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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붕괴 10주년 - 동구의 대변동

동구의 대변동

 

 [편집자] 올해 8월은 소련이 해체되고 소련공산당이 해산당한 지 10년이 되는 때이다. 이 엄청난 일로 말미암아 당시 좌파는 크나큰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일찍이 1947년에 소련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 변형인 관료적 국가 자본주의라고 주장한 토니 클리프는 소련의 해체에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다음의 글은 그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인 1989년 12월에 쓴 글이다.

 

 우리는 동유럽에서 사회·정치 질서의 엄청나기 이를 데 없는 격변을 목격하고 있다. 그것은 1848년과 1917년을 연상시키는 정도의 규모이다.

 1848년에는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 헝가리에서 혁명이 일어나서 다른 곳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 헝가리 혁명으로 이어졌으며, 훨씬 더 큰 규모로 국제적 영향을 미쳤다.

 대변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체제 내부의 압력을 관찰해야 한다. 그것은 사회 체제가 생산력의 발전에 질곡이 될 때 사회 혁명의 시대가 시작된다고 하는 마르크스의 진술로 요약된다.

 마르크스는 "시대"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것은 하루이틀 또는 일이 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체제가 생산력에 질곡이 되는 동안인 수십 년이 걸리는 장기적 과정이다.

 왜 국가자본주의 체제들이 질곡으로 작용하는가? 소련의 경우에는 1950년부터 1959년 사이의 연평균 국민총생산(GNP) 성장률은 5.8퍼센트였다. 1970∼78년 사이에는 3.7퍼센트에 머물렀으며, 1980∼82년 사이에는 1.5퍼센트로 떨어졌다. 내 짐작으로는 지난 3∼4년 동안에도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다.

 소련의 제조업 노동자 계급은 미국보다 3분의 1 가량 더 많다. 소련의 제조업 기술자의 숫자는 미국의 두 배이지만, 생산량은 미국의 절반이다.

 전체 인구 중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비율은 미국이 4퍼센트인데 소련은 30퍼센트이다. 하지만 그 4퍼센트가 미국 내에서 필요한 식량을 넉넉히 생산함은 물론 수출까지 하고 있다. 그에 비해서 소련은 소비 수준이 훨씬 낮은데도 식량을 수입하고 있다.

 최근 20년 동안의 경기 하락과 침체는 성장률이 대단히 높았던 스탈린 치하 소련 경제의 경험과는 완전히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스탈린은 중공업과 자본재에 치중함으로써 그렇게 높은 성장률을 이룩했다. 자본 축적이 체제의 중심이었다 ― 기계를 만들기 위한 기계를 생산하기 위한 기계.

 문제는 그러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강조점이 생산의 양에 두어졌기 때문에 체제가 아주 경직됐다는 것이다.

 영국의 철강 산업을 보라. 기업들은 아주 무거운 원료인 석탄과 철광석의 수송비를 절약하기 위해 해안에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에 반해서 다이아몬드 생산의 중심지는 남아프리카이지만 그 유통의 중심지는 암스테르담이다. 이 두 곳이 수천 마일이나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작은 양이 높은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철강산업의 경우는 다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철강 기업은 우랄 지방의 마그니토고르스크에 있다. 그 곳에는 석탄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육로로 석탄을 운반해 온다. 소련에서 두번째로 큰 철강 기업은 우크라이나의 돈바스에 있다. 그 곳에는 석탄이 풍부하지만 철광이 없기 때문에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철광석을 운반해 온다.

 수송비가 틀림없이 최종 생산물의 가격보다 30∼40배에서 50배 정도 더 높을 것이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낭비이다. 철강 제품의 가격은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되고 있다. 이들 산업에 대한 엄청난 보조금은 전체 경제에 만만찮은 부담이 돼 왔다.

 비합리성의 또 다른 예는 소련의 두 공장에서 12mm×60mm 크기의 볼트를 생산할 때, 한 공장에서는 10코페이카[소련의 화폐 단위로 100코페이카는 1루블 ― 옮긴이]의 가격을 매기는 데 반해서 다른 공장에서는 똑같은 볼트에 14배나 더 비싼 1.40루블을 매긴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다즈 사와 퍼실 사의 가격 차이는 아마 5퍼센트 정도일 것이다. 만약 가격 차이가 1천3백퍼센트나 된다고 하면 둘 가운데 한쪽은 파산할 것이다.

비효율

 소련의 문제는 자원의 사용을 늘려 가는 동안에는 좀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고, 좀더 많은 원료를 사용하며, 좀더 많은 공장을 지음으로써 성장이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생산의 강도 또는 생산성 ― 노동자 1인당 생산량 또는 자본 1단위당 생산량 ― 을 증대시킬 필요가 생기면, 다시 말해서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전환할 필요가 생기게 되면 양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양적 방법은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농업에서 일어났던 일을 보라. 스탈린 치하에서 농업의 총생산량은 전혀 늘지 않았다. 1953년에 그가 죽었을 때 소련의 농업총생산은 집산화 전인 1928년보다 좀 적었다. 하지만 집산화는 수많은 사람들과 식량을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시켰기 때문에 스탈린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다.

 농촌으로부터 식량을 짜내기 위해서 그는 농민들을 집단농장으로 조직해야만 했다. 농민들이 곡물을 숨기려고만 할 것이므로 2천6백만 가구의 농민을 통제하고 그들에게 곡물을 공급하도록 강제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20만 개의 집단농장을 통제하는 것이 훨씬 쉬웠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 20만 개조차도 통제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각 농장의 5백가구 농민들이 1천톤을 생산하고는 6백톤밖에 생산하지 못한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서 곡물을 숨기기로 합의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그는 '농기계국'을 설치함으로써 집단농장을 통제하려 했다. 이 국가기관 각각이 20∼30개의 집단농장을 관리하면서 파종과 수확을 담당했다.

 20만 개의 집단농장보다는 1만 개의 '농기계국'을 통제하는 것이 훨씬 쉬웠던 것이다.

 문제는 트랙터 운전수가 고랑을 깊게 갈 것인가 얕게 갈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얕게 간다면 일을 더 빨리 할 수 있고, 따라서 더 많은 상여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운전수가 한 일을 측정하러 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5개월 후에 수확이 나빴다 할지라도, 그 누구도 그것이 운전수의 잘못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없다. 날씨 탓으로 돌려질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런 체제의 에누리 없는 결과는 농업을 통제하려는 스탈린의 시도가 생산량을 늘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1959년 집단농장원들의 개인 경작지는 전체 경작지의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런 개인 경작지에는 기계가 사용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쟁기조차 쓰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젊은 노동자들이 없기 때문에 영농법은 아주 원시적이었다. 그런데도 1959년에 이 개인 경작지에서 소련 전체 육류 생산의 46.6퍼센트, 우유의 49.2퍼센트, 달걀의 82.1퍼센트가 생산됐다.

 만약 고르바초프가 농업 노동력을 전체 인구의 30퍼센트에서 예컨대 10퍼센트로 줄일 수 있다면 공업 생산을 늘릴 수 있는 큰 기회가 생길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공업 생산성의 향상을 강조할 수밖에 없으며,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경제를 합리화해 군살을 빼고 튼튼하게 하려는 것이다. 마거릿 쌔처는 1979∼1981년에 영국에서 페레스트로이카를 실시했다. 그는 제조업 노동력을 5분의 1 이상이나 줄였다. 모든 자본주의 나라에서 페레스트로이카를 실시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자본가들이 공장문을 닫고 새 공장을 열었으며 기계를 바꿨다. 하지만 일본 경제는 영국 경제보다 훨씬 현대적이기 때문에 경제 개혁의 상처가 훨씬 덜할 수 있다. 소련 경제는 쌔처가 실시했던 것보다 더 근본적인 페레스트로이카를 요구한다.

 보리스 카갈리츠키가 런던을 방문했을 때 그는 관료 집단 내의 주요한 세 그룹에 관해 말한 바 있다.

 그들 가운데 한 그룹은 "우리는 합리화와 시장이 필요하며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모델'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그룹은 훨씬 더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며, '쌔처 류의 시장경제론자들'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카갈리츠키에 따르면, 가장 큰 그룹은 '피노체트 류의 시장경제론자들'로 불리는 그룹으로서 이들은 쌔처가 너무 온건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칠레의 피노체트 장군이 실시했던 것과 같은 급진적인 조치들을 도입하려 한다.

 채널 4 방송은 폴란드 경제를 다룬 최근 프로그램에서 카토비체에 있는 한 철강 공장의 경영자를 특집으로 다뤘다. 그는 "우리는 이언 맥그리거로부터 배워야만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노동력의 철저한 감축을 주장하고 자신은 한 일자리를 놓고 두 명의 노동자가 취직하려 할 경우에만 만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고르바초프가 따라야만 하는 논리이다. 영국에서는 제조업 생산 설비의 20∼25퍼센트를 폐쇄했다. 소련에서는 그 이상을 해야 할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의 결과로 1천6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는 계산은 어떻게 보면 좀 적게 산정한 것이다.

 최초의 저항은 공장의 관료들에게서 나올 것이다. 둘째로, 그런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르바초프는 더 많은 개방, 글라스노스트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글라스노스트의 문제는 그것이 통제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지배자들은 폭력과 설득, 채찍과 당근을 가지고 지배한다. 그들은 채찍이 충분히 강하지 못하거나 당근이 충분히 크지 않을 때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개방

 스탈린이 죽었을 당시만 해도 소련은 정치적 격변의 관점에서 볼 때 여전히 무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던 중 1956년 2월에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비난하고 약간의 민주화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8개월 후 헝가리 봉기가 일어났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노동자평의회를 설치했으며 헝가리의 경찰과 군대를 분쇄했다. 흐루시초프는 그들에게 손가락을 주었으나, 그들은 주먹을 가져갔다. 물론 그 후에 흐루시초프는 탱크를 진입시켰다.

 이런 결과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알렉산데르 2세는 1855년에 러시아 황제에 등극해 농노와 지방정부에 자유를, 그리고 여성에게는 대학에 갈 수 있는 자유를 줬다. 당시의 지도적인 혁명적 민주주의자였던 헤르쩬은 알렉산데르 2세를 "해방자 짜르"라고 불렀다. 단 한 가지 문제는 짜르가 농노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토지는 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방정부에 자유를 주었지만 폴란드의 민족자치를 허용하지 않았고 대신에 군대를 파견했다.

 그 결과 나로드니키(민중주의자들)는 거대하고 적극적인 운동을 형성했고 알렉산데르 2세는 1881년에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혁명가에 의해 암살당한 황제가 됐다.

 오늘날 소련의 지배자들에게 글라스노스트의 문제는 그것이 엄청난 요구들에 문을 열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법을 어기고 파업을 감행한 보르쿠타의 노동자들을 보라.

 글라스노스트는 소련과 동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저항과 분노의 봇물을 터뜨렸다.

 위기의 폭발은 무척 빠르다. 그러나 위기의 해결은 장기적인 문제이다. 이것은, 여기에서 다시 한번 말하건대, 과거가 우리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엄청난 노동자 계급을 창출함으로써 역사를 거대한 규모로 진전시켰다. 오늘날 소련의 노동자 계급은 규모나 집중도, 그리고 힘의 측면에서 1917년의 노동자 계급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 이와 동시에, 노동자들은 사상, 조직, 생활관습의 측면에서 엄청나게 퇴보했다.

 바로 이런 까닭에 노동자들은 지극히 강력함에도 이미 오래 전인 1848년에 제기됐던 지극히 초보적인 것들 ― 민주적 권리, 집회의 자유,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권 ― 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후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상의 물리적 연속성이 없다는 것이다. 트로츠키가 "혁명 정당은 계급의 기억"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기억"이 단지 허공에 매달린 그 무엇이 아니고 인간에 의해 수행되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전달하고, 자신들이 읽은 책 등에 관해 서로 얘기하기 마련이다.

 퇴보의 한 예는 모스크바와 야로슬라브에서 있었던 11월 7일의 시위에서 사람들이 짜르의 기치를 들고 있던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이보다 더욱 나빴던 것은 지난 여름 서부 우크라이나의 르보프에서 사람들이 1919년에 15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페틀루라의 청백(靑白)기를 들고 있었던 사실이다

 문제는 진정한 공산주의, 계획, 그리고 적기가 모두 억압적 체제와 동일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모순

 카갈리츠키나 동유럽 전체의 그와 비슷한 수많은 혁명가들에게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그들은 사상의 측면에서 자신들의 길을 찾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사실상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무런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명확해질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정치적 분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카갈리츠키의 그룹 안에는 아나키스트들도 있고 갖가지 종류의 정치 사상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마르크스는 아나키스트 바쿠닌과 결별하는 데 여러 해가 걸렸다. 나는 오늘날 서방에서 마르크스주의자와 아나키스트가 함께 있는 조직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소련에서는 분화의 과정이 아직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함께 모여 있다.

 노동자들의 운동은 한편으로는 발전이 아주 빠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굉장히 느리다. 왜냐하면 극복해야 할 60년 간의 황폐기가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1917년에 노동자 대중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던 사상을 획득해야만 한다.

 또한 노동자들이 투쟁의 어떤 측면들은 지극히 빨리 배울 수 있지만 그것을 일반화하는 데에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두 과정 사이의 불균형도 있다. 사람들의 두뇌 속에 있는 모순은 그들의 경험 속에서의 모순의 결과이다.

 소련 노동자들은 공장 안에서 많은 연대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기본적인 민주적 요구들은 이런 상황으로부터 성장해 나올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민주적 권리와 노동조합의 권리를 원한다.

 문제는 쟁점이 직접적인 공장의 문제를 넘어서서 좀더 일반적인 것으로 될 때에는 모든 것이 온데간데 없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장의 매력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소련 노동자들은 그들의 생활수준을 외국과 비교할 때면 언제나 서독의 생활수준과 비교한다.

 만약 그들이 모스크바의 주택 사정을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잠을 자는 캘커타와 비교한다면 그들은 캘커타에는 시장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서독과 비교할 경우에 시장은 아주 매력적으로 보인다.

 레닌이 혁명 사상은 노동자들 외부로부터 와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가 뜻했던 것은 그들의 직접적인 경험의 바깥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로서 임금 인상을 위해 싸우는 것은 자발적이다. 인종 차별에 맞서 싸우는 것은 자발적이지 않다. 자동으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직접적인 경험을 넘어서야만 한다.

 1905년 1월 9월 러시아에서는 사제이면서 경찰 첩자였던 가폰 신부가 이끌었던 동궁[짜르의 집무실이자 거처 ― 옮긴이]으로의 행진이 있었다. 민중은 그가 경찰 첩자였다는 것은 물론 몰랐지만, 그가 신부이고, 그것도 교도소 순회 신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시위 군중은 적기가 아니라 성상을 들고 있었으며 "짜르 타도"를 외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황제를 사랑합니다"라고 외쳤다.

 혁명가들은 극소수여서 기껏해야 2백 명 정도에 불과했다. 군대가 5백 명의 민중을 사살하자 대중은 변하기 시작했다.

 1월 9일부터 시작해서 그 해 말의 소비에트 구호 ― "8시간 노동"과 "무장" ― 로까지 변화한 것은 매우 신속한 도약이었다. 민중이 과도기를 거쳐야만 한다는 것은 그 과도기가 5백 년쯤 돼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레닌이 말했듯이 혁명적 시기에는 노동자들이 하룻만에 (일상적 시기의 ― 옮긴이)한 세기 동안보다도 더 많이 변한다.

분화

 동유럽의 사회주의자들에게는 극복해야 할 엄청난 문제들이 있다. 우리가 혁명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조차 좌파 경향의 중도파와 섞일 것이며, 뚜렷한 구분선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중도파가 좌파로 기울고 분화되는 것을 기대할 수는 있다.

 폴란드의 경험은 폭력이 사용될 때마다 그 폭력이 약화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1980∼1981년에 지배계급은 1956년만큼 자신이 없었다. 소련 군대는 개입하지 않았다. 현재의 상황에서 그들이 동독에 있는 38만의 소련 군대를 사용하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그들은 개량과 억압을 동시에 사용해야 한다. 광부들은 파업에 돌입함으로써 광산, 철도, 동력 산업에서의 파업은 불법이라는 법을 돌파했다. 그리하여 광부들은 그 법을 깨뜨렸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완전히 깨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보르쿠타에서는 단지 18개 갱의 광부들만이 파업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투쟁에는 기복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단순한 일방통행 과정이 아니다. 시베리아 쿠즈바스의 광부 파업위원회는 파업에 반대했다. 파업을 계속하기로 결정한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그곳에서는 이미 투사들 사이에 분화가 일어나고 있다.

 동유럽 사태는 서방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람들은 시장을 지지하는 쌔처와 키노크[당시 영국 노동당 당수 ― 옮긴이]가 옳으며 계획은 효과가 없고 사회주의는 낡은 모자라고 말한다.

 폴란드의 한 경제학자는 공산주의를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기라고 규정했다. 서방에서 볼 때 (동구의 ― 옮긴이)정권들이 산산조각났듯이 사회주의도 미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우파에게 엄청난 응원이 되고 있다.

 많은 좌파가 동유럽 체제에 환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점은 특히 중요하다.

 그러나 동유럽 노동자들의 파업이 전면에 나선다면 이런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상황에서 계급투쟁이 여전히 지배적 요인이라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역사의 복수

 이론으로서 국가자본주의는 절대 중요하다. 소련에 어떤 형태로든 사회주의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곤경에 빠져 있다. 에르네스트 만델조차도 1956년에 이렇게 주장했다.

 

소련은 매번의 [경제개발]계획이 시행되고 세월이 흐르면서 과거의 결과가 미래의 가능성을 압박하지 않은 채 거의 균등한 경제 성장 속도를 유지하고 있다. ... 경제 성장 속도를 저하시키는 모든 자본주의 경제 발전 법칙들은 사라졌다.

 

 같은 해 아이적 도이처는 10년 이내에 소련의 생활수준이 서유럽을 능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믿었던 사람들은 이제 누구나 완전히 풀이 죽어 있다. 소련이 모든 사람이 자본주의라고 받아들이는 나라들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가정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국가자본주의 이론의 중요성은 그것이 경제가 왜 실제로 움직이는 방식대로 작용하는지를 설명한다는 데 있다. 자본 축적을 강조함으로써 엄청난 성장률과 미래의 성장에 대한 장애를 모두 설명한다. 나는 1963년에 이렇게 쓴 바 있다.

 

만약 우리가 계획경제라는 말을 마찰이 최소화되고 무엇보다도 경제적 결정을 하는 데 예측이 주류를 이루는 그러한 단일한 리듬으로 모든 구성 요소들이 조정되고 규제되는 경제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소련의 경제는 결코 계획경제가 아니다. 진정한 계획 대신 정부의 명령이라는 엄격한 방식이 그 정부의 결정과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경제 내부의 간극을 메우는 데에 관여하고 있다. 따라서 소비에트 계획경제라고 말하는 대신 관료적 지시 경제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것은 체제의 동력, 자본 축적, 노동자 계급의 창출을 설명해 준다. 이것이 국가자본주의의 강점이다. 그와 동시에, 이것은 생산력 ― 가장 중요한 생산력은 노동자들 자신이다 ― 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

 다음으로,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지나친 인상주의[경험주의 ― 옮긴이]에 빠지지 않도록 해 준다.

 스탈린이 초래한 마르크스주의 전통과의 모든 단절에도 불구하고 이런 전통들은 아직 살아 있다. 보르쿠타에는 그 곳의 가장 큰 강제노동수용소에 보내졌던 옛 트로츠키주의자들과 광부인 그들의 손자들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카갈리츠키의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롭다.

 사상은 탱크, 곧 폭력만으로는 분쇄될 수 없다. 트로츠키의 사상은 마치 시냇물과 같은 것일 수 있다. 물의 흐름은 눈앞에서 사라졌다가도 수 킬로미터 지난 곳에서 다시 나타난다. 시냇물은 마르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땅 밑으로 스며들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트로츠키가 1939년에 말했듯이 "가장 막강한 서기장의 복수보다 역사의 복수가 훨씬 더 가혹하다." 그가 옳다는 것이 증명됐다. 스탈린은 죽었고 트로츠키는 미소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