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장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파키스탄이 생포한 인도 공군 조종사를 3월 1일에 인도로 송환한 후에도 지상군 포격이 있는 등 충돌이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파키스탄 군인 2명이 사망하고 민간인들이 다쳤다.

러시아 등이 양국 사이를 중재하겠다고 자처했다지만, 복잡한 국제 정세와 오랜 갈등의 역사가 뒤얽혀 있는 분쟁이 쉬이 가라앉지는 않을 듯하다.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는 파키스탄의 여당 파키스탄정의운동당(PTI)이나, 총선을 앞두고 연초에 대규모 저항에 직면했던 인도의 우파 여당 인도국민당(BJP) 중 어느 쪽이든 무모한 행동을 벌여 갈등이 고조될 수도 있다.

이 기사뿐 아니라 본지 277호에 실린 서맨서 애슈먼의 ‘카슈미르 분쟁의 기원’에서도 카슈미르 분쟁의 역사적 배경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인도 공군 비행기 추락 지점을 지키는 파키스탄군 ⓒ출처 파키스탄정의운동당(PTI)

인도·파키스탄 국경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미 너무 많은 분쟁을 겪어야 했던 카슈미르 지역에서 [인도·파키스탄] 양국이 또다시 끔찍한 일을 벌이겠다고 으르렁대고 있다.

2월 26일(현지 시각) 인도 공군은 파키스탄 무장 세력의 “훈련소들”을 폭격했다.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벌어진 인도 경찰 대상 차량 폭탄 공격에 대한 보복 행위였다.

보도에 따르면, 파키스탄 영공에서 인도 전투기 2대가 격추됐다. 인도 공군 조종사 한 명이 파키스탄군에 붙잡힌 장면이 방송에 나오기도 했다. [이 조종사는 3월 1일 인도로 송환됐다.]

이에 대해, 피에 굶주린 인도의 ‘키보드 워리어’들은 ‘#인도는_복수를_원한다’라는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을 올려 추가 폭격을 요구했다. 이에 지지 않고, 파키스탄 우익들도 군대의 고삐를 풀고 공격에 나서게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두 핵보유국들의 충돌은 우리 모두를 겁에 질리게 한다. 동시에 이 오랜 분쟁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서방 언론들은 카슈미르 쟁점을 보도할 때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해묵은 갈등이라고 묘사한다. 아니면 “무슬림 문제”의 또 다른 사례라는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영국 제국주의의 분할·통치 전략을 감안하지 않으면 오늘날의 분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1947년 영국은 [식민 점령했던] 인도에서 철수하면서 이 지역을 힌두교가 주류인 인도와 이슬람이 주류인 파키스탄으로 분할했다. 영국은 이 일로 준자치국가였던 잠무와 카슈미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명확한 상도 없었다. 

카슈미르는 무슬림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힌두계 왕 하리 싱이 통치했다. 많은 이들의 기대와 달리, 싱은 카슈미르를 인도에 편입시켰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건국 직후부터 카슈미르를 두고 영토 분쟁을 벌였다. 1949년 유엔이 중재에 나서서야 두 나라는 휴전했다. 휴전 협정으로 카슈미르는 임의로 그어진 휴전선을 따라 분단돼, 공동체들까지 산산이 쪼개졌다. 그 휴전선이 오늘날 존재하는 양측 경계[‘통제선’]의 근간이 됐다.

파키스탄 군대는 카슈미르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현지 카슈미르인들을 조직해 힌두계 왕에 대항하는 반란에 나서게 하려 했다. 그들의 예상과 달리, 카슈미르의 무슬림들은 인도와 파키스탄 중 어느 쪽에도 속하고 싶지 않아 했다.

카슈미르인들은 급진적 토지개혁 운동을 이끌었던 세속적 사회주의자 셰이크 압둘라에게 지지를 보냈다. 압둘라는 파키스탄이 지주들에 의해 지배받는다고 여겨 [파키스탄 지주들이 토지개혁을 가로막을 것이라 우려해] 파키스탄이 카슈미르를 통치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가 주도하는 정당인 국가협의회는 카슈미르 자치권을 위해 싸웠다.

유엔 평화협정은 카슈미르인들이 직접 미래를 결정할 투표를 하게 될 거라고 약속했다. 당시 인도 총리 자와할랄 네루가 카슈미르의 국민투표 시행을 약속했지만, 이후 어떠한 국민투표도 시행되지 않았다.

카슈미르 분리 독립이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에 이익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키스탄 지배계급은 카슈미르가 독립하면 그들의 권위가 취약해져 신생국 파키스탄이 분열할까 봐 두려워했다. 인도 역시 카슈미르 독립이라는 선례가 남으면 자국 내 여러 지방 세력들이 중앙정부에 귀속돼 있지 않으려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압둘라의 국가협의회는 1951년 카슈미르 선거에서 압승을 거뒀고 압둘라는 총리로 당선했다. 그러나 인도 중앙정부는 그를 취임시키는 대신 감옥에 가뒀다.

그러자 노동자들은 20일 간 총파업을 벌이며 거리 시위를 했다. 인도군은 그들을 향해 발포해 1000여 명을 죽였다.

그 후 불과 10여 년 뒤 카슈미르 위기가 재점화했다. 압둘라는, 인도의 전략적 경쟁국이자 얼마 전 전쟁까지 치렀던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후 또다시 체포됐다.

파키스탄은 이 때를 카슈미르를 침공할 최적의 시기라고 봤다. 이제 카슈미르인들이 인도 국가의 잔혹함에 질려서 파키스탄으로 돌아설 태세가 됐다고 기대한 것이다. 이는 틀린 기대였다. 이들이 기대했던 친(親)파키스탄 봉기는 벌어지지 않았고, 그 대신에 새로운 유엔 협정이 체결됐다.

독립

하지만 압둘라의 국가협의회 또한 교착 상태에 놓여 있었다. 독립을 이룰 수단이 전혀 없었던 지도자들은 점점 부패하고 타협하게 됐다.

그러자 인도 지배계급은 자신감을 얻어, 선출된 지도자들을 번번히 끌어내리고 인도 지배계급에 충성하는 정치인들로 대체했다.

1980년대 후반 카슈미르 독립 운동이 다시 부상했을 때,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시위에 참가해 행진했고, 인도군은 진압 과정에서 시위 참가자들을 100명 넘게 살해했다.

이로 인해 새로 급진화된 청년들이 게릴라전에 뛰어들었다. 일부는 사회주의에 영향 받은 민족주의 단체들에 가입했고, 더 많은 사람들은 파키스탄이 제공한 무기로 더 잘 무장한 무슬림 지하드 단체에 속해 싸웠다.

이제 카슈미르에는 중무장한 인도군, 무장 민병대, 여러 범죄조직들이 넘쳐나고 있다. 카슈미르는 이들이 서로 경쟁자들을 살해하는 지옥으로 전락했고, 평범한 카슈미르인들이 그 지옥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

최근 인도 정부의 수개월에 걸친 유혈 진압으로 수십 명이 죽고 수백 명이 다쳤다. 카슈미르의 정치 위기가 새롭게 시작돼 지방 정부가 붕괴했다.

그리고 이 틈을 타, 인도 중앙정부는 또다시 직접 개입할 태세가 돼 있다.

많은 이들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행보를 주시할 것이고, 그들이 벌이는 끝없는 대학살을 옳게도 규탄할 것이다.

그러나 이 분쟁의 뿌리가 사실은 몰락하던 영국 제국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도 독립을 위해 함께 싸우던 힌두교도와 무슬림을 분열시켜서 스러지는 권력을 부여잡으려고 한 영국 제국의 끔찍한 시도가 오늘날 분쟁의 근본적 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