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명 넘는 가임기 여성 노동자들이 난임, 불임, 조산, 유산, 선천성 기형아 출산 등을 유발하는 물질(이하 생식독성 물질)을 취급하고 있다는 정부 보고서가 공개됐다.(‘자녀 건강손상에 대한 산재보상 방안’, 고용노동부)

이 보고서를 보면, 출산 계획을 갖고 있는 40세 이하 여성 노동자 10명 중 1명이 포름알데히드, 황산 등 생식독성 물질에 노출돼 있다(104만여 명 중 10만 6000여 명). 이 중 4000여 명은 생식독성 물질 중에서도 납 등 가장 위험한 1A 등급 물질을 다루고 있다.

업종별로는 보건·사회복지업이 6만 7000여 명, 전자관·반도체 제조업이 2만 8000여 명으로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특히 후자의 경우 해당 물질을 취급하는 사업장에서 일하는 모든 여성 노동자 5명 중 1명 이상(22.5퍼센트)이 생식독성 물질에 노출돼 있어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을 보였다.

보고서는 여러 추정치를 계산해서, 생식독성 노출 집단에서 해마다 170명의 선천성 기형아가 태어나고 이 중 생식독성이 ‘직접적’ 원인이 된 경우는 42명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마저도 최소치다. 보고서가 스스로 지적하듯, 생식독성 요인에는 유해 화학 물질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방사선이나 고열 등 물리적 요인도 있고, 장시간 노동, 교대제, 서서 오래 일하기, 무거운 것 들기 등도 임신 능력 또는 임신 중인 노동자나 태아의 상태에 심각한 악영향을 준다. 이런 요인들까지 종합하면 피해를 입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제주의료원 노동자, 산재 투쟁 중

유산 비율이 2006년 18.7퍼센트에서 2015년 24.5퍼센트로 증가했다는 보고도 있다(김영택 등, 2016). 선천성 기형아 출산은 2008~2014년 사이 67퍼센트가 늘었다(임종한 등, 2018). 선천성 기형아 출산과 연관 있는 미숙아 출산도 2007~2016년 사이 1.4배 증가했다(통계청, 2017).

이 중 적잖은 부분이 생식건강에 악영향을 끼치는 생식독성, 노동 조건 때문일 수 있다. 작업장에서 취급하는 화학 물질도 늘고 있는데, 현재 취급되는 4만여 종 중 산업안전보건법이 노출 기준을 규정하고 있는 물질은 700여 종에 불과하다. 이 중에서 의무적으로 측정해야 하는 물질은 200여 종뿐이다. 

그런데도 지난 7년간 생식독성에 의한 질환으로 산재 신청을 한 여성 노동자는 고작 8명에 불과하다. 모두 공공병원인 제주의료원 노동자들이다.

2009년 제주의료원에서 임신한 노동자 15명 중 12명에게 유산 위험이 나타났고 실제로 이 중 5명이 유산했다. 4명은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자녀를 출산했다. 노동자들은 임신한 이후에도 하루 평균 9시간씩 일했고, 휴식 시간도 거의 없어서 10분 만에 “밥을 입에 쓸어 넣”고는 병원 복도를 뛰어다녀야 했다.

항암제나 면역억제제 등 알약 수백 정을 매일 빻는 과정에서 가루를 흡입한 것도 중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됐다. 하지만 병원에서 아무도 그 약물이 임신과 태아에 해롭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지만 자기 몸이 병드는지도 몰랐다 ⓒ이윤선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집단 산재 인정 투쟁에 나선 8명 중 유산만 산재로 인정하고 자녀의 선천성 건강 손상은 인정하지 않았다. 황당하게도 현행 산재보험법은 ‘근로자’의 산재 피해를 보상하는 것이지 그 태아나 자녀의 피해에 대해서는 규정하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아이가 배 속에서 아파 죽으면 산재고, 살아서 태어나면 산재가 아니란 말이냐” 하며 정당한 울분을 터트린다.

노동자들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고, 1심에선 이겼지만 2심에서는 졌다. 현재 대법원 계류 중이다. 노동자들은 2심 판결이 위헌이라는 취지로 위헌심판을 신청한 상태다.

 정부가 공범

2014년 작업환경실태조사(고용노동부,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는 병원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 3.7퍼센트가 선천성 기형아 임신을 경험했고, 난임(27퍼센트), 조산 또는 유산(22.8퍼센트), 생리 불순(20.2퍼센트) 등 거의 대부분이 생식건강에서 문제를 겪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많은 여성 노동자들은 자신이 생식독성 물질을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 보건업에서 ‘생식독성’이라는 말 자체를 들어 보지 못한 비율이 73퍼센트에 이른다.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는 걸 알아도 산재 신청 방법을 모르거나(47퍼센트) 산재 신청을 해도 보상을 못 받을 것 같아서(20퍼센트)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김인아 등, 2016).

산부인과에 가는 것 자체를 부끄러운 일로 여겨 꺼리거나, 생식 건강 문제를 가족들이 알게 될까 봐 가까운 동료에게조차 숨기는 분위기도 있다. 생리통이 극심해져 “기숙사 방을 데굴데굴 구르”는 일도 허다하지만 관리자로부터 엄살 피운다는 눈칫밥 먹기 십상이라 꾹 참는다.

이처럼 그동안 숨겨진 피해들이 많기 때문에 제주의료원 노동자들이 승소한다면 긍정적인 연쇄 효과를 일으킬 것이다. 특히 삼성반도체 직업병으로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이 누구보다 승리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유해 물질로 인해 생식 건강에 피해를 입는 남성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이런 파급 효과 때문에 기업주와 정부는 제주의료원 노동자들의 산재 인정을 기어코 막으려 하는 것이다. 악랄한 기업주들은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남몰래 눈물 짓는 시간만큼 이윤을 긁어 모으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입만 열면 출산율을 걱정하고 “아이 낳기 좋은 사회” 운운하면서도, 여성의 몸을 갉아 먹고 있는 유해 물질 작업장과 기업주들을 방치한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의 안전이 새해 최고 소망”이고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더니, 임신한 노동자를 끔찍한 노동 환경에 몰아 넣은 공공병원(제주의료원), 끈질긴 소송으로 노동자들의 무릎을 꿇리려 하는 근로복지공단을 내버려 둔다.

수많은 여성 노동자와 자녀들의 생명보다 기업주들의 이윤 보호가 먼저이기 때문이다.

더는 여성 노동자들이 아이가 아픈 것이 자기 탓이라 자책하게 만들지 말라. 근로복지공단과 법원, 문재인 정부는 생식독성 물질로 인한 2세 질환을 산재로 인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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