제러미 코빈의 선례를 따르느냐 포데모스 지도자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의 선례를 따르느냐 하는 선택지에도 달려 있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어야겠습니다. 민주당의 배신과 그 지지자들의 환멸은 거의 예정돼 있습니다. 그 당의 기반이 자본가 계급이고 자본가들은 장기 침체 속에서 수익성 방어에 여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의식 변화는 그저 객관적 상황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객관적 상황 못지않게 사람들 자신의 능동적인 투쟁 경험이 중요한 요인입니다. 우리는 민주당 지지 하락이 천대받는 대중에게 좋지 못한 결과로 떠안기지 않도록 대중 속에서, 특히 노동계급 속에서 공동 투쟁을 준비해야겠습니다.


Ⅲ. 2019년 세계 상황과 한국 노동운동의 전망 [맨 위로]

1. 2008년 9월 세계경제에 공황이 들이닥친 이래 10년이 지났다. 그러나 10년이 지났어도 당시 공황이 드러낸 모순들은 해결되기는커녕 완화되지도 않았다

2008년 9월 공황은 1929년 10월 대공황 이래 가장 파괴적이고 가장 광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월스트리트의 거대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하고, 세계 최대 보험회사 AIG도 파산 위기에 처했다.

세계 금융 시스템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그래서 공황은 전 세계 금융시장으로 급속하게 확산됐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에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등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금융 시스템의 붕괴를 막는다며 수조 달러 규모의 돈을 지출했다. 물론 다른 경기부양책들도 시행됐다.

하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을 거의 20년간(1987~2006) 지낸 앨런 그린스펀은 당시 의회에 출석해 이렇게 말했다. “시장이 내 이론적 모델대로 작동하지 않아 혼란스럽다.”

당시 주요국 정부들은 ‘구제금융’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의 정책들을 시행했다. 그러나 그 정책들은 금융 투기자들의 손실을 보상해 주는 데 맞춰졌다. 그자들의 투기와 범죄 행위들이 금융 공황을 촉발시켰는데도 말이다.

금융기업 경영인들이 여전히 천문학적 액수의 연봉과 보너스를 계속 챙기는 동안 수많은 노동계급 가족들은 거리로 나앉는 등 빈곤으로 내몰렸다.

특히, 유럽 정부들은 긴축 재정정책을 실행했다. 복지와 공공서비스 지출이 대폭 삭감됐다.

그러나 이 모든 정책들은 지난 10년간 경제를 회복시키지 못했다. 주요 경제들의 생산·고용·소득은 모두 2007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2015년 통계로, 선진국 클럽 OECD 소속 나라들의 전체 가정 중 3분의 2가 2005년보다 생활수준이 낮다. 또한 당시 공황의 전야인 2007년에 비해 지금 부채 비율은 40퍼센트가 더 늘었다. 그래서 지금 세계 부채는 세계 총생산의 217퍼센트나 된다.

2. 트럼프 ‘무역전쟁’은 세계 제국주의 체제라는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

이제 미국 지배계급은 트럼프 정부를 통해 무역 보호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의 ‘무역전쟁’은 단지 무역적자를 줄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중국 측이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을 늘리겠다고 제안했는데도 그 제안을 거절한 것을 보면 말이다. 미국의 요구는 특히 첨단기술(하이테크) 산업분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중국 측이 미국 측의 요구를 실제로 받아들일 리는 없다. 미국 측의 요구가 중국의 무기 현대화는 물론, 지금 추진하고 있는 경제 개발 계획을 전면 포기하라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미국의 무역전쟁은 중국더러 경제적  군사적 열위(劣位)를 감수하라는 압력이다.

게다가 미국의 무역전쟁은 중국뿐 아니라 전통적 동맹들인 유럽과 일본도 표적으로 삼고 있다. 이 점은 다섯 달 전 미국이 유럽연합을 “적”이라고 부른 것에서 드러났다. 또, 그 직후에 열린 G7 회의, 즉 서방 선진 7개국 회의에서 미국 측이 다른 참석자들에게 관세율 대폭 인상을 선포한 데서도 드러났다.

따라서 미국의 무역전쟁은 경제 규모 1위인 국가가 경제 규모 2위인 몇 개 국가들에 미국을 따라잡을 생각은 감히 엄두도 내지 말라는 경고이자 압박인 것이다.

여기서 1등이 2등들한테 추격 포기를 호령하고 위협하는 것이 국가 안보를 이유로 들어 행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2위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국가 안보를 얘기한다.

요컨대 열강의 제국주의가 진정한 쟁점인 것이다. 세계경제 문제는 반드시 제국주의 문제로 연결돼야 한다.

3. 이윤율이 근본 문제다. 그러나 “구조적 모순들”이 해결되지 않아, 이윤율은 회복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얘기한 일들은 모두 자본주의의 이윤율이 회복되지 못해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이윤율이 높고 또 올라가고 있으면, 자본주의 경제는 비교적 건강한 상태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이윤율이 높지 않고 또 증가하지도 않고 있으면, 경제 공황과 불황은 점점 더 자주 발생하고 점점 더 가혹해진다. 그리고 제국주의 열강의 군국주의도 점점 더 노골적이 되고 점점 더 가차없어진다.

자본주의가 이윤율을 회복하려면 수익성 없는 자본들이 파괴돼야 한다. 즉, 더는 충분한 이익을 내지 못하는 기업들이 파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쉽지 않다. 축적으로 자본의 규모가 커지고 그 수가 적어지는 것, 즉 소수 대기업들이 경제를 지배하는 것 때문이다. 앞에서 주요국 정부들이 파산 위기에 처한 은행들을 구제했다고 했는데, 이 일도 수익성 없는 자본의 파괴를 막는 것이다. 그러나 시스템 붕괴를 막으려면 지배자들로서는 어쩔 수 없이 구제를 해야 한다.

이윤율 회복을 위해서는 또한 부채도 없애거나 대폭 줄여야 한다. 특히, 기업들이 이자 부담을 덜어야 한다. 그러나 이 일도 쉽지 않다. 애초에 기업들이 대출을 많이 한 건 수익성이 떨어져서였다. 체제 전반의 이윤율 수준이 올라가지 않는 한은 기업들이 수익성 상승을 바라기는 쉽지 않다. 수익성이 증가하지 않으니 부채 감축도 쉽지 않다.

이윤율을 올리려고 또한 로봇, 인공지능, 인터넷 등 기술 진보가 촉진된다(소위 “제4차 산업혁명”). 하지만 기술 진보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증대시킨다. 그러면 다시금 이윤율이 낮아지는 경향이 있게 된다.

결국 경제 불황은 지속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구조적 모순들”로 말미암은 “유기적 위기”(그람시)이기 때문이다.

4. 낮은 수익성과 불황 지속 전망 때문에 지배자들은 임금 억제에 계속 열을 올릴 것이다

임금 억제는 개별 자본들의 이윤 증대에 직접적 효과가 있기 때문에 사용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방책이다. 또한 지배자들(사용자들과 국가 관료)은 신자유주의에 계속 집착할 것이다. 우리는 문재인이 겨우 집권 1년 만에 규제완화 등 (전임자들이 시행했거나 시행하려 했던 것과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들로 돌아간 것을 봤다. 

5. 신자유주의의 지속은 여러 나라들에서 포퓰리즘을 자극했다

포퓰리즘이 지지를 얻게 되는 것은, 믿었던 권력자들이 자기들을 배신했다고 서민들이 느끼는 때이다.

그 권력자들이 박근혜 같은 우익이면 중도파와 진보파(중도좌파)가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다. 반면 그 권력자들이 진보파나 중도파이면 보수 우익이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우익이 포퓰리즘의 등장을 주도해 득을 보고 있다. 트럼프의 등장이 대표 사례다. 하지만 유럽에서 다양한 극우 정당들이 성장하는 것도 서민층의 포퓰리즘 정서를 이용(악용)한 것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박근혜 퇴진 운동이 포퓰리즘의 분출을 대표했다(이하에서 좌파적 포퓰리즘은 특별히 민중주의로 일컬을 것임). 그리고 그 덕분에 중도 포퓰리스트 세력인 문재인 정부가 등장했다.(한국 포퓰리즘의 핵심 관심사는 남·북한 관계 문제와 재벌 문제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와 여당은 임금 억제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치적 양극화가 급발전하고, 조만간 공식 정치 영역에서의 수혜 세력은 우파 정당들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최근 논문에서 지적했듯이, 2015년경부터 시작된 포퓰리즘의 세계적 부상은 결코 반짝 성공이 아닌 듯하다(http://isj.org.uk/legends-of-the-fall/). 이 점은 무엇보다 트럼프 집권이 증명하고 있다. 그는 무역 보호 정책과 대중국 무역전쟁을 본격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중도 세력의 아성인 독일의 중도우파 정부를 무역 문제, 나토 문제, 이민 문제 등 다방면에서 공격하고 있다. 포퓰리즘의 성공이 일시적인 것이 아님은 여러 나라에서 우익 포퓰리스트 정당들이 전진하고 있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최근 특히 한국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엄중한 경고로 여겨야 할 사례는 브라질이다. 브라질 노동자당 PT는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발전한 투쟁적 노동조합 운동으로부터 출현했다. 그런 PT였건만 그들의 정치도 민중주의 사상이 강력히 득세했다. 민중주의는 한줌 엘리트만 제외하고는 계급을 가로질러 협력하자는 사상이다. 계급 협력주의가 내재적 논리가 된다. 따라서 개량(이하 개혁)주의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개혁주의는 자본주의의 부패에 대한 면역력이 없다. 개혁주의 정부의 일부 관료와 정치인들이 부패하는 건 자본주의의 부수적 산물이다. 2003년 집권한 PT 정부가 부패로 2016년 몰락한 건 바로 이런 개혁주의 논리를 따른 결과의 일부이다. 그리고 급기야 올해 매우 우익적인 자본가 계급 정치인(비록 파시스트는 아니지만)이 집권한 건 이런 역사적 전개의 연장인 것이다.

6. 극우의 부상은 전쟁 위험을 높인다

우익 포퓰리스트들이 전진하면 파시스트들이 득을 본다. 파시즘은 단순한 극우가 아니라 매우 특별한 극우, 즉 중간계급 서민층의 포퓰리즘적·인종차별적·민족주의적 대중운동을 기반으로 대의제 민주주의와 모든 노동자 조직을 파괴할 목적을 가진 극우다.

이 점을 안다면, 주요국 중 하나에서 파시즘이 집권하는 상황이 세계 정세에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 수 있다. G7, 즉 서방 선진 7개국의 하나에서 파시즘이 집권하면 그것은 대규모 전쟁 위험을 지금보다 한 단계 더 높이는 일이 될 것이다.

화약고는 중동일 수도 있고, 동유럽일 수도 있고, 남중국해나 대만해협일 수도 있고, 한반도일 수도 있다. 이 화약고들은 모두 뿌리(제국주의)가 같으므로 서로 연결돼 있다. 하나가 발화되면 다른 곳도 조만간 발화될 개연성이 있다.

7. 한국 노동운동은 여전히 탄력성을 보이고 있다

인상에 치우치는 경험주의자들은 외형적 전투성만으로 노동운동을 판단하려 드는 경향이 있는 데다 그들의 잣대는 우리 나라 일국에 한정돼 있다.

그러나 다른 OECD 나라들에 견줘 우리 나라는 노동계급 운동이 비교적 강력하다. 해마다 세계노동절과 전국노동자대회에 수만 명씩 모이는 것만 봐도 서구 노동운동과 달리 탄력적임을 알 수 있다.

노동조합 정치 면에서도 그렇다. 바로 직전에 집행권을 행사한 한상균 지도부가 민주노총 좌파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은 제쳐놓더라도 지난해 연말 치러진 민주노총 임원선거 1차투표 결과를 보면, 대정부 협상을 강조한 윤해모 후보조는 겨우 11.5퍼센트만을 득표했다. 협상과 투쟁을 동시에 얘기한 김명환 후보조가 46.5퍼센트를 득표했다. 투쟁을 비교적 강조한 이호동 후보조는 17.6퍼센트를 득표했다. 16.6퍼센트를 득표한 조상수 후보조도 전통적인 좌파 기반으로부터 나온 선본이었음을 감안하면 민주노총 좌파는 여전히 조합원의 3분의 1가량 되는 기반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윤해모 후보 같은 매우 온건한 노조 관료가 가뿐하게 과반을 얻고, 좌파 후보는 5분의 1도 못 넘기기 일쑤다.

올해 초, 문재인 정부 초기인데도 사회적 대화 참여 반대가 민주노총 대의원 30퍼센트가량의 지지를 얻었다. 그 밖의 다른 주요 의사결정 회의에서도 좌파적 성격의 동의안은 30퍼센트 안팎의 지지를 얻었다.

한 달 전에 열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무산된 것도 지도부의 사회적 대화 참여 방침에 반감을 가진 대의원의 일부가 불참하면서 빚어진 일이다.(그렇지 않다고 강변하는 김명환 위원장님에게는 미안하게도 말이다.)

며칠 전, 다소 아쉬운 잠정합의안을 놓고 실시된 철도노조 투표에서도 서울지역에서는 47퍼센트가 반대표를 던지거나 기권했다.(철도 노동자들은 매우 지방 분산적임을 감안해야 한다.)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는 올해 여름부터는 노동자들이 항의 수준을 넘는 형태의 투쟁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문재인 취임 직후 몇 달 동안은 노동자들이 지켜봤던 듯하다. 그 뒤로는 항의하기 시작했고, 올해 여름부터는 실제로 싸우기 시작했다. 특히 파업이 늘어났다.

아직 대규모 사업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지 않았으므로 파업 참가자 수나 파업 손실액이 현저하게 증가하지는 않았을 성싶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는 시기의 징후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8. 급진 노동조합주의와 민중주의 사이의 동요와 결합으로부터 개혁주의적 경향이 부상하다

노동운동이 상당히 회복될 것 같다는 전망보다 더 중요한 점은 노동자들의 의식을 주의깊게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브라질에서처럼 한국에서도 노동자 운동은 ‘급진 노동조합주의’와 ‘민중주의’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 동요하는 경향이 있다. 남아공에서는 급진 노동조합주의를 ‘노동자주의’라고 (부적절하게) 불렀다. 필자는 위에서 좌파적 포퓰리즘을 ‘민중주의’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노동조합들은 어떤 때는 김대중-노무현-문재인 같은 포퓰리스트 개혁파 정치인들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는다. 그러다가 노동조합들은 이들에게 배신당하고 반발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노동조합 쟁점들에만 집중하고 더 폭넓은 정치 활동은 피하는 급진 노동조합주의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다가 그들은 다시 포퓰리스트 개혁파 정치인들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리고 또다시 배신당하고 반발한다.

1990년대 초반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와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구분, 1990년대 후반 국민파와 현장파의 구분, 2000년대 ‘(민주노총)우파’와 ‘(민주노총)좌파’의 구분 등으로 호칭이 달라졌기는 해도 이러한 구분들은 본질적으로 민중주의와 급진 노동조합주의의 구분을 반영한다.

민중주의와 급진 노동조합주의 사이의 이러한 동요 또는 결합(최근 ‘사회운동 노동조합주의’가 이런 결합을 반영한다)은 한국 사회의 특성들이 반영된 것이다. 산업 노동계급이 급속히 형성됐지만, 다른 중요한 역사적 요인들이 있다. 제국주의(일본에 이어 미국)에 의한 오랜 민족자결 침해의 역사, 노동계급에 대한 천대와 매우 심한 억압, 해결되지 않은 민주적·민족적 문제들(가령 분단의 지속과 빈번한 대북 적대 정책, 친북좌파 탄압 등) 등의 요인들 말이다. 이런 요인들 때문에 남아공과 브라질처럼 한국의 노동계급은 민중주의 정치를 잘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 흔한 결과는 노동자들이 포퓰리즘 정치를 수용했다가(민중주의),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아무것도 가져다주는 게 없자 그에 반발해 다시 급진 노동조합주의 방향으로 선회하는 것이다. 그때 노동자들의 반응은 정치 운동·활동을 피하는 것이다. 정의당 같은 대중 정당에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적은 것도 그렇지만, 특히 소수 급진적 조합원들이 (소위 ‘현장조직’과는 구분되는) 혁명적 정치조직을 구축해 혁명적 정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불충분하고 사실상 결여돼 있다. 심지어 혁명적 조직의 회원인 조직 노동자도 종종 사업장 바깥에서는 혁명적 토론을 해도 사업장 안에서 조합 동료들과 혁명적 토론과 활동, 조직을 해야 한다는 인식은 대체로 불충분하거나 결여돼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 같은 신흥국들의 특성상 노동자들이 정치 운동·활동을 그냥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감한 문제(가령 안보 위기)에 부딪힐수록 더욱 그렇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다시 민중주의 정치 쪽으로 견인되게 된다.

김대중이 공약을 어기고 IMF 조건들을 다 받아들였을 때 급진 노동조합주의가 다시 분출하면서, 1998년 2월 정리해고제를 수용한 배석범 민주노총 위원장직무대행을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몇 달 후 급진 노동조합주의는 이갑용 전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을 민주노총위원장 자리에 앉혔다. 후임인 단병호 위원장도 재임 중 급진 노동조합주의 경향을 대표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 그의 발밑에서 그의 기반은 현장파와 중앙파로 분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단 당시 위원장은 사실 중앙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가 개혁입법의 필요성을 느껴 당시 민주노동당과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급진 노동조합주의는 2014년 말에야 비로소 민주노총 집행권을 다시 되찾는다. 당시 노동전선과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원회(현 변혁당), 노동자연대 세 조직이 한상균·이영주·최종진 선본을 구성해 선거에 참여했다. 그러나 2017년 말 치른 선거는 박근혜 퇴진 운동 성공과 문재인 정부의 취임으로 다시 강화된 민중주의에 힘입어 김명환 집행부가 등장했다.

그러나 문재인에게 기대를 걸었던 민주노총 노동자들이 (불균등하게) 이반하기 시작했다. 이것도 민중주의/급진노동조합주의 패턴의 재연을 알리는 것이다. 지난 1년간 문재인 정부에 항의하다가 최근 쟁의로 나아간 노동자들은 대부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고 내년에는 다른 직종, 다른 부문 노동자들도 가세할 것 같다.

남아공·브라질처럼 한국의 노동운동도 급진 노동조합주의와 민중주의 사이의 이러한 동요를 끝내지 못하는 것은 조직 노동계급 속에서 혁명적 조직이 약하기 때문이다. 만일 혁명적 조직이 강력하면 혁명가들은 노동자들의 경제투쟁 및 경제적 불만을 국가 권력 문제와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가령 2008년 촛불 집회가 한창일 때 노동조합들은 대부분 이를 ‘패싱’ 했다. 최근인 지난 6월 30일에도 민주노총 주최로 열린 8만 집회 참가자들은 지도부로부터 아무 지시도 받지 못해, 바로 옆에서 열린 난민 방어 집회 현장을 그냥 지나쳤다. 이런 사례는 부지기수다. 특히, 낙태 권리 문제는 노동자 운동이 만만찮게 달려들어야 할 노동계급 쟁점인데도 말이다.

아쉽게도 남아공·브라질처럼 한국의 정치적 좌파도(특히 혁명적 좌파가 조직 노동자들 사이에서 약하면 약할수록) 노동운동이 민중주의와 급진 노동조합주의 사이에서 갈팡질팡 갈피를 못 잡고 동요하는 양상을 끝장내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민중주의와 급진 노동조합주의의 이러한 동요와 결합은 개혁주의 정치의 발전을 촉진할 수 있다. 사회 개혁 운동(또한 주로 그 운동을 하는 정당)도 민중주의와 급진 노동조합주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에 내포돼 있는 경제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의 분리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민중당도 시스템 개혁 운동과 민중주의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물론 민중당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아니라 스탈린주의 정당이다. 하지만 1980년대와 달리(당시 명칭 ‘NL’이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줄임말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민중당은 혁명이 아니라 개혁 노선을 걷고 있다. 자본주의적 계급 관계가 발전하고 국가 형태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인 조건에서 민족해방 ‘혁명’은 실천에서는 개혁주의로 나타난다.

그러나 세계경제와 한국 경제가 모두 장기 불황이어서 개혁 노선은 운신의 폭이 매우 제한돼 있으므로, 제대로 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9. 지난 30년은 한국 노동계급의 기초학습 기간

우리는 1987년 이래 한국에서 전개된 대중적 노동운동을 일종의 학습 과정으로서, 즉 노동계급이 자신의 힘을 보여 주고 자신의 힘을 느끼고 상이한 해결책들을 시험해 본 기초학습 과정으로 봐야 한다.

한국 노동자들이 배운 잠정적 교훈은 김대중-노무현-문재인으로 대표되는 포퓰리스트 개혁파 부르주아 정치인들에 대한 환상이 점점 더 깨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때 혁명가들이 영향력을 획득하려면 노동자 의식의 모순과 자본주의 내 개혁 노선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럴 때만 시스템 개혁 운동의 허를 찌를 수 있다.

10. 리더십의 위기와 혁명적 리더십의 사활적 필요성

개혁주의의 대안으로, 혁명가들이 기층 노동자와 청년·학생 속에서 성장하지 못하는 동안 노동운동은 계속 민중주의와 급진 노동조합주의 사이에서 동요할 것이다.

또한 공식 정치 영역에서도 정의당 등 개혁주의 군소정당들이 원기를 회복한 한국당 등 우파 정당들에 맞서 힘겹게 저항하는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민주당은 최소 저항만을 하고).

1920년 레닌은 자본주의의 위기가 아무리 심각해도 지배계급에게 “절대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런 생각이 공허한 현학이거나 말장난일 뿐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부르주아적 질서는 지금 세계적으로 이례적인 혁명적 위기를 겪고 있다. 우리가 증명해야 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절대적으로 절망적인 상황 같은 게 아니라 혁명적 당의 실천을 통해 당이 충분히 의식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즉, 당이 피착취 대중과 연관 맺는 조직화 사업이 충분하며 이 위기를 이용해 혁명을 성공시키고 승리로 이끌 투지와 이해력이 있느냐를 실천을 통해 증명해야 한다.

레닌의 경고는 그의 사후 스탈린주의의 등장, 중국 혁명의 실패, 독일 반나치 공동전선의 좌절과 히틀러의 집권 등을 생각해 보면 지금도 뼈아프게 느껴진다.

1930년대 후반에도 트로츠키는 “리더십의 위기”에 대해 얘기해야 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혁명적 리더십의 부재가 문제였다. 그때는 1938년으로, 1929년 대공황이 10년째 대불황으로 이어지고, 세계대전이 재발될 위험이 공공연하게 거론되던 때였다.

혁명적 리더십, 즉 혁명적 정치조직의 건설이 사활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다행히 오늘날의 상황은 트로츠키가 부심하던 1930년대 후반보다 혁명가들에게 덜 불리하다. 당시에 소련은 각국 노동운동 투사들에게 거의 신적 존재였다. 각국 공산당은 자국의 노동자 혁명을 위해 고민하기보다는 ‘신’의 주권과 영광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산당 자신도 ‘신’의 후광을 업고 ‘신’의 대행자로 여겨지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소련도, 그 대행자인 이른바 ‘국제 공산당 운동’도 없다.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만, 오직 믿음만이 북한을 미국과 대등한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는 심지어 트로츠키 때보다도 취약하다. 1990년대 후반부터 바로 얼마 전까지 거의 20년간 서유럽 전역에서 집권하면서 사회민주주의 정부들은 ‘사회자유주의’ 또는 ‘극단적 중도파’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며 몰락했다.

물론 좌파적 사회민주주의가 주류 사회민주주의가 물러난 자리를 메우려 애쓰고 있다. 시리자의 선례는 그다지 좋은 본보기가 되지 못했고, 제러미 코빈 대표가 이끄는 영국 노동당이 선진 자본주의 나라의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기대주이자 유망주로 떠올랐다. 영국 노동당이 순항하면 정의당 좌파, 노동당, 변혁당 등을 비롯한 좌파적 개혁주의 정당들이 고무될 것이다. 혁명적 좌파인 우리도 고무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영국 노동당의 앞길이 그저 창창하기만 한 건 아니다. 당내 우파의 비방과 모략이 심각하게 야비해서 보수당의 대리인들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반면 당내 코빈 지지자 그룹인 ‘모멘텀’은 당 안팎 오른쪽으로부터의 공격에 직면해 비굴하리만큼 기회주의적이다. 아마도 최대 장애물은 자본가들이다. 그들은 벌써부터 자본 도피를 통해 코빈을 위협하고 그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2010년대에야 비로소 90년 전의 서구처럼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스탈린주의 정당이 분화된 진보·좌파 정치 지형이 형성됐다. 그러나 그런 정당들이 부상해서 집권까지 해야만 노동계급이 학습을 완료하는 건 아니다. 이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진전되고, 세계화로 경제적으로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통합 수준이 매우 높아진 상황에서는 개혁주의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데 가속이 붙을 것이다.

한국 같은 신흥국들은 여전히 레닌이 말한 “자본주의 사슬의 약한 고리”다.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오랜 기간 격동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새 세대도 거기서 많이 배울 것이다. 그 학습 과정을 혁명가들과 함께하면 어쩌면 전세대보다 더 잘 배울 수 있을 것이다.


  1.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란타 시 소재 연방준비은행의 보고.

  2. 같은 글.

  3. 주식의 시가를 1주당 세후(稅後) 이익으로 나눈 것.

  4. Thomas Piketty, Emmanuel Saez, and Gabriel Zucman, ‘Economic growth in the United States: A tale of two countries’, December 6, 2016

  5. István Mészáros, ‘Structural Crisis Needs Structural Change’, Monthly Review, Volume 63, Issue 10, March, 2012.

  6. 데이비드 하비, 《신제국주의》(한울아카데미, 2005), 197~198쪽.

  7. 제라르 뒤메닐 & 도미닉 레비, 《신자유주의의 위기》, 후마니타스, 2014년, 38, 349, 396~397, 459쪽. 또한 같은 저자들의 《거대한 분기》, 나름북스, 2016년, 66~82쪽.

  8. 나오미 클라인, 《쇼크 독트린》(살림Biz, 2008), 30, 76쪽.

  9. 이쉬트반 메사로쉬, 앞서 언급한 글.

  10.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한울아카데미 2007년).

  11. Francis Fukuyama, ‘America: the failed state’, Prospect, January 2017.

  12. 인물과사상사, 2016년.

  13. Quaderni del carcere, Torino, 1975, p. 1404. Antonio A. Santucci, Antonio Gramsci, Monthly Review Press, 2010, p. 153에서 재인용.

  14. 같은 책.

  15. 그람시는 “유기적(organic) 위기”와 “국면적(conjunctural) 위기”를 구별한다. “국면적 위기”는 특정 맥락이나 특정 조건들 때문에 제 기능을 못 하는 상황인 데 비해, “유기적 위기”는 생산양식이라는 근본적 토대와 관련되고, 특히 “기본 계급들[가령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지배와 종속 관계와 관련된 상황을 말한다. “유기적 위기”는 위에서 언급된 이쉬트반 메사로쉬가 말한 “구조적 위기”와 대강 비슷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16. 1919년 6월 21일치 L’Ordine Nuovo 신문에 실린 그람시의 논설, ‘Workers’ Democracy’. Antonio Gramsci, Selections from Political Writings 1910-1920 (London, 1977), pp. 65-67에서 재인용.

  17. Daniel Bensaïd, ‘Working class, social movement, alliances - and the limits of radical democracy’, 2007년 8월 27일. http://danielbensaid.org/Hegemony-and-United-Front?lang=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