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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의 정규직 양보와 임금투쟁 포기론:
계급 단결은 비현실적 도덕주의로는 이룰 수 없다

최근 몇 년 사이 사회진보연대는 대기업 정규직 양보론을 주장하는 데에 열심이다.

올해에는 오랫동안 발간해 오던 월간지 《오늘보다》를 폐간하고 5월 1일부터 새로운 웹소식지 〈사회운동포커스〉를 창간했는데, 여기에 실린 관련 기사들도 모두 대기업 정규직 양보론을 그 결론으로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회운동포커스〉의 창간 기사는 “노동자운동 스스로 단결하고 연대하기 위한 실천적 노력이 있었는지 자기비판이 필요하다”고 문제제기를 하고는 이렇게 주장한다. “자본주의의 생산성이 둔화되고 있음을 객관적으로 인식한다면, 내 임금만 오르는 것이 아니라, 이웃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지 않도록 할 연대고용·연대임금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공멸의 위기, 사회운동의 활로는 무엇인가’, 〈사회운동포커스〉 2019. 05. 01.)

물론 “자본의 이윤 몫을 남겨둔 채 노동자끼리 임금을 나누자는 뜻이 아니라”며 자신들의 주장이 지배자들이 주장하는 ‘정규직 노동자 양보론’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회진보연대의 주요 활동가인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한지원 씨(이하 존칭 생략)〈매일노동뉴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연대고용·연대임금’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본의 이윤을 어느 정도 줄여 저임금 노동자 임금을 높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보다 중요하게는 대기업·공공부문·상위소득 노동자와 중소기업·민간부문·저소득 노동자 간의 임금조정을 해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강조는 인용자)

즉, 노동자들이 함께 투쟁해 이윤몫을 가져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기업·정규직 노동자와 중소기업·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에서 임금을 “조정”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최근에 발표된 한지원의 글 ‘저임금·임금격차에 대한 노동자운동의 접근방향’(〈사회운동포커스〉 2019. 05. 13.)은 최저임금 인상조차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이나 임금 격차 축소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면서, 제조업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 양보를 통한 일자리 창출과 임금 격차 해소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얼마 전 민주노총이 주최한 최저임금 인상 투쟁 관련 워크숍에서 토론자로 나온 사회진보연대 활동가도 한지원과 같은 주장을 하며, 민주노총이 최저임금 인상 투쟁에 힘을 쏟는 것을 비판했다.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진보연대가 최저임금 인상을 비판하고 나서자, 급기야 〈중앙일보〉가 한지원의 글을 우호적으로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마르크스 이론가도 “최저임금 인상, 일자리 나빠졌다”’라는 제목의 그 글은 중앙일보사 자신들의 소득 주도 성장 정책 비판을 정당화하는 데 한지원의 글을 이용할 수 있었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문재인 정부의 속 빈 강정 식 소득 주도 성장론을 비판한다(〈노동자 연대〉도 이와 관련된 기사를 여러 차례 실었다). 이론적으로도 소득 주도 성장론은 임금이 오르면 소비·투자가 늘고, 이는 다시 임금을 끌어올리며 경제 성장을 지속시키는 선순환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경제 성장에서 핵심은 자본의 투자이며, 투자 수준은 이윤율에 달려 있다고 본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불황기에는 임금이 오르면 이윤율을 떨어뜨려 경제 성장에 압박을 가할 것이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해관계가 대립한다는 사실 때문에 노동자와 자본가가 ‘윈-윈’ 할 수 있다는 소득 주도 성장론은 자본주의 경제 위기 상황에서는 결국 딜레마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임금 인상 투쟁을 반대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들이 경제 성장(또는 회복)에 협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반대해야 한다. 자본주의 경제 성장은 자본 투자(축적)와 직결돼 있고, 이는 노동자들이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 시기에 노동자들이 경제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면 해고나 임금 삭감 불가피론에 쉽게 노출될 것이다.

문제는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진보연대가 소득 주도 성장론을 이론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넘어, 최저임금 인상과 같은 임금 인상 투쟁까지 평가절하했다는 점이다. 〈중앙일보〉 같은 교활한 친기업 우파 언론이 이를 놓칠 리 없다.

사실 사회진보연대는 꽤 오랫동안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 격차’ 문제를 매우 중시해 왔다. 물론 대기업·정규직 노동자들이 중소기업·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에 공감하며 연대해야 한다는 정신 자체는 좋은 것이다. 또한 조직 노동운동이 계급 내 격차 해소에 앞장서 전체 노동계급의 신뢰와 단결을 제고하자는 취지도 좋다.

그래서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사회진보연대는 임금 격차 해소를 위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모두 같은 금액을 올리는 ‘정액임금 인상 투쟁’을 대안으로 제시해 왔다. 만약 임금을 정액 20만 원을 올린다고 하면, 임금이 낮은 중소기업·비정규직 노동자의 인상률이 더 높게 된다.

민주노총 등도 이런 취지에 공감해 2013년부터 정액 인상을 요구해 왔다. 민주노총은 또한 최저임금을 시급 1만 원으로 인상하라고 별도 요구해 왔다.

노동계급이 모두 충분한 규모로 임금을 인상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향 평준화를 위해 투쟁하자는 취지였다. 정규직 노동자들도 만족할 만큼 충분한 액수로 정규직·비정규직의 임금을 모두 정액 인상하면 노동계급 내부 격차를 점차 좁힐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조직 노동계급이 노동계급 전체의 임금을 올리는 데에 앞장서게 되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사회진보연대의 입장이 바뀌었다. 대기업 노동자들의 양보를 주장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최저임금 인상과 같은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는 것까지 비판하고 있다.

이윤율이 하락하면 노동자들끼리 나누는 것이 대안인가?

이처럼 사회진보연대의 노선이 고임금·저임금 노동자들의 단결로 임금 몫 전체를 늘리자는 것에서, 대기업 노동자들의 양보와 노동자 사이의 나눔으로 옮긴 근거 하나는 “자본주의 생산성이 둔화”하고 있다는 그들의 인식에 있다. “자본주의의 생산성이 둔화되고 있음을 객관적으로 인식한다면, 내 임금만 오르는 것이 아니라, 이웃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지 않도록 할 연대고용·연대임금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한지원이 자본주의 생산성과 똑같은 것으로 보는 자본생산성이란 무엇인가? 자본생산성은 투자 자본 대비 부가가치로 계산된다. 부르주아 경제학은 자본(생산수단), 노동, 자연 같은 각각의 생산요소들이 생산물에 가치를 추가한다고 보기 때문에 자본생산성이 실재한다고 본다.

반면, 마르크스주의 노동가치이론에 따르면, 생산수단(죽은 노동)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없고, 노동자들의 노동만이 새로운 가치를 추가할 수 있다. 따라서 자본생산성은 허구적인 개념이고, 생산수단 투자 대비 총노동량(부가가치)의 비율을 뜻하는 말일 뿐이다.(여기서는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 사적·구체적 노동과 사회적·추상적 노동 등의 구분은 논외로 한다.)

그런데 이윤율은 투자 자본 대비 이윤을 뜻하고, 부가가치는 임금 몫과 이윤 몫으로 분배된다. 그러므로 한지원에게 자본생산성은 사실상 이윤율을 뜻하는 셈이다.(그는 특히, 자본주의 하에서 착취율은 장기에 걸쳐 큰 변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더욱 확실하게 자본생산성은 그에게 이윤율을 뜻한다.)

결국 사회진보연대는 이윤율이 하락하고 있으므로 노동자들 사이에서의 나눔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을 엉뚱한 주장에 이용하는 셈이다. 즉, 노동자들이 받을 수 있는 몫에 한계가 있으며 정해진 몫을 서로 나눌 수밖에 없다는 ‘임금기금론’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임금기금론은 노동자들이 받을 수 있는 임금 총액이 정해져 있어서, 일부 노동자들이 임금을 올리면 다른 노동자들은 임금이 삭감될 수밖에 없다는 (그릇된) 이론이다. 그 실천적 함의인즉슨, 투쟁으로 조건을 개선하려는 시도는 결국 힘 있는 대사업장 정규직 노동자들이 더 많은 몫을 가져가게 되는 결과만을 낳아, 노동계급 내부 격차가 더 벌어질 뿐이라는 것이다.

한지원이 “임금 극대화에 전력투구하는 전투적 경제주의를 지양”하고, 제조업 대기업 노동자들이 임금 삭감을 감수해 일자리를 늘리는 게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잘못된 이론과 그 함의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입장의 가장 큰 난점은 바로 임금이 계급투쟁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완전히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흔히 모종의 ‘공정한 몫’을 상정하고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보다 많이 가져가는 것이 문제를 낳는다고 본다.

예를 들어, 한지원은 모종의 ‘공정한 몫’이 5000만 원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국민총소득을 취업자 전체에게 똑같이 분배한다고 상상해 보자. … 임금노동자 소득을 이렇게 평준화하면 전체 노동자 연평균 임금은 [5200만 원으로] 1600만 원(46퍼센트) 인상된다. … 상위 10퍼센트 노동자의 경우 평균 4700만 원 삭감된다. 상위 20퍼센트 노동자는 평균 700만 원 삭감된다. 나머지 80퍼센트의 임금은 최소 200만 원부터 최대 4600만 원까지 오른다.”

그렇다면 연봉이 5000만 원 이상인 노동자는 자본가들에게 착취받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한지원 스스로도 노동자 사이의 임금 격차가 노동생산성 격차 때문에 발생하며, 노동생산성 격차는 바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자본집약도(1인당 자본 비율, 즉 자본의 유기적 구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기업 노동자들의 노동생산성이 높다는 것은 자본에게 더 많은 부가가치를 생산해 줬다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임금이 높아도 이들은 저임금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착취받고 있다는 뜻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이 중소기업 노동자들과의 임금 격차만 확대한다는 주장도 참말이 아니다. 현실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은 함께 오르내리는 경향이 있다. 그 간격은 때로는 더 좁아지거나 넓어지기도 하지만 결코 반대로 향하지는 않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은 함께 오르내리는 경향이 있다.
노동소득분배율이 하락하면 자본가들은 그만큼 많은 이윤을 가져간다. 둘 사이의 관계는 정확히 반비례한다.

잘 조직된 노동자들이 싸워서 성과를 내면, 그것은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싸울 자신감을 준다. 한 부문의 투쟁에 의한 임금 인상이 나머지 노동자들의 임금을 먹어 들어가는 제로섬 관계가 아니라 연대하면 투쟁에 의해 오히려 서로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처럼 대기업 노동자도 중소기업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착취받고 있다는 점, 그리고 대기업 임금과 중소기업의 임금이 등락을 함께한다는 점은 바로 상이한 노동자들이 함께 연대해 자본(대자본과 중소자본 모두)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특히, 지금 같은 경제 불황기에는 지배자들의 고통 전가 시도에 맞선 노동자 투쟁이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노동자들 전체로 보면 그렇지 않지만, 특히 조직 노동자들은 사용자의 공격에 맞설 조직과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저항에서 성공을 거둔다면 다른 노동자들도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정규직 양보론은 사회진보연대의 주장과 달리 노동자 계급을 단결시키지 못한다. 고소득·정규직 노동자들이 양보하면 그 혜택이 자본가에게 가지 않고 다른 노동자들에게 갈 수 있다는 그들의 생각은 계급투쟁을 무시한 비현실적 공상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지원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임금을 스스로 삭감해 일자리를 늘리라고 요구하는 것이 자본의 공세를 받지 않을 것처럼 가정한다. 그러나 자본은 이윤 극대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설사 노동자들이 스스로 임금을 양보하더라도 자본 측이 순순히 노동자를 ‘필요’ 이상으로 고용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공상이다.

또 다른 큰 문제점은, 정규직 양보론이 저소득 노동자의 열악한 처지가 상대적 고소득 노동자들 탓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양보해야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조건이 개선될 수 있다는 논리는 정규직 노동자들을 위축시키고 사기 저하에 빠뜨릴 뿐이다.

게다가 상대적 고소득 노동자는 저소득 노동자들을 위해 임금을 양보하면 자신의 소득이 줄어든다고 느낄 것이다. 단결은커녕 위화감이 들 것이다. 친기업 우파 언론과 지배자들은 이 틈을 비집고 온갖 이간질을 기도할 것이다.

결국, 부자·기업주들의 양보를 강제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은 오히려 더욱 멀어질 것이다.

경제 불황기에 임금 인상 투쟁은 무의미한가?

기본급 인상 위해 싸우는 한화토탈 노동자들 ⓒ이미진

한편 한지원이 최저임금 인상 투쟁의 의의를 깎아내리는 부분을 살펴보자. “마르크스 경제이론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비판하며, 노동자계급의 임금인상 투쟁을 지지한다. 하지만 마르크스 경제이론으로 볼 때 소득주도성장론을 근거로 한 최저임금 인상은 노동자계급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이처럼 한지원은 마르크스가 임금 인상 투쟁을 지지했다고 인정하지만, 곧바로 “최저임금 인상은 노동자계급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면서 그 의의를 부정한다. 지금과 같은 불황기에는 임금이 오르면 이윤율이 떨어지고, 투자가 줄고, 실업자가 늘어나 다시 임금 하락 압박을 받는 식으로 “곧바로 자본에게 반격을 당한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최저임금뿐 아니라 모든 임금 인상이 자본의 반격을 당할 테니, 한지원의 주장은 사실상 불황기에는 임금 인상 투쟁이 쓸모없다는 주장인 셈이다.

그러면서 한지원은 마르크스가 쓴 《임금, 가격, 이윤》의 유명한 문장을 인용하면서 임금 인상이 무용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한다. “일반적으로 노동조합은 현존 제도가 빚어낸 결과를 반대하는 유격전에만 자신을 국한하고 이와 동시에 현존 제도가 변화하도록 노력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조직된 힘을 노동자 계급의 종국적 해방을 위한, 말하자면 임금 제도의 궁극적 철폐를 위한 지렛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실패한다.”

그러나 이는 문맥에서 완전히 떼어 낸 인용으로, 마르크스의 주장을 심하게 왜곡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임금 인상 투쟁을 평가절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임금 인상 투쟁을 무시하는 존 웨스턴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려고 《임금, 가격, 이윤》을 썼다.

한지원이 인용한 문장 바로 윗부분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자본과의 일상적 충돌에서 비겁하게 물러난다면, 노동자들은 틀림없이 더 커다란 운동을 주도할 자격을 스스로에게서 박탈하는 셈이 될 것이다.” 즉, 마르크스는 임금 인상 투쟁을 부정하기는커녕 노동자 계급이 그런 투쟁에 제대로 나서지 못한다면 더 커다란 운동을 주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 한지원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오히려 존 웨스턴의 주장을 재생하고 있다. 존 웨스턴은 ‘임금이 오르면 물가가 올라 의미가 없다’, ‘임금이 오르면 화폐가 부족해져 자본의 축소를 낳는다’는 등의 논리를 펴며 임금 인상 투쟁을 반대했다. 임금을 올려도 어차피 “곧바로 자본에게 반격을 당한다”는 것이다.

물론 한지원은 이렇게 반론할 수도 있다. ‘존 웨스턴의 주장은 경제학적으로 잘못된 주장이지만, 나의 주장은 마르크스 경제학에 부합한다.’

그러나 임금 인상에 대응해 자본이 일자리를 줄여 상대적 과잉인구를 창출하고, 이로써 임금을 다시 삭감한다고 해서 임금 인상 투쟁이 의미 없다고 마르크스가 봤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마르크스는 《임금, 가격, 이윤》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사태의 경향이 그러하다는 것[상대적 과잉인구로 임금이 최소 한계까지 억눌린다는 점]이 바로, 노동자 계급은 자본의 침략에 대한 저항을 포기해야 하며 자신들의 처지를 일시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가끔씩 주어지는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시도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만약 노동자들이 그렇게 하고 만다면, 그들은 구제할 때를 놓친 파탄자의 무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한지원의 주장처럼 설사 이번 최저임금 인상이 저임금 부문의 일자리 감소 효과를 냈다고 하더라도, 또한 자본가들이 온갖 꼼수를 동원해 최저임금 인상 효과를 무력화했다고 하더라도(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이를 위해 최저임금 산입 범위 확대와 같은 개악을 잇달아 추진했다고 하더라도), 최저임금 인상 투쟁이 쓸모없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조건을 공격해 다시 빼앗으려 하기 때문에라도 노동자들은 이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조직과 의식이 향상되고, 특히 연대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며, 자신감이 높아져 실제 연대 행동에 나서게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가 생각한 계급적 단결의 길이다.

일상의 투쟁 속에서 단결을 확대해야

마르크스는 온건 개혁파들을 이렇게 비판했다. “파업을 ‘노동자 자신’의 이익에 유해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자신들의 위대한 목적이 영구적 평균임금을 확보하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에 있다고 보는 일단의 박애주의자와 심지어 일단의 사회주의자가 있다.”

이런 비판은 사회진보연대의 ‘연대고용·연대임금’론에 매우 잘 적용된다. 자본이 즉각 반격할 것이라는 이유로 임금 인상 투쟁을 폄하하고, 자신들이 생각한 ‘공정한 몫’을 내세워 노동자들이 이를 받아들이게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누군가가 생각한 ‘공정한’ 또는 (제로섬 식으로) ‘평등한’ 임금을 노동자들에게 설득시키려 하는 도덕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계급투쟁의 동역학을 이해하고 이를 적용해 노동자 투쟁의 힘을 최대한 이끌어 내는 게 마르크스주의다. 계급투쟁의 동역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고임금 노동자든 저임금 노동자든 자신을 고용한 자본가에게 착취받고 있으며, 따라서 경제 불황이 오래 지속되는 현재와 같은 조건에서는 자신의 조건을 지키는 투쟁에 훨씬 자주 내몰리게 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일상 투쟁을 고무하고 그 속에서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를 발전시키는 것을 건너뛰려 한다면, 아무리 사회진보연대가 “체제에 도전하는 대범한 운동”을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머릿속 공상이거나, 현실의 우경화를 가리기 위한 연막에 그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