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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샌드박스 시행:
경제 활력은커녕 사고 위험만 키우는 규제 완화 정책

1월 17일부터 ‘규제 샌드박스’ 제도가 일부 시행됐다. 규제 샌드박스는 미국에서 만들어진 용어로 기업의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규제가 아예 없는 영역을 만든다는 뜻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규제프리존’이라고 부르던 제도를 이름만 바꾼 것이다.

정부 여당은 이를 위해 지난해 말 법안 5개(정보통신융합법, 산업융합촉진법, 금융혁신법, 지역특구법, 행정규제기본법)을 국회에 상정해 그 가운데 4개를 통과시켰다. 그중에 정보통신융합법과 산업융합촉진법이 17일부터 시행됐다. 금융혁신법과 지역특구법은 4월 시행 예정이다. 행정규제기본법은 국회 계류 중이다.

규제 샌드박스 제도는 첫째, 국내의 다른 법률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새로운 사업은 일단 허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둘째, 이미 다른 법률에 규제가 명시돼 있는 경우에도 기업들이 스스로(!) 안전성을 평가해 보고하면 이를 바탕으로 규제 적용에 예외를 둘 수 있도록 했다. 셋째, ‘신기술’의 경우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아도 효용성만 증명하면 일단 사업을 승인한다.

정부는 현대차·KT·카카오 등 대기업들이 신규 제품·서비스 허가를 신청했다며 금방이라도 투자가 크게 늘 것처럼 말한다. 문재인은 “그동안 규제로 인해 꿈을 현실로 구현하지 못한 모든 분에게 즐거운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며, “기업은 신나게 새 제품을 만들고 신기술, 신산업이 활성화되면 우리 경제의 활력도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를 부풀렸다.

규제 완화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정책 규제 완화가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지난 수십 년간 입증됐다 ⓒ출처 청와대

그러나 실제 내용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것들뿐이다. 먼저 KT와 카카오가 신청한 ‘신산업’은 경찰청이나 국민연금공단이 과태료 고지서를 휴대전화 메시지로 “쉽고 빠르게” 보내는 ‘서비스’다. 언뜻 보기에도 여느 정부 관료의 머릿속에서나 나왔을 법한데, 경제 활력은커녕 사람들의 반발을 살 수 있다. 경찰청이나 국민연금공단이 보유한 개인 정보를 정보통신 기업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조처이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서울 시내 5개 지역에 수소 가스 충전소를 짓겠다고 신청했다. 지금까지는 가스 충전소를 함부로 짓지 못하도록 규제해 왔다. 가스를 다루는 작업은 본질적으로 폭발의 위험이 있는데, 인구가 밀집한 지역에서는 피해가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2010년 서울시내 버스에 장착된 CNG 가스통이 폭발하는 사고가 벌어져 우려를 낳았는데, 비슷한 일이 훨씬 큰 규모로 벌어질 수 있다.

유전자 검사 업체 마크로젠은 ‘유전자를 분석해 건강 관리를 해 주는 서비스’ 허가를 신청했다. 유전자를 분석해서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한다는 개념 자체가 매우 섣부른 것이다.

“암 유전자가 있다고 해도 반드시 암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유방암 유전자’(BRCA1)를 가진 유방암 환자는 약 5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조현병 유전자도 유전변이는 100개가 넘지만 유병률은 전체 인구의 1퍼센트에 불과하다. 더욱이 설령 ‘이상 유전자’가 발견된다고 해도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통보받으면 평생을 얼마나 큰 공포 속에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라.”(신영전, 한양의대 예방의학 교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동안 주류 과학계의 정설처럼 유포된 ‘유전자 결정론’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서비스’를 이용할 듯하다. 유전자 분석 업체나 ‘유전자 치료’를 내세운 사이비 병원·제약업체는 이를 악용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유전자 치료?

규제 완화로 경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논리다. 2차 대전 이후 세계 경제의 장기 호황이 1970년대에 끝나고 경제 위기가 찾아왔을 때 기업주들과 주요 선진국 정부는 규제를 그 원인 중 하나로 지목했다. 각종 규제 때문에 새로운 산업에 투자하려는 의욕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특히 후발 주자들이 대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거나 이기려면 다소 불완전한 상품이라도 만들어 팔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정 하에 지난 수십 년 동안 규제를 완화했어도 경제 위기는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2008년 이래로 길고 긴 경기 침체가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대기업으로의 집중도 가속됐다. 구글, 애플, 페이스북 등 ‘혁신’을 내세운 새로운 대기업의 등장도 이 추세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반면, 각종 규제 완화는 안전 조처를 약화시켜 크고 작은 사고가 빈발했다. 양극화도 더욱 심화했다.

애당초 진단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는 자본가들이 투자를 꺼리는 상황인데, 이는 단지 규제가 많아서 만은 아니다. 호황기에는 규제가 아무리 많아도 투자가 활발하고 심지어 투기를 막기 위해 각종 규제가 신설되기도 한다.

규제가 아니라 경쟁적 축적이라는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 자체가 경제 위기를 낳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의 원천은 인간의 노동력인데, 경쟁에서 이기려면 경쟁자보다 짧은 시간에 이윤을 더 많이 얻어야 한다. 그래서 모순이게도 인간의 살아 있는 노동력보다 기계 등 설비 투자에 더 많이 투자한다. 경쟁의 압력은 이윤율이 낮은 부문에서 높은 부문으로 자본이 이동하게 하는데, 앞선 과정의 반복으로 오히려 경제 전체의 이윤율이 낮아지는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 규제 완화는 시장에서 자국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것이니 위기 해결은커녕 오히려 위기를 심화하고 가속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런 기업들의 탐욕스런 이윤 추구를 아이들이 ‘맘껏 뛰어노는 놀이터’에 비유하니 씁쓸함을 느끼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설사 규제 완화로 일부 벤처 기업이 성장하거나 대기업이 투자를 늘리더라도 노동자들 입장에서는 전혀 환영할 일이 못 된다.

기업들이 ‘자유롭게 뛰어노는’ 놀이터에서 생기는 일자리는 저질 저임금 일자리일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앞서 지적한 대로 그런 일자리가 안전 규제 완화로 생겨나는 피해보다 우선시될 수는 없다.

각종 대학 연구 보고서가 조작됐던 가습기 살균제 사건, 기업의 자체 안정성 평가 외에 믿을 만한 정부의 평가 자료가 없고 그조차 공개하도록 강제할 수 없었던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건, BMW 화재 사건 등이 그 사례다. 이 사건들은 하나같이 정부 자신의 안전성 검증 없이 기업 측의 평가만 믿고 사용을 허가한 경우다. 사고가 나도 정작 정부는 뭐가 문제였는지도 알지 못했고, 이런 방식을 인정해 둔 터라 기업 측의 내부 연구 자료를 요구해도 기업주들이 이를 손쉽게 거부할 수 있었다.

규제 샌드박스는 경제 위기를 해결하지도 못하고, 일자리 대안이 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