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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심판 앞둔 낙태죄:
낙태죄 폐지하고 낙태권 보장하라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 시위 ⓒ이미진

형법상 낙태죄에 대한 헌재 심판이 4월 초로 예상되자, 낙태죄 폐지·합법화 논의가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그간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 시위’를 벌여 온 ‘비웨이브’가 3월 9일 시위를 재개한다. 진보적 시민단체들도 토론회를 개최했고, 낙태죄 위헌 의견을 헌재에 제출할 예정이다. 정의당 이정미 대표는 다음주 낙태 관련 법(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헌재 심판의 대상은 낙태한 여성과 낙태 시술을 도운 의료인을 처벌하는 형법 조항(269조 1항과 270조 1항)이다. 이 조항은 7년 전 합헌 결정 이후 또다시 헌재 심판대에 올랐다. 2010년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낙태 의사 고발로 단속이 강화돼, 좌파와 여성단체들의 낙태 처벌 반대 캠페인이 시작됐다. 7년 전 낙태죄가 헌재 심판대에 오르게 된 배경이다.

그 뒤 낙태죄 폐지 여론은 성장해 왔다. 최근 정부 실태조사에서는 75.4퍼센트의 여성이 낙태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 개정을 지지했다. 지난해와 올해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낙태죄 폐지 의견이 유지 의견보다 높았다.

태아의 생명권?

2012년 헌재의 합헌 결정은 ‘태아 생명권’ 논리에 바탕을 뒀다. 태아의 생명권이 임신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은 단지 태아를 담는 그릇이 아니다. 임신은 여성의 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태아는 모체에 의존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모체의 일부이지,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다. 따라서 ‘태아의 권리’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고, 임신 중단은 여성이 결정할 권리여야 한다.

출산은 여성의 삶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낙태가 금지되면 여성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결정하기 어렵다.

낙태 금지는 낙태를 줄이기는커녕 여성의 건강과 삶만 해칠 뿐이다. 세계보건기구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전 세계에서 한 해 약 2500만 건의 안전하지 않은 낙태가 이뤄졌고, 낙태가 불법인 나라에서 그 비율이 높았다.

한국에서는 낙태 시술이 광범하게 이뤄진다. 하지만 불법이기에 몰래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여성들이 죄책감에 시달린다.

또한 불법이기에 많은 비용을 감수해야 하고, 낙태 수술 뒤 휴가도 없이 출근해야 해서 몸이 축나기 쉽다. 이는 빠듯한 임금으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노동계급 여성이나 경제력이 없는 청소년들에게는 큰 부담이다. 수술이 잘못돼도 보상받기조차 어렵다.

한국에서 낙태로 실형선고를 받는 일은 드물다. 그래서 ‘식물형법’이 됐다는 지적도 있다. 2012년 헌재의 합헌 결정 후 5년간 전국 법원의 낙태 관련 판결 전체(80건)를 분석한 결과, 실형이 선고된 사례는 1건에 불과했다. 선고유예와 집행유예가 압도적이었다(〈동아일보〉).

하지만 낙태가 죄로 남아 있는 한, 낙태한 여성과 의사는 언제든 경찰 조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2010년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고발 캠페인과 지난해 남해 경찰서의 낙태 여성 색출 사례가 대표적이다. 실형선고로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이 과정 자체가 여성들을 위축시킨다. 또한 단속이라도 벌어지면 위험 부담이 커져 낙태 시술 비용이 뛴다.

낙태죄 폐지뿐 아니라,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가 여성의 권리로 보장돼야 한다. 경제적 부담 없이 낙태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의료보험을 적용해야 한다. 이는 미프진 등 낙태약에도 적용돼야 한다.

또한 기간과 사유의 제한 없이 여성의 선택권이 보장되는 합법화가 필요하다. 여성의 동의 외에 다른 제약 조건을 두는 것은, 그 조건의 충족 여부를 의사나 국가관료가 판단한다는 것을 뜻하므로 여성의 결정권을 온전히 보장한다고 보기 어렵다.

낙태의 대부분이 임신 12주 이내에 이뤄지지만, 불가피하게 그 뒤에 낙태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기간의 구분 없이 여성의 선택권을 동일하게 보장해야 한다.

상담 절차를 의무화해서도 안 된다. 해외에서 낙태 반대 운동가들은 흔히 상담 절차를 여성의 낙태 선택을 어렵게 만드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낙태 전에 여성이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을 기회를 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청소년들의 경우, 부모 동의를 의무화하는 것도 반대해야 한다. 이것은 청소년들의 낙태를 극히 어렵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낙태권 운동이 강화돼야

일각에서는 헌재가 위헌(또는 헌법불합치) 판결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은 듯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아직 낮아 보인다.

오늘날 한국 지배계급은 저출산으로 미래의 노동인구와 징집 대상자가 감소해 ‘국가경쟁력’이 약화될 것을 크게 우려한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수)이 1명 이하로 떨어져 위기 의식은 더 커졌다. 낙태 허용은 국가의 출산 장려책과 충돌한다.

따라서 경제 위기와 지정학적 위기에 처한 한국의 지배계급이 아래로부터 커다란 압력 없이 순순히 낙태죄를 폐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일랜드에서는 좌파가 상당한 주도력을 발휘하고 노동계급이 동참한 대중운동이 존재했기에 낙태죄를 폐지할 수 있었다.

지배자들 다수가 여전히 낙태죄 유지를 원한다는 점은 문재인 정부의 실천을 봐도 드러난다. 문재인은 지금껏 낙태죄 폐지 염원에 재를 뿌려 왔다. 이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여성들의 기대가 배신감으로 바뀌는 계기의 하나였다.

낙태 의사 처벌을 강화하는 행정규칙 개악과 남해 경찰서의 낙태 여성 색출 시도는 이 정부의 낙태죄 유지 의사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특히 전자는 원래 박근혜 정부가 하려다가 퇴진 운동의 효과로 중단된 것을 문재인 정부가 되살린 것이다.

설사 헌재가 일부 법 개정을 주문한다 해도, 그것은 새로운 쟁투의 시작일 수 있다. 낙태 합법화의 필요성과 허용 수준을 둘러싼 논쟁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개선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제약 수준이 높으면 별로 개선되는 게 없을 수도 있다.

이미 낙태를 합법화한 나라들에서조차 이를 되돌리려는 정치적 공격이 야금야금 일어나 수십 년째 논쟁과 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낙태 금지 헌법을 폐지한 아일랜드에서도 합법화의 수준을 둘러싼 새로운 논쟁이 시작됐다. 지배자들은 되도록 많은 제약을 남겨 두려 한다.

따라서 낙태권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헌재 판결에 의존하지 말고 아래로부터 낙태권 운동을 꾸준히 건설해 나가야 한다. 특히 이 운동의 힘을 강화하려면 남녀 노동계급이 참가하는 대중운동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

정의당의 낙태죄 폐지 추진은 옳다

정의당 이정미 의원은 형법상 낙태죄 폐지안과 더불어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마련한 상태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현재 알려진 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신 12주 이내의 경우 임산부의 동의 시 낙태 허용. 12주~24주의 경우 상담절차를 거쳐 낙태 허용, 사회경제적 허용 사유 추가. 배우자 동의 삭제. 성폭력 범죄로 인한 낙태는 가해자 유죄 판결 전이라도 낙태 허용. 의사의 종교적 신념에 따른 낙태 거부 인정.

정의당이 여성들의 열망에 부합하고자 낙태죄 폐지안을 발의하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모자보건법 개정안의 내용도 현행보다는 훨씬 낫다.

다만 현재 안은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하기에는 부족함도 있다. 임신 12주 이후의 경우에는 사유의 제한을 두는 점, 상담절차를 전제하고 있는 점, 낙태에 의료보험을 적용하는 방안이 빠져 있는 점 등이 그렇다.

특히 의사의 종교적 신념에 따른 수술 거부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것은 큰 난점이 있다. 이탈리아 등 외국의 사례에서 보듯, 우파적 의사 등 반낙태 세력이 이 조항을 이용해 수술 거부 캠페인을 효과적으로 벌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의 요청 외에 다른 제약 조건을 두지 않는 합법화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제약 조건 밖의 낙태는 여전히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설사 형사 처벌이 아닌 과태료 부과의 방식이라 해도 낙태 시술이 위축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여성의 낙태권을 더 선명히 보장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확장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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