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들어 식민지 조선(한국)의 공기는 심상치 않았다.

조선 총독을 역임했던 데라우치는 이렇게 불안함을 토로했다. “요사이 경상도, 함경도 등 여러 도에서 다수 인민의 소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는 사정은 대단히 우려할 현상이다.”

그러나 식민 지배를 받기 시작한 지 불과 9년 만에 조선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도전하는 거센 저항이 일어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1919년 그날

1919년 3월 1일 새벽부터 서울 시내의 거리·학교 곳곳에 유인물이 뿌려지고 대자보가 나붙었다. 경찰이 안간힘을 썼지만, 궐기를 촉구하는 선동이 퍼져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오후 2시 많은 사람들이 탑골공원에 모였다. ‘민족 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한 청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낭독이 끝나자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공원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았고 학생들도 교문을 나와 대열에 합류했다. 

총독부 관계자의 말처럼, 이날 경성(서울) 거리는 솜을 깐 것 같이 군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날 시위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3월 1일 시위는 서울을 비롯해 주요 도시 7곳에서 벌어졌고, 곧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덕수궁앞 만세시위 ⓒ출처 독립기념관

서울의 투쟁은 시위를 주도한 청년·학생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잠시 주춤한 듯했다. 그러나 3월 22일 노동자대회가 열리자 서울에서 시위가 다시 불붙는 계기가 됐다. 3월 26~27일에는 전차·철도 노동자, 만철 경성 관리국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면서 투쟁 분위기가 더 달아올랐다.

부산에서도 4월 들어 시위가 잠시 소강 상태에 빠진 듯했으나, 4월 20일 부산 조선와사 노동자들이 파업을 한 데 이어 부산·동래·마산 등지에서 노동자 1000여 명이 파업을 벌이면서 투쟁 분위기를 이어 나갔다.

농촌 지역의 경우, 시위대가 행정을 아예 마비시키거나 면사무소가 시위대에 접수돼 운동 사무소로 이용되는 경우도 생겨났다. 예컨대 순천군 신창에서는 주민들이 면사무소를 접수해 ‘대한독립운동준비사무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3월부터 5월에 집중된 시위에 참가한 사람의 수는 200만 명이 넘었다. 당시 인구가 2000만 명인 걸 감안하면 시위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 일본은 운동의 기세에 당황했다. 그러나 곧 탄압에 나섰다. 탄압 과정은 만행 그 자체였다. 1919년 3월 1일부터 다음 해 3월 1일까지 7000명 이상이 죽었고 체포된 자만 4만 명이 넘었다.

잔혹한 탄압 끝에 조선(한국) 전체를 뒤흔든 저항의 기세는 수그러들었지만, 3·1운동의 여파는 오랫동안 식민지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919년 3ㆍ1운동 당시 탑골공원 앞에 모인 사람들 ⓒ출처 독립기념관

전쟁과 혁명

3·1운동에 대한 정부와 주류 역사가들의 해설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제1차세계대전 이후 당시 미국 대통령인 윌슨(1856~1924)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면서, 그 영향으로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을 계획했고 이들의 주도로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3·1운동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고 협소하다. 3·1운동은 제1차세계대전(1914~1918)과 이후에 벌어진 국제적인 혁명의 물결 속에서 일어났다.

제1차세계대전은 혁명 덕분에 끝났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했고, 1년 뒤 독일에서 노동자와 병사들이 독일 황제를 타도했다. 

혁명의 물결은 식민지 반란으로도 확대됐다. 1916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영국에 맞선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1919년 5·4운동이 일어났고, 1925~1927년에는 노동자 혁명이 일어났다. 3·1운동은 이 거대한 물결의 일부였다.

사실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선언한 ‘민족자결주의’는 러시아 혁명을 의식한 조처였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 혁명 정부가 주장한 민족자결권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윌슨은 민족자결권 적용 범위를 패전국의 영토와 그 식민지로 국한했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가 독립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식민지 민족주의자들에게 기대를 심어 준 것은 사실이었다. 1919년 3월 독립선언을 조직했던 인사들 다수가 그 선언과 만세 시위를 강대국들(특히 미국)에 청원하는 수단으로 여겼던 까닭이다.

물론 그 기대가 실망과 배신감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본이 3·1운동을 탄압하는 와중에, 미국 국무부는 조선의 “소요”에 대해 일본이 특별히 잔인무도한 조처를 취했다고 여기지 않는다고 밝혔다.

누적된 불만

1910년 이후 국내에서 일어난 변화도 3·1운동의 배경이 됐다. 일본은 동학농민항쟁 등 거듭되는 저항을 내리누른 끝에, 1910년 ‘한일병합’으로 조선의 모든 것을 장악했다.

‘병합’ 이후 일본은 소위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보안법과 집회 관련법을 만들어 사람들을 ‘자극’할 모든 단체와 간행물을 금지했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조선에도 변화가 일었다. 일본은 전쟁 특수를 누리며 경제 호황을 맞았다. 그러자 조선에서도 회사 설립 규제가 완화되고 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노동자 규모가 커졌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호황의 혜택을 보지 못했다. 1910년 8월을 100으로 했을 때, 1918년의 물가지수는 235였는데 공장 노동자들의 노임지수는 120에 지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민족적 천대와 가혹한 착취에 시달렸다.  

농민들도 전쟁 탓에 늘어난 조세와 쌀 수탈로 고통을 겪었다. 농가 1호당 조세부담액은 1915년에는 6원이었는데, 1920년에는 13원으로 급등했다. 당시 농민의 압도 다수는 빈농층이었는데, 그들은 근근이 생명을 부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 속에 불만이 누적돼 폭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3·1운동이 바로 그 폭발의 계기였던 것이다.

분화

3·1운동은 제국주의에 맞서 정말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민중 항쟁이었다. 3·1운동은 제국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이 아래로부터의 대중 투쟁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 줬다.

그러나 사람들이 동일한 생각으로 3·1운동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대토지를 지키려는 조선인 지주와 해방되면 토지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 소작농의 처지가 같을 수 없었다. 조선인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해관계도 같을 수 없었다.

운동의 분화는 필연이었다. 3·1운동은 가장 억눌려 온 계급들에게 활력과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사회주의 조직도 등장했다.

[추천 소책자] 새 세대를 위한 3·1운동사 ―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시각 김동철, 이정구, 김영익 지음, 노동자연대, 72쪽, 3,000원 [자세히 보기] ⓒ노동자연대

특히 노동운동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1920~1930년 사이에 벌어진 노동쟁의는 891건으로 1910년대보다 4배 이상 증가했다. 이렇게 성장한 노동운동은 (비록 패배하지만) 1929년 원산총파업으로 절정을 맞이했다.

이전에는 확연히 드러나지 않던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일본인 공장에서뿐 아니라 조선인 공장에서도 파업했다. 조선인 자본가들은 이것에 대응해야 했다. 기층 대중 운동이 성장하자 조선인 자본가·지주들은 일본 권력과 더욱더 유착했다. 이 점이 1920년대부터 민족주의자들이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이 반제국주의 운동에서 주도권을 잡게 된 주된 배경의 하나였다.

3·1운동은 우리가 자랑스럽게 기억할 저항의 전통이다. 여전히 제국주의가 현실의 중요한 문제인 오늘날, 그 전통을 진정으로 기념하고 계승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제 노동계급이 그 중심에 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