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3일 환국 20일 전 청사에서 기념 촬영하는 임시정부 요인들

요즘 민주당과 온건 진보 측 다수는 3·1운동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계승했고, 대한민국의 뿌리는 그 임시정부에 있다고 본다.

임시정부(와 그 핵심 인사들)는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일본에 타협하는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한 단체였다. 그리고 3·1운동 당시의 급진화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민주공화정을 기본 이념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당시 민족 해방 운동의 유일한 대표라고 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내부 분파 갈등으로 제대로 활동하기조차 어려웠다.

임시정부는 처음부터 강대국(특히, 미국)과의 외교를 통한 독립을 꾀했다. 동아시아 외교의 중심지인 상하이에 자리잡았던 까닭이다. 그러나 서구 열강에 대한 임시정부의 기대는 번번이 무너졌다. 그리고 이 노선은 임시정부를 무기력하게 만들었고 대오를 분열시켰다.

[추천 소책자] 새 세대를 위한 3·1운동사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시각 김동철, 이정구, 김영익 지음, 노동자연대, 72쪽, 3,000원 [자세히 보기] ⓒ노동자연대

1941년에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를 통해 임시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본 전쟁에 참가할 수 있기를 고대했다.

하지만 미국은 임시정부가 한국의 독립운동 그룹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여겼다. CIA의 전신인 미국 전략첩보국(OSS)이 임시정부의 광복군 대원을 선발해 특수훈련을 시켰지만, 미국은 이 일을 임시정부 승인과 연결하지 않았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났지만 임시정부는 그 이름으로 국내에 들어올 수 없었다. 미국은 남한에서 군정을 실시하면서 자신 이외의 어떤 정부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1운동 이후 임시정부만 등장한 게 아니었다. 많은 청년이 각성하면서 수많은 투사와 단체, 특히 사회주의 조직들이 등장했다. 무엇보다 노동자와 농민 등 기층 대중 운동이 부상했다. 이들이 민족 천대와 계급 착취에 동시에 맞서며 민족 해방 운동의 주력 구실을 했다. 3·1운동의 진정한 계승을 논한다면 임시정부보다 이들을 먼저 언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