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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실패 이후:
트럼프는 대북 강경파한테 끌려 다니고 있는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은 기본적 쟁점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 ⓒ출처 백악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기 5일 전인 2월 22일, 스페인에서 스파이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스페인 주재 북한 대사관에 괴한 10명이 침입해 직원들을 구타하고 심문했다. 그리고 컴퓨터들을 훔쳐 달아났다. 금전을 노린 범죄가 아니었다. 범인들은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고 사라졌다.

최근 이 사건의 진실이 조금 드러났다. 3월 13일 스페인 최대 일간지 〈엘 파이스〉는 현지 경찰과 정보기관 소식통을 인용해 사건 배후에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북·미 정상회담을 코앞에 둔 시점에 CIA는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 김혁철 북한 국무위원회 대미특별대표는 2017년까지 스페인 주재 북한 대사였다. 그는 올해 1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미국 국무장관 폼페이오의 평양 회동에 동석할 만큼 북한의 대미 외교에서 비중이 큰 인사다. 아마 CIA는 김혁철에 관한 정보를 노렸을 것이다.

트럼프는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 “김정은을 신뢰한다” 하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벌어진 스파이 게임을 보면, 이런 말은 그저 속 빈 강정에 불과했다. 또한 미국이 스페인에서 강도 짓을 벌였을 만큼, 정상회담 직전까지 북·미 협상은 순조롭지 못했던 것이다.

스페인 주재 북한 대사관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실패한 후 북·미 협상이 재개될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 정부는 백악관 안보보좌관 존 볼턴을 앞세워 북한을 향해 “선 비핵화”를 압박할 뿐이다.

북한은 정상회담 실패에 실망하며 미국의 압박에 반발하고 있다. 3월 15일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은 평양에서 “미국의 강도 같은 태도가 상황을 위기에 빠뜨렸다”며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 중단을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는 북한의 반발을 일축했다. 폼페이오는 여전히 북한의 “검증된 비핵화”가 선행돼야 한다며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정상회담 합의 실패 이후 북·미 양측이 내놓는 말을 정리해 보면, 양측은 기본적인 문제에서 이견을 전혀 좁히지 못하고 있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밝혔듯이, 양측은 “거래 계산법”부터 달랐다.

첫째, 비핵화의 정의가 달랐다. 볼턴이 밝힌 바에 따르면, 미국 협상팀은 하노이에서 북한 협상팀에 ‘빅딜’ 문서를 건넸다. 그 문서에서 미국은 핵무기, 탄도미사일, 생화학무기 폐기까지 북한에 요구했다. 즉, 트럼프 정부는 “(광범한) 비핵화”를 “모든 대량살상무기 폐기”라고 규정했다.

미국은 대북 제재 해제와 북·미 관계 정상화 전에 북한에게 무장 해제부터 하라고 촉구한다. 북한이 수용할 수 없는 요구다. 북한은 미국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숱하게 약속을 위반하고 합의를 엎었음을 기억한다.

둘째, 북·미가 생각하는 제재 해제(완화)의 기준과 순서가 달랐다.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측은 북한의 비핵화(대량살상무기와 그 관련 시설 폐기·동결)가 이뤄진 후에 제재가 해제된다는 기본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김정은 측은 2016년 이후 추가된 유엔 대북 제재는 당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시험에 관한 제재이므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중단하면 해제돼야 한다고 봤다. 북한은 2016년 이후에 가해진 유엔 대북 제재에서 민생 관련 부분만은 꼭 해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 제재 조항들이 북한 경제에 주는 부담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지난해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합의 당시, 본지가 지적한 쟁점들이 해결되지 않았음이 이번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드러났다. 즉, 비핵화의 정의, 비핵화와 미국의 상응 조치 사이의 순서 말이다. 그리고 이 문제들은 이미 25년이 넘는 북핵 협상에서 늘 쟁점이 됐던 것들이다. “영변 외 핵시설”을 문제 삼아 미국이 협상을 뒤집는 모습도 과거에 여러 차례 봐 왔다.

코언 청문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트럼프 정부가 하노이 정상회담을 엎어 버린 게 코언(트럼프의 개인 변호사) 청문회 같은 국내 정치 문제 때문이라고 여긴다. 또는 볼턴 같은 대북 강경파들에게 끌려다녀서 그렇다고 본다.

물론 미국 국내 정치 상황이 트럼프의 외교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볼턴 같은 자가 얼마나 위험한 호전광인지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볼턴이 아니라 폼페이오가 정상회담 결렬을 적극 밀어붙였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는 등 트럼프 정부 전체가 대북 강경 입장을 고수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트럼프 본인을 비롯해 트럼프 정부의 고위 인사들은 나름으로 일관된 대북 관여 정책을 고수해 왔다. ‘트럼프 대 대북 강경파(또는 심층 국가)’ 식의 프레임은 ‘트럼프는 적어도 대북 정책에서는 다르다’는 희망적 사고의 반영이다.

다른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과연 트럼프 (정부)는 대북 화해에 진지한가? 미국은 자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관철하는 수단으로 북한 ‘위협’을 과장하고 이용해 왔다. 그러다가 상황 관리 등의 이유로 북한과의 대화를 적절히 병행하곤 했다.

트럼프 정부가 미국의 전임 정부들과 전혀 다른 대북 정책을 추구하고 있는 것일까? 혹자는 그래도 트럼프는 정상회담을 했다고 얘기할지 모르지만, 1994년에 북한을 폭격할지 검토했던 민주당 클린턴 정부도 2000년에는 북·미 정상회담 성사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결국 트럼프도 미국 제국주의의 이해관계를 나름의 방식으로 수호하려는 인격적 화신이다. 그는 김정은과 회담을 하면서 동시에 제국주의 간 경쟁이라는 국제 정세를 최우선으로 고려해 왔을 것이다.

이 점은 한국 정부가 중재자로 다시 나선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음을 가리킨다. 미국조차 제국주의 간 경쟁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없는데, 한국은 더더욱 그럴 테니 말이다. 게다가 최선희 부상이 냉소적으로 말했듯이, 한국은 결국 북·미 간의 (공정한) “중재자”라기보다 미국의 동맹국인 “플레이어”다.

정상회담이 실패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북·미 양측은 협상 테이블 자체를 엎겠다고 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각자 국내에서 협상 회의론이 커지는 상황을 맞고 있다.

교착 상태가 장기화하거나 미국이 추가 제재에 나서는 상황 변화가 일어난다면, 북한이 진짜 “새로운 길”(핵개발과 로켓 발사 재개)에 나설지 모른다.

따라서 한국의 노동계급과 대중에게는 정부 당국 간 협상에 기대하는 것이 아닌 진짜 “새로운 길”이 필요하다. 아래로부터의 반제국주의 평화 운동 건설 말이다. 미국 제국주의가 베네수엘라에서 하는 정권 교체 시도에 반대하는 국제 연대도 그 일의 하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