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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창립 100주년:
세계 혁명의 등대 코민테른

9로 끝나는 해에는 유의미한 역사적 사건들이 많았다. 1919년 3월 2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 창립도 그중 하나다. 훗날 스탈린에 의해 완전히 망가지지만, 한때 코민테른은 혁명적 전략·전술을 배울 수 있는 최고의 학교였다.

이 글은 코민테른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오늘날 국제 사회주의자들이 도출해야 할 더없이 소중한 교훈들을 소개한다.

국수주의자들이 벌인 제1차세계대전의 대학살을 보며 어떤 사람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며 절망했다.

그러나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았다.

러시아 노동자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한 지도를 제공할 수 있는 정당, 즉 볼셰비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볼셰비키에게 사회주의는 위로부터 선사되는 무엇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었다.

볼셰비키는 자본주의 국가가 분쇄돼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또한 자본주의는 세계 체제이기 때문에 국제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9년에 볼셰비키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설립했다. 코민테른의 목적은 전세계 최상의 투사들이 협력해 러시아와 같은 승리를 가능케 할 정당들을 만드는 것이었다.

1919년 3월에 코민테른 첫 번째 대회가 열렸다. 35명의 대표가 참여했지만 그 중 러시아인 다섯 명만이 진정으로 대중적인 혁명 정당을 대표했다.

대중적인 혁명 정당을 창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터였지만, 그럼에도 코민테른은 혁명 전략과 전술을 배울 수 있는 최고의 학교가 됐다.

코민테른에서의 논쟁은 노동계급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혁명 정당을 건설하는 문제에 방점을 뒀다.

코민테른은 혁명가들이 억압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고 노동조합이나 민족 해방 투쟁과 어떻게 관련 맺어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논의했다.

러시아 혁명가들은 다른 [나라] 혁명가들의 경험에서 배웠다.

제3차 대회에 참가한 인도 대표 M N 로이는 이렇게 기록했다. “유색 인종 사람들이 고압적인 제국주의자들이 아닌 친구이자 동지로서 백인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코민테른은 좌파 단체들에게 거창한 이름을 붙여 주려고 설립된 것이 아니었다.

코민테른은, 혁명적 위기로 대중적 공산당이 등장해 [노동계급의] 국가 권력 장악을 이끌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될 거라는 전망 속에서 결성됐던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인 전망이었다. 제1차 대회가 열린 바로 그 해에, 헝가리와 [독일의] 바이에른에서 소비에트 공화국이 잠깐이나마 권력을 잡았다. 또한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가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됐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와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거대한 파업이 벌어졌으며, 영국과 프랑스에서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1920년 3월 독일에서는 우파의 쿠데타 시도를 노동자 총파업으로 분쇄했다.

노동자들이 코민테른 소속 정당들로 몰려들었다. 1920년에 열린 코민테른 제2차 세계 대회에는 40개 나라 67개 단체에서 파견된 대표 217명이 참가했다.

레닌, 지노비예프, 부하린 등이 참석한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세계 대회

신생 소비에트 러시아 혼자서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독일이 핵심이었다.

제1차세계대전 마지막 몇 개월 동안 혁명이 독일을 휩쓸었다.

[애초에는] 제1차세계대전을 지지했던 독일사민당원들이 갓 만들어진 노동자·병사 평의회를 주도했다.

[사회민주당이 포함된] 신생 좌파 정부는 공화국 수립을 선언하고 군대 폐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노동자 평의회를 없애려고도 했다.

독일에 혁명을 위한 조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계급에 뿌리 내린 혁명적 지도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중적인 개혁주의 조직들의 성장은 코민테른이 다뤄야 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됐다.

국가 기구

개혁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폐지하려면 국가와 의회 같은 자본주의 국가 기구를 재건하고 나서 위로부터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작고한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당원 던컨 핼러스는 코민테른을 다룬 탁월한 글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에 관해 이렇게 설명했다. “입으로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타협적 반대를 말하면서도, 실제 행동은 사실상 당원과 득표를 늘리는 것으로 제한됐다.

“국가 권력, 심지어 사용자들과의 대립도 할 수만 있다면 회피했다.”

유럽에서 반란이 커지자 중간주의 정당들도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대표를 파견했다.

1920년에 레닌이 썼듯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어느 정도 유행이 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개혁주의자들과 논쟁을 회피하지 않고 개혁과 혁명 사이에서 진정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다.

일부 개혁주의자들은 왼쪽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하려 했다. 이들은 급진적 수사를 동원해 자본주의와 화해를 추구하는 자신들의 전략을 감추고자 했다.

논쟁은 직설적이고 격렬했지만 생산적이었다. 코민테른은 [개혁주의자들과의] 차이점을 드러내기 위해 엄격한 가입 규정을 마련했다.

코민테른은 가맹 조직들이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를 채택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는 결정 전까지는 당내 민주주의를 고수하지만 결정 사항을 실행할 때는 행동 통일을 요구한다는 의미였다.

이것은 [결정에] 책임지지 않는 개혁주의 지도자들과 결별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더불어 정치 정당들을 신뢰하지 않는 혁명적 노동조합원들에게 다가가려는 것이기도 했다.

1921년쯤 자본주의는 제1차세계대전 직후의 충격에서 어느 정도 회복되고 있었다. 혁명가들은 새로운 전술을 개발해야 했다.

1922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이렇게 호소했다. “프롤레타리아의 긴급하고 당면한 요구를 위한 공동 투쟁을 벌이고자 한다면, 서로를 갈라 놓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지지를 받는 모든 정당들이 공동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

투쟁을 벌인다는 것에 강조점이 있었다.

개혁주의

혁명가들은 개혁주의와 단절해 왔다. [그래서] 개혁주의 노동자·조직과 협력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언제나 쉬운 일이거나 환영받을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레닌이 말했듯, 혁명가들이 그런 일을 잘하지 못한다면 “자본가 계급의 노동 부관들”에게 노동자들을 내맡기는 일이 될 것이었다.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공산주의자들이 “파업 파괴자 구실을 하는 지도자들과 협상할 태세가 돼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모든 일의 목적은 노동자들을 혁명적 사상과 조직으로 획득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적 정치야말로 노동자들을 이끌 최상의 투사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투쟁 속에서 입증해야 했다. 실질적 요구를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단결의 필요성이 커지고, 노동계급의 자신감은 고양될 것이었다.

‘공동전선’으로 알려지게 된 이 전술은 모든 혁명 정당들이 직면하고 있는 모순에서 출발했다.

혁명 정당은 노동계급 중 소수를 대표했다. 그러나 동시에 다수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다면 노동계급은 권력을 장악할 수 없었다.

그 간극을 메울 방법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혁명 정당은 개혁주의 정당들과 혁명가들이 함께 투쟁할 수 있는 구체적 쟁점을 제시해야 했다.

개혁주의 정당의 기층 노동자들뿐 아니라 그 지도자들에게도 [함께 투쟁할 것을] 호소해야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혁명적 정치 쪽으로 획득하고자 한다면 혁명 정당은 반드시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해야 했다.

이 전술은 1922~1923년 독일 노동운동에 대한 [극우와 파시스트들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1923년, 독일 혁명에 (또한 코민테른에도) 전환점이 찾아왔다. 프랑스 군대가 루르 지방을 점령했으며, 물가는 치솟고 나라는 좌우로 양극화됐다.

국가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다.

독일 공산당은 두 주[작센과 튀링기아]에서 사회민주당과 연립하고 있던 “노동자 정부”가 소위 혁명적 봉기를 벌이도록 밀어붙였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이 소심하게 꼬리를 내리자 공산주의자들도 그들을 따랐다. 대다수 노동자들이 [봉기를] 지지했는데도 말이다.

1924년에 레닌이 사망했다. 혁명이 쇠퇴하면서, 애초에는 코민테른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스탈린이 자신의 영향력을 늘려 나갔다.

미국의 혁명가 제임스 P 캐논은 스탈린의 유혈낭자한 반혁명이 낳은 결과를 서술했다.

그는 “[코민테른에 속한 각국 공산당들이] 혁명 조직에서, 소련의 국경 수비대이자 소련의 외교 정책을 지원하는 압력 단체”로 바뀌었다고 썼다.

1920년대 중반에 러시아의 지도자들은 공산당들을 우파와 연합하는 쪽으로 이끌었다.

중국에서는 중국공산당이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과 연합하게 했는데, 그 방침의 결과로 수많은 공산당원들이 학살당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개혁주의 정당을 ‘사회파시스트’라고 비난하며 개혁주의 정당과 일절 협력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 때문에 독일에서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이는 결코 불가피한 일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스탈린이 지도한 코민테른은] 또다시 갈지자걸음을 걸었다.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계급과 동맹하려 애쓰면서, 각국 공산당들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도록 했다. 곧 프랑스와 스페인 같은 나라들에서 혁명 운동이 가로막히고 결국 패배했다.

초기 코민테른의 실수는 혁명 정당들의 미숙함에서 비롯됐다.

혁명을 이끌긴 했지만 개혁주의 대중 정당에 대한 경험은 거의 없었던 러시아의 혁명가들이 필요 이상으로 코민테른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후에 겪은 재앙은 코민테른이 설립 당시의 원칙을 완전히 저버린 결과였다.

코민테른의 경험은 우리에게 노동계급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계급에 뿌리 내린 혁명 정당이 왜 필요한지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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