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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북한 경제는 위기였는가?

〈다함께〉 김하영 기자가 〈다함께〉 지난 호에 실린 한규한 기자의 해방 60년 연재 기사에 대한 반론을 보내왔다. 김하영 기자는 북한 경제가 영구적 위기를 겪어 온 것이 아니라며, 북한 체제 성격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한 때(특히 1950~1960년대) 높은 성장을 구가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함께〉 지난 호에서 한규한 동지는 1950년대 북한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 글의 세부적인 사실들을 다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큰 그림에서 1950년대 북한 경제가 잘 나가는 추세였는지, 위기였는지에 대해서만 얘기하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950∼60년대 북한은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서 기적을 만들어 가고 있던 부흥기였다.

1953년부터 1956년까지 진행된 3개년 계획은 연평균 41.7퍼센트라는 엄청난 성장률을 기록했는데, 이것은 거의 세계 신기록 수준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10년 동안 북한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25퍼센트를 유지했다.

한국전쟁 후 미국이 “앞으로 100년이 걸려도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고 호언했던 바로 그 곳에서 이뤄진 이러한 성장은 놀라운 것이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대부분의 산업 시설이 파괴됐고, 민간인 40∼48만 명을 포함해 1백만 명이 죽었다.

좁은 땅덩이에 자원도 부족한 나라가 원조도 거의 받을 수 없는 조건에서 급속한 성장을 밀어붙인다는 것이 엄청난 모순을 자아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북한 경제는 추세적으로 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내가 이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한규한 동지의 글이 자칫 ‘북한은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영구적 위기를 겪어온 사회’라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북한 사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지속적인 정체의 늪에 빠져 있는 사회라는 인상은 북한에 대한 대표적이고 지배적인 오해이고, 흔히 남한이 북한보다 우월한 체제라는 생각과 연결돼 있다.

하지만 오늘날 북한이 겪고 있는 기근 때문에 사람들이 잠시 잊고 있는 중요한 사실은 1970년대까지도 남한이 북한 경제를 결코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1982년 북한의 평균 음식섭취량은 남한보다 높았다.

오늘날 북한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지만, 북한이 1970년대까지 거대한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을 동시에 봐야 한다.

이런 모순적 발전을 보지 않는다면, 북한은 자본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체제라는 생각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북한 경제는 자본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비효율성을 드러내기는커녕, 세계경제의 국가자본주의 경향과 성쇠를 함께했다. 1950년대 세계 경제는 여전히 국가자본주의 경향이 두드러졌고, 북한은 강력한 국가 개입을 통해 경제 성공담을 쏟아내던 나라들 가운데 하나였다.

1970년대에 세계자본주의는 국가자본주의보다 “세계화” 경향이 더 유력해졌고, 국가자본주의적 길을 고수하는 나라들은 점차 뒤처지기 시작했다. 북한의 경제 성장은 1960년대 후반부터 둔화되기 시작해 1970년대 말에는 3∼4퍼센트대까지 떨어졌다.

1956년 8월 이른바 ‘종파사건’은 한규한 씨 지적과 달리 “자본 축적의 심각한 위기”에 대한 대응책을 둘러싸고 일어났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다.

1956년 8월 당 중앙위 전원회의를 통해 정점에 이른 경제 발전 노선의 충돌은 이미 1953∼1954년부터 시작됐고, 이 때는 북한 경제가 이제 막 첫 삽을 뜬 때였다.

김일성과 소련파·연안파의 충돌로 나타난 경제 발전 노선 대립은 북한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소련과 동유럽에서 드러난 스탈린주의 경제 모델의 한계를 징후적으로 반영했다.

1953년 스탈린이 죽자 소련 관료는 그 동안 누적돼 온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제한된 개혁을 서둘렀다. 토니 클리프의 표현을 빌자면, 소련 관료는 “원시적 축적 단계에서 성숙한 국가자본주의”로 이행할 필요를 느꼈다.

소련 경제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까지는 발전된 그들 자신의 공업에 투자를 집중시키면서, 남은 자원들을 몽땅 소련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사정이 달랐다. 새로운 공업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모든 자원을 집중해야 했다. 농민을 굶기고 노동자를 쥐어짜서라도 그렇게 해야 했다. 민중의 생활수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이 입장을 대변한 사람이 바로 김일성이었고, 스탈린 사후의 소련 관료 입장을 대변한 쪽이 소련파와 연안파였다. 김일성은 1955년에 처음으로 “주체”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경제적 이해관계가 소련과 서로 다름을 반영하고 있었다.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승리를 거둔 뒤, 소비재 부문 투자 확대 의견이 일부 반영됐던 5개년계획은 전면 백지화됐다. 중공업 우선 발전 노선은 한층 선명해졌다.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1차 5개년계획 법령에 따르면, 공업 투자 총액에서 중공업의 비중은 83퍼센트를 차지했다!

북한 관료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게 유지하면서 작업 속도를 높이기 위해 혈안이 됐다. 관료는 공장과 기업소마다 종업원총회나 열성자대회를 열어 5개년계획을 1년반 또는 그 이상 기한을 단축하자는 결의를 끌어냈다.

그렇지 않아도 높은 생산 목표(국가 계획)는 당의 증산 과제와 현장노동자의 증산 결의를 거치면서 점점 불어갔다.

북한 관료는 식민지 경험과 전쟁 경험을 딛고 경제 재건을 원하는 민중의 염원과 또한 미 제국주의와 대적하고 있다는 전쟁 공포를 잘 이용했다. 상당수 사람들은 계급 상승의 기회도 얻었다. 증산운동에서 두각을 드러낸 ‘노력영웅’들은 공장 지배인이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이 됐다.

반면,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계급 이동의 사다리에 오르지 못했고, 경제 성장의 이면에서 끔찍한 노동조건을 견뎌야 했다.

엄격한 노동규율이 강요됐지만, 노동자들이 자신의 조건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조직할 권리는 허용되지 않았다. 직업동맹은 단체계약 대신 “경쟁의무”를 체결하는 국가조직이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을 낮은 생활수준과 피곤한 노동으로 내모는 방식은 어느 수준 이상의 경제 발전을 보장하기 어려웠다.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에게 더 나은 소비재와 휴가를 제공할 필요가 있었다.

스탈린 사후 소련 관료들이 봉착했던 문제를 북한 관료들도 나중에는 결코 피해갈 수 없었다. 1966∼1967년에 박금철과 이효순 등은 외연적 성장 모델의 문제를 지적하며, 경제 성장의 속도를 조절하고 균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는 7개년계획이 제때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3년 연장이라는 궁여지책을 쓰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들은 생산량만이 아니라 질에도 관심을 기울어야 하고, 이를 위해 국방비를 줄여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1956년에 이어 다시 한번 북한 관료 내에 숙청 바람이 불었다. 1956년의 숙청 파동과 달리 이것은 위기 대처 방법을 둘러싼 관료 내 충돌로, 스탈린보다 더 스탈린다운 김일성식 경제 모델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