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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캘리니코스의 특별 발제:
현 시기 서구 혁명가들의 핵심 과제

아래 글은 2018년 7월 10일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국제사회주의 경향(IST)에 속한 각 나라 동지들에게 한 발제를 녹취한 것이다. [  ] 안의 내용은 〈노동자 연대〉 편집팀이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인 것이다. 녹취와 번역을 한 이은혜 동지에게 감사드린다.

‘개혁주의와 관계 맺기’와 ‘혁명 조직 건설하기’를 연결해서 다루겠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조직을 진공 상태에서 건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속 단체의 규모와 영향력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정치 환경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의 정치 환경을 지배하는 요인은 2007~2008년 경제 위기와 이후 계속되는 저성장입니다. 마이클 로버츠가 ‘장기 침체’라고 부른 이것에 더해, 신자유주의적 권력자들이 심각하게 자중지란에 빠져 있다는 것이 현 정세의 핵심적 특징입니다.

현 정세 속에서 불행히도 가장 두드러지게 우리가 직면한 현상은 인종차별적 극우의 부상입니다. 우익 포퓰리스트라고 불리우는 자들과 파시스트 등 다양하고 복잡한 세력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극우의 부상만큼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몹시 중요한 다른 현상도 있는데, 바로 좌파적 개혁주의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방금 좌파적 개혁주의라고 했는데 현 정세를 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습니다[이하에서 설명됨].

사회민주주의 우파가 전체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크리스티네 부흐홀츠[독일 마르크스21 소속 활동가이자 디링케 국회의원]는 독일 여론조사에서 사민당(SPD)의 지지율이 ‘독일을 위한 대안’(AfD) 당과 비슷하다고 말했습니다. 19세기 이래로 ‘사회민주주의의 위대한 기수’라 불리던 독일 사민당이 고약한 인종차별주의 정당과 막상막하라는 것은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AfD는 2013년에야 결성된 반면 SPD는 1875년에 결성됐습니다!) 더 일반화해 말하면, 사회민주주의 우파 정당들은 곳곳에서 커다란 압력을 받고 있고, 일부는 몰락하거나 거의 몰락했습니다. 예컨대, 그리스 사회당(PASOK)이나 프랑스 사회당을 보십시오. ‘제3의 길’에 관한 말이 요란하고 토니 블레어 등의 ‘사회적 자유주의’[집권 기간에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시행한 중도좌파 정당들을 가리키는 말]가 득세하던 시절에 이 정당들이 신자유주의에 굴복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극단적 중도”[파키스탄계 영국인 좌파 운동가 타리크 알리가 주창한 말로, 중도좌파와 중도우파가 기본적으로 똑같은 정책들을 실행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 즉 지배적 신자유주의 정당들이 몰락할 때 함께 가라앉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중도우파 정당들이 중도좌파 정당들보다는 이번 위기를 훨씬 잘 견디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이탈리아 민주당[중도좌파]은 베를루스코니의 정당[포르차 이탈리아: ‘전진하자, 이탈리아’라는 뜻]보다 더 큰 압력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물론 ‘포르차 이탈리아’ 당도 그다지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어떻게든 파산을 면하려고 애쓰는 민주당보다는 처지가 낫습니다.

이처럼 “극단적 중도,” 특히 사회민주주의 우파가 압력을 받고 있는 맥락에서 좌파적 개혁주의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체제에 대한 정치적 반발이 일어나는 큰 그림의 왼쪽 버전입니다. 그런 사례로는 [그리스] 시리자, [스페인] 포데모스, [독일] 디링케, [아일랜드] 신페인, [프랑스 멜랑숑의] ‘불굴의 프랑스’, 제러미 코빈이 이끄는 영국 노동당(실로 기이하게도 말입니다)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좌파적 개혁주의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점을 봐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들의 계급적 뿌리는 과거 고전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나 스탈린주의 정당들보다 훨씬 얕은 것 같습니다. 과거에 그 정당들은 조직 노동계급의 대부분 또는 상당 부분을 기반으로 삼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 더욱이 [위에서 좌파적 개혁주의 세력으로 분류한] 정치 세력들이 좌파적 개혁주의로 반드시 오래 머무르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예컨대] 몇 년 전에만 해도 모두가 칭송해 마지않았던 시리자는 ― 당시에 스타티스 쿠벨라키스 등이 “우리는 반자본주의 정당이고 개혁주의 정당이 아니”라고 강변했었는데요 ― 좌파적 사민주의 정당에서 우파적 사민주의 정당으로 바뀌어, 트로이카[유럽연합 집행기관과 유럽 중앙은행,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을 가리키는 용어]가 요구하는 긴축 정책을 집행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 정치 세력은 일종의 다리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기존의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과, 사람들이 혁명적 대안을 택할 만큼 자신감이 높지는 못한 상태 사이에 간격이 있는데, 좌파적 개혁주의 정치 세력들이 이 간격을 잇는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좌파적 개혁주의의 깃발로 상당히 이질적인 사회 세력들이 한데 모이는 일이 종종 벌어집니다. 예컨대 영국 [노동당 대표] 제러미 코빈을 보면, 그는 노동조합 관료층의 매우 탄탄한 지지를 받는 동시에, 수많은 청년들을 ‘모멘텀’[노동당 내 코빈 지지 그룹] 등을 통해 노동당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정치 방식 등에서 전혀 다른 사람들을 동시에 끌어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종차별적 극우에 맞서 공동전선을 구축하려 할 때 바로 이들 좌파적 개혁주의 세력과 함께 구축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주장을 덧붙여야겠습니다. 우파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가볍게 일축해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중요한 세력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에서 사민당(SPÖ)과 노조 관료들이 신생 극우 정부에 맞서 [2018년 1월] 대규모 시위를 건설한 것은 이 점을 선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오스트리아 사민당과 노조는 불과 몇 달 전에만 해도 (현 정부를 주도하는 중도우파 정당) 국민당(ÖVP)과 연정을 꾸렸던 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올해[2018년] 1월에는 조직 노동계급이 새 정부의 공격에 저항하도록 이끄는 구실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처럼, 오랫동안 오스트리아를 지배한, 심지어 독일에서는 여전히 지배적인 대연정의 정치에 균열을 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혁명가들에게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좌파 일각에서 “저런 인종차별적이고 우파적인 사민주의자들과는 절대로 공동전선에 함께할 수 없어, 저들은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집행했고 온갖 나쁜 짓을 했어” 하고 말하는 사람들과 아주 단호하게 논쟁해야 합니다. 트로츠키는 1930년대 초 독일에서 혁명가들이 사회민주당과 공동전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불과 10여 년 전에 자유군단과 동맹을 맺었던 사회민주당과 말입니다. 자유군단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립크네히트를 살해한 불법 무장단체였고 장차 나치로 성장하는 세력입니다.

이처럼, 정치 세력들에 관해 말할 때는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많은 경우, 혁명적 좌파는 너무 작아서 개혁주의 정당과 단체 대 단체로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우리가 제대로 활동한다면, 극우에 맞선 투쟁의 파트너로 삼을 특정 국회의원이나 특정 노조 지도자 또는 대형 좌파개혁주의 단체 내 특정 그룹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혁명가들이 “막노동꾼 이웃” 노릇이나 하는 함정에 빠질 위험을 경계해야 합니다. “막노동꾼 이웃”은 1920년대 중엽 중국의 한 냉소적인 논평가가 한 말인데, “[중국] 공산당의 구실은 막노동꾼 이웃, 즉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당[국민당]을 위해 미숙련 육체 노동자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몇 년 후 국민당은 ‘그동안 무척 고마웠어’ 하며 공산당원들을 학살했습니다. 개혁주의자들은 혁명가들을 ‘써먹기 딱 좋은 아주 능동적인 조직가’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공동전선이 투쟁의 장이라는 것을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공동전선을 점차 건설하는 과정에서 부르주아지나 우익, 파시스트 등의 적에 맞서는 투쟁을 수행하면서도, 공동전선 내부에서 정치적 영향력과 혁명적 조직의 세력을 키우려고 투쟁해야 합니다.

이 점을 얘기하면서 혁명적 조직 건설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혁명적 조직 자체가 무슨 신주단지라서 우리가 그것을 건설하려 하고, 신문을 팔고 하는 갖가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개혁주의 정치가 불량하기 때문입니다. 좌파적 개혁주의도 예외가 아닙니다. 물론 사회민주주의 우파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혁명적 조직을 건설하는 이유는 지난 200년의 역사적 경험 때문입니다. 그 경험은 개혁주의자들이 제아무리 급진적 변화를 추구하더라도 체제 안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고, 사회를 변화시킬 방법은 아래로부터의 혁명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영국에서 이 점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코빈이 대표가 된 이래로 급진적 개인들과 그룹들이 노동당으로 그야말로 엄청나게 밀려들고 있습니다. 과거 SWP(사회주의노동자당) 당원이었던 사람들이나 갖가지 옛 혁명가들뿐 아니라 정치적 경험이 거의 또는 전혀 없는 사람들, 또는 20대들이 코빈 또는 코빈이 이끄는 정부가 진정한 변화를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하고 노동당에 입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코빈은 중도로 이동해야 한다는 압력을 아주 강하게 받고 있습니다. 그런 압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는데, 그래야 선거에 유리하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테리사 메이[보수당 소속 총리]가 이끄는 현 정부가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합니다. 지금도 내각 내 브렉시트주의자들이 공공연하게 반기를 드는 마당에 메이가 중요한 하원 표결에서 이기지 못하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그러면 [조기]총선이 치러질 것입니다. 최근의 정당 지지율을 살펴봤더니, 노동당이 보수당을 살짝 앞서고 있습니다. 실로 여러 해 만의 일이고 바람직한 변화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코빈이 집권에 가까워질수록 그에게 가해지는 압력도 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코빈의 최측근이자 예비 재무장관인 존 맥도넬은 코빈보다도 더 강한 마르크스주의적 좌파 배경을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시티[런던의 금융가]를 안심시키고 그들과 화해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단지 선거에서 이겨야 한다는 압력뿐 아니라, 강력한 권력을 가진 자본가들과 정면으로 부딪히며 정부를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후퇴는 단지 경제 정책에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코빈이 자유왕래 문제[브렉시트 이후에도 유럽연합 출신 이주민들이 영국에서 안정적으로 체류하고 오가는 문제를 말함]에서 후퇴한 것이나, 인종차별 문제에 관해 비교적 말을 아끼는 것 등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SWP는 코빈·맥도넬과 함께하면서도 맞선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사용자들에게 맞설 때, 보수당에 맞설 때, 노동당 우파에 맞설 때 SWP는 코빈·맥도넬과 함께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일관된 입장을 취하지 않는 인종차별 문제나, 시티와 타협하는 문제에서는 그들에게 맞서고 있습니다.

이론의 중요성 잊지 않기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혁명적 단체들이 처한 환경은 제각각입니다. 일부 동지들은 개별적으로는 국제사회주의 정치를 지지하지만 소속 조직은 국제사회주의 경향이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혁명적 조직 건설 문제를 놓고 공유할 수 있거나 공유해야 하는 기본 원칙들이 있을까요? 저는 그렇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분명 우리가 공유해야 할 기본 원칙들이 있는데 지금부터는 그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론의 중요성입니다. 여기서 이론을 강조하는 것은 무슨 학술적 명망 따위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 명료함의 원천으로서 이론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며칠 동안 우리가 했던 토론만 돌아봐도 이론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동에 관한 훌륭한 토론의 핵심은 ‘제국주의를 어떻게 볼 것이냐’였습니다. 제국주의를 단지 ‘미국의 세계 지배’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강대국들 사이의 구조적 경쟁으로 보는 것, 또한 ‘아(亞: 속성이 덜하거나 부산물이라는 뜻)제국주의’ 국가들을 이 경쟁적 ‘사슬’의 ‘고리’들로 이해하는 것이 핵심 문제였습니다.

오늘날 좌파들 사이에서 문제를 낳는 것 하나가 바로 진영 논리입니다. 러시아 같은 ‘좋은 제국주의’가 있고 미국 같은 ‘나쁜 제국주의’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일부 좌파는 러시아가 세력이 너무 작아서 진정한 제국주의 세력이 못 된다고 말합니다. 글쎄요, 체첸인들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요? 이처럼 ‘좋은 제국주의’가 있다는 생각은 꽤 많은 좌파에 퍼져 있고, 그 영향력은 최근 커졌습니다. 이는 단지 스탈린주의 전통의 잔재 때문만은 아닙니다. 한때 국제사회주의 경향이었고 SWP 출신인 인물들[가령 린지 저먼과 존 리즈를 들 수 있다]도 사실상 진영 논리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넘어갔습니다.

진영 논리 문제는 국가자본주의 이론이 중요하다는 것으로도 이어집니다. 국가자본주의론은 우리가 광을 내어 캐비넷 한편에 전시하는 아름다운 골동품 같은 것이 아닙니다. 실천을 돕는 수단입니다. 국가자본주의론은 예컨대 소련 시대의 러시아 제국주의와 오늘날 푸틴이 통치하는 러시아의 제국주의 사이의 연결을 설명해 줍니다. 국가자본주의론은 지금도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이론입니다.

정치적 이슬람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도 제기됐습니다. 우리 전통의 유산 가운데는 정치적 이슬람주의에 대한 크리스 하먼의 선구적 분석인 〈예언자와 프롤레타리아〉[국역 《이슬람주의, 계급, 혁명》]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더없이 현안인 쟁점입니다. 마르크스주의적 좌파들 중에는 아사드[시리아 대통령] 같은 군부 독재자들과 이슬람 원리주의를 ‘똑같은 악’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이 한때 국제사회주의 경향이었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칩니다. 미국 국제사회주의조직(ISO)이 자기 정간물 최근 호에 실은 번역 기사는 정치적 이슬람주의에 대한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분석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이슬람 원리주의는 각종 억압 기구를 거느린 국가만큼이나 나쁘고 위협적”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정치적 이슬람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몹시 중요한 현 시기에 명료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서 심각하게 후퇴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별을 둘러싼 각종 논쟁들도 엄청나게 재현되고 있습니다. 페미니즘이 새로운 형태들로 나타나고,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같은 인종차별 반대 운동을 놓고 흑인 문제를 둘러싼 정치도 여럿 등장하고 있습니다. 트랜스젠더 천대처럼 새롭게 제기되는 차별 쟁점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우리는 매우 과감하게 혁신을 이룰 태세가 돼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이 트랜스젠더 차별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분석하는 논문을 한 편도 아닌 두 편이나 실은 것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첫째 글은 몇 년 전 로라 마일스[국역: 《트랜스젠더 차별과 해방》 중 ‘트랜스젠더 차별과 저항’]가 썼고, 더 최근에는 수 콜드웰이 썼는데, 수 콜드웰의 논문[국역: 《마르크스21》 24호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트랜스젠더 정치’]은 지금 벌어지는 논쟁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트랜스젠더 차별은 실재하지 않고 트랜스 여성은 여성이 아니다’ 하고 주장합니다. 이 문제를 놓고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토니 클리프에게서 답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우리 자신이 생각하고 답을 내놓아야 하는 문제들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논쟁들의 일부, 특히 여성 차별에 관한 논쟁들은 1970~1980년대에 매우 첨예하게 벌어졌던 논쟁이 재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같은 논쟁들이 최상의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더 후퇴한 형태로 재포장돼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회 재생산 이론’의 경우가 그런 사례입니다. 그 이론은 앞선 세대들의 결과물(크리스 하먼과 SWP 당원 시절의 린지 저먼의 작업도 포함)을 기초로 삼으면서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페미니즘 측의 낡고 잘못된 비판을 다시금 꺼내 듭니다. 예컨대, 마르크스는 가족에 무관심했다거나 재생산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등의 주장입니다. 우리는 차별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갈고 닦아야 하지만 과거의 성과들을 내다버리지 않으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신문을 통한 조직과 신입회원 모집

혁명적 조직을 건설하는 데서 [이론의 중요성에 이어] 두 가지 영역을 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제가 둘째로 강조하고 싶은 겁니다. 조직을 건설하는 데에는 자체적인 정치적 일상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매주 여는 정치적 모임, 정기적으로 간행물을 발행하고 판매하는 것, 연례 맑시즘 포럼처럼 더 폭넓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특별 행사를 개최하는 것 등등. 이것들은 영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도 중요합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아일랜드 동지들이 단체명을 사회주의노동자당(SWP)에서 사회주의노동자네트워크(SWN)로 바꾼 것에 대해 잠깐 얘기하고 싶습니다. 두 가지만 말하고 싶은데요. 우선, 이런 조처가 청산주의로 빠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 완전히 틀렸다는 것입니다. [스페인 동지들인] 엔루차가 조직을 청산하기로 한 것과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명백한 차이가 있습니다. 엔루차는 정말로 조직을 청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해산한다. 무언가 새로운 조직이 등장할 것이다” 하고 말했지만 아무것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단체명을 바꾸기로 한 아일랜드 동지들의 결정은 스페인 동지들 같은 청산주의가 아니라, 긴축 반대 좌파연합체 건설에 강조점을 둔다는 목적을 위해 선택한 것입니다. 아일랜드 동지들과 대화를 나눠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이 긴축 반대 좌파연합체 건설이나 낙태권 국민투표 승리 등에서 얻은 자신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일랜드 동지들의 결정에 대해]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신문 발행을 포기한 것은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요즘 환경에서 신문을 발행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커뮤니케이션의 재편이 이뤄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간행물 발간에 따르는 어려움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기간행물을 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기간행물은 혁명가들에게 훈련을 강제하는데, 주요 현안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무엇인지 설명하도록 떠민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주요 현안은 좌파들 사이의 쟁점뿐 아니라 뉴스에 실리는 시사 현안들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정기간행물은 이런 쟁점들을 놓고 입장을 취하도록 하는 훈련을 강제합니다. 간행물을 발행하고 판매하는 것은 개별 조직 단위, 개별 지회들이 하나의 조직으로서 활동하도록 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점에서 저는 이 점이 가장 근본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신이 주변 지인들에게 정기적으로 신문을 판매한다면 그 결과로 당신은, 아직 가입하지는 않고 있지만 우리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과 체계적으로 대화할 수단을 갖게 됩니다. 그들은 우리가 조직하는 일부 행동에 참여할 수 있고, 나중에는 가입을 하고, 또 그 자신이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조직을 더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아일랜드 동지들의 선택이 청산주의라고 보지는 않습니다만, 인쇄 간행물 발행을 포기한 것은 실수라고 봅니다.

제가 [혁명적 조직 건설을 위한 기본 원칙으로]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신입회원 모집입니다. 우리가 새 사람들을 우리 조직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조직의 ‘건설’이라는 말은 별 의미를 못 가질 것입니다. 신입회원 모집은 우리의 정치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향력을 키우고자 한다면 새 사람들이 필요하고 새 활동가들이 우리 단체로 통합돼야 합니다.

때때로 신입회원 모집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 코빈 열광은 SWP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리 당원들이 노동당으로 이탈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제가 알기론 아주 소수만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다른 때였다면 SWP에 가입했을 사람들이 지금은 아주 공손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SWP를 아주 좋아해요, 활동도 함께 하고 싶어요, 〈소셜리스트 워커〉 신문도 좋아하고, 맑시즘 행사에도 참가해요. 하지만 저는 코빈에게 한 번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기회가 흔치는 않잖아요? 노동당을 통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한 번 지켜보고 싶어요.” 이는 우리의 신입당원 모집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이렇게 좌파 안에서 복잡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더라도 우리는 집요하게 새 사람들을 가입시키려 해야 하고, 기회를 잡으려 해야 합니다. 다수의 이해관계를 놓고 사람들과 토론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은 매우 중요합니다. 당장 그들을 설득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의 주장이 그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가 이후 국면에서 되살아나 그들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인종차별적 우익에 맞서는 공동 활동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함

저마다 정치 환경이 다르지만, 적어도 유럽 수준에서는, 인종차별과 우익에 맞선 공동전선과 광범한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는 과제로 모두 수렴되는 듯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제가 노트에는 “역사적 과제”라고 써 놓았지만 이렇게 말하려니 허세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그 대신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합시다. 저 인종차별적 쓰레기들에 맞서는 것은 우리와 더 광범한 운동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만, SWP의 활동 경험에서 보듯, 인종차별 반대 활동을 통해 사람들을 혁명적 정치 쪽으로 설득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광범한 운동을 건설하고,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집회에 사람들을 동원하고, 시위를 조직하는 것, 그러면서도 그 활동 속에서 사람들을 우리 단체들로 가입시키려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오늘날 매우 위험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지만, 우리에겐 그 위기의 대안이 있고, 그에 대응할 전략이 있으며, 독자적 조직과 경향으로서 성장할 전략도 있습니다.

한 동지가 “서구에서는 여러 단체들의 지향점이 수렴한다”고 말했는데,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 수렴점은 인종차별적 우익의 부상에 맞서 되도록 광범하면서도 투쟁적인 대중을 결집시키는 공동전선 건설을 실천적으로 지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기획한 것이라기보다는 역사가 우리 앞에 던져놓은 과제에 가깝습니다.

2000년대 초에도 우리는 반자본주의·반전 운동을 건설하는 방향으로 각 자매단체의 활동이 수렴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오늘날만큼 공통점이 크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비슷한 활동을 한다는 것뿐 아니라 그 비슷한 활동을 위해 서로 조율도 하고 있습니다.

방향 전환이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한 독일 동지가 이런 지적을 했습니다. “단체의 많은 동지들이 온갖 활동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모종의 파편화에 시달린다.” 제가 속한 SWP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종차별 반대 운동 건설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고 당원들을 설득하는 과정은 흡사 전투와도 같았습니다. 일부는 정치적 이견 때문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더 많은 경우는 기존에 하던 활동들(노조, 각종 운동, 지회의 일상)을 정말 잘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큰 그림을 보라고 설득해야 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이론의 중요성은 이데올로기의 명료함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단지 실천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데올로기가 명료해야 한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할 때마다 번번이 우리에게는 기존 관성이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관성은 바로 2000년대 초 운동에 참여했을 때 생긴 것입니다. 당시에 운동이 엄청나게 부상해 좌파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고,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각 자매단체들은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선거에서도 전보다 청중이 훨씬 많아졌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지적 관심도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일단 운동이 후퇴하자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운동은 분열·분화했고, 꽤 심각한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저는 2012~2013년 SWP가 겪은 위기도 (물론 당시 쟁점 자체의 고유한 원인과 동학도 있지만) 이런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을 겪고] 최근 몇 년간 해가 거듭될수록 제게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지적 관심이 되살아나는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하는 데서 생겨나는 중요한 차이점들이 간과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흐름이 있습니다. 데이비드 하비가 가장 저명한 대변자입니다. 이 흐름은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관계에 관한 각종 논쟁들, 특히 사회재생산 이론으로 여성차별을 설명하려는 시도들과 특히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한때 국제사회주의 경향이었던 미국 동지들이 지금 이런 흐름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는데, 티티 바타차리야라는 여성은 영국을 자주 방문할 뿐 아니라 독일의 연례 맑시즘 포럼에서도 발제를 한 바 있습니다.

이런 경향 사람들의 공통된 주장은 바로 “마르크스주의는 전통적으로 생산 과정에 지나치게 치중했다”는 것입니다. 하비는 자본주의에서 생산뿐 아니라 순환도 중요하다는 주장을 펴는 데 상당한 공을 들여 왔고, 이를 위해 꽤 멋진 파워포인트도 제시합니다. 그런데 그의 결론은 계급투쟁을 과거와 다르게 봐야 한다는 것, 즉 계급투쟁을 직장에서뿐 아니라 직장 바깥에서도 벌어지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이 주장이 틀리지 않습니다. 영국에서도 가장 큰 계급투쟁 중 몇몇은 노동자들의 직장 바깥에서 벌어졌습니다. 예컨대 주민세 반대 투쟁(1990년)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이런 시도가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직장에 기반한 계급투쟁 수준이 너무 미약한 불운한 현실에 순응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사실상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계급투쟁 수위가 낮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투쟁은 계속되고 있고, 지금 우리가 하는 활동들로도 자본주의를 타도할 운동을 충분히 건설할 수 있어.”

그러나 저는 사람들에게 더 강력하게 주장해야 한다고 봅니다. 즉, 우리가 20세기에 봤듯이, 대중 파업 속에서 노동자 평의회가 등장하고 노동자 투쟁이 더 강화되는 등의 패턴, 바로 그런 패턴 속에서 진정한 혁명적 돌파구가 열릴 수 있다는 주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주장이고, 우리 자매단체들 안에서도 저마다 다르게 제시되곤 합니다. 예컨대 독일 동지가 젊은 당원과 연륜 있는 당원들 사이에 모종의 구분선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독일 맑시즘 포럼에서 연설하면서 그 점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독일 맑시즘 행사에서 저는 오늘날에도 마르크스의 사상과 《자본론》이 유효하다는 등의 내용으로 발제했는데, 제 발제가 끝나자 마르크스21의 한 여성 동지가 청중석에서 저를 지지하며 사회재생산 이론을 주장한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사슬은 그것이 벼려진 곳에서 끊어져야 한다”

이런 주장들을 대할 때 우리는 매우 세심해야 합니다. 만약 “그런 주장은 개혁주의적 헛소리이고, 사회재생산론자들은 엥겔스의 기여를 인정하지 않고 …” 등등 식으로 말한다면, 그런 젊은 동지들을 내쫓는 결과밖에 낳지 못할 것입니다. 그 동지들은 사회재생산론이 페미니즘의 현대적 버전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부활시킨 것이라 보고 있으니만큼 그런 [일축하는] 태도로는 그들을 설득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게는 사회재생산 이론과 타협할 수 없는 지점이 있고, 젊은 동지들을 그 지점으로까지 데리고갈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티티 바타차리야를 만나면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주장, 즉 ‘자본주의의 사슬은 그것이 벼려진 곳에서 끊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말해, 노동자들이 착취당함과 동시에 체제를 집단적으로 박살낼 힘을 갖게 되는 곳은 바로 생산 과정이라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이 주장을 부정한다면, 당신이 아무리 노동계급 중심성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결국 알맹이 없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이 주장은 우리가 핵심으로 삼아야 하는 주장인 동시에 우리가 적절한 방식으로 개진할 수 있어야 하는 주장입니다.

이 사례는 하나의 사례이지만 동시에 중요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직면한 시기는 방향 상실과 분산의 압력이 큰 것이 특징이고 그럴수록 우리 자신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재무장하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보수적인 방식으로 하자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방식으로(가령 트랜스젠더 쟁점에서 SWP 동지들이 했던 것처럼) 해야 합니다. 효과적으로 개입하도록 길을 열어 주면서도 우리의 원칙을 놓치지 않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제가 강조하고 싶은 핵심 주장입니다. 우리가 외향을 하려면 이데올로기의 명료함을 갖춰야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온갖 구체적인 문제들이 뒤따르고 더 큰 관점을 이용해 그런 문제들을 다뤄야 할 것입니다.

전통의 계승과 창의성

이 대목에서 저는 또다시 아일랜드 동지들의 활동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윤보다 인간을’[아일랜드 좌파연합]은 영국 SWP가 10여 년 전에 리스펙트(RESPECT)를 통해 이루려 했던 것을 성공적으로 이룬 것이라고 봅니다. 즉, 정치적으로는 모호하지만 더 광범한 조직, 혁명적 성격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체제의 위기와 개혁주의적 염원을 이용하고 선거에서도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는 것 말입니다. SWP는 실패했지만 아일랜드 동지들은 성공했고, 진정한 돌파구를 열었습니다. 진정 잘되길 바랍니다.

어떤 종류의 좌파 조직이 적합한지를 놓고 더 논쟁을 벌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나라마다 다를 테고, 제가 앞서 얘기한 것보다는 일반화하기가 훨씬 더 어려울 것입니다. 아무튼 저는 ‘이윤보다 인간을’ 프로젝트에는 아무런 이견이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다른 문제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런[‘이윤보다 인간을’]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둘수록 그 안에서 혁명적 핵심이 조직적이고 강력하고 활발하고 자신감 넘치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해진다는 점 말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아일랜드 동지들이 종이 신문 발행을 포기한 것이 적절치 않다고 보는 겁니다. SNS가 중요하다는 것에는 아무런 이견이 없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SNS를 활용해야 합니다. 오늘 저는 이 토론을 통해 인스타그램도 해야 한다는 것을 새로 배웠습니다. SNS 활용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21세기에 정치적으로 생존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이는 ABC에 해당하는 말이고, 전혀 쟁점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과연 종이 신문 없이 다른 일들을 모두 해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동지들은 새로운 것에는 리스크가 따른다고 하셨는데, 저는 우리 혁명가들이 새로운 것에 따른 리스크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가 토니 클리프한테서 배운 것 하나는 진지한 혁명가들은 리스크를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SWP의 역사는 온갖 리스크를 감수하며 새로운 분석과 시도를 하는 과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부는 결과가 안 좋기도 했지만, 중요한 것은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과거에 저지른 실수 때문에 새로운 시도를 앞에 놓아 두고 겁먹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동시에, 클리프가 레닌의 《좌파적 공산주의 ― 유치증》에서 종종 인용한 말은 혁명가들이 자신들의 실수에서 배우고 이를 재빨리 교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경향이 과거에 저지른 실수, 특히 2000년대 초 운동에 관여했을 때 저지른 실수는 우리가 일상 활동을 내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영국 SWP는 여러 방식으로 그런 실수를 저질렀고, [그 결과] 지회와 조직 활동이 약화됐습니다.

프랑스 동지들의 경험담도 훌륭했습니다. 이런저런 실천 활동에서 경험을 쌓고 있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 말했듯, 그들은 한때 해체됐던 조직을 재건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왜 해체됐었습니까? 저는 그들이 정기간행물 발간을 중단한 것, 정기간행물 발간이 강제하는 정치적 훈련이 사라진 것이 핵심적 이유였다고 봅니다. 따라서 저는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을 지지하지만, 동시에 다른 동지들이 이미 범했던 실수를 피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토론이 매우 건설적이었다고 보는데, 우리들이 실천을 상당히 공유하고 있는 덕분에 방향성을 공유하고 건설적 논쟁을 벌일 큰 틀이 마련돼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