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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레닌주의②:
차별에 맞선 투쟁과 레닌

노동자연대는 5월 16일부터 6월 13일까지 ‘21세기 레닌주의’ 연속 공개 토론회를 진행하고 있다(자세히 보기). 레닌주의에 대한 오해가 세간에 상식처럼 퍼져 있는 가운데, ‘21세기 레닌주의’에서는 레닌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보고 오늘날에도 적용 가능한지를 토론한다.

이 글은 그 두 번째 주제인 ‘레닌과 차별에 맞선 투쟁’에서 발제자 이수현 씨의 발표와 정리 발언을 녹취한 것이다. 이수현은 《레닌 평전 2~4》(토니 클리프, 책갈피)의 역자이다.

오늘 저는 차별 반대 투쟁에 관한 레닌의 견해, 그리고 오늘날 그것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말씀드릴 것입니다. ‘21세기 레닌주의’라는 제목에 맞게 후자에 좀 더 비중을 두겠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여성해방 문제라든가 아일랜드와 폴란드 민족 억압 문제에 대해서 진보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미국 남북전쟁에서는 노예제에 반대하는 북군을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에서는 레닌과 같은 강령적 진술 — 사회주의자와 사회주의 정당이 모든 종류의 차별에 맞서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하다 — 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레닌과 같은 태도는 제2인터내셔널 소속 정당들의 전형적 태도였다고 보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차별 문제에 관한 레닌의 입장은 진정 새롭고 선구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레닌의 강령적 진술이 나와 있는 가장 유명한 문헌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몇 구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회민주주의자[당시 용어로 혁명적 사회주의자를 뜻함]들의 이상은 노동조합 서기가 아니라 민중의 호민관이어야 한다. 그는 폭정과 차별이 어디서 나타나든, 어떤 계층이나 계급의 사람들이 폭정과 차별에 시달리든 간에 그것에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들이 모든 종류의 차별 — 어느 계급이 당하건 간에 — 에 대응하는 훈련을 받지 않는다면 노동계급의 의식은 진정한 정치 의식이 될 수 없다.”

이밖에도 레닌은 그 특유의 강조 방식으로 여러 번 비슷한 주장을 되풀이해서 합니다.

사회주의자들이 모든 차별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말 같습니다. 그런데 레닌의 독특한 강조점은 앞서 인용한 문장 뒤에 이렇게 덧붙인 것에 있습니다.

“더욱이 노동자들이 사회민주주의의 관점으로 대응하는 훈련을 받지 않는다면 결코 그럴 수 없다(노동계급의 의식은 진정한 정치 의식이 될 수 없다).”

즉, 레닌은 노동계급의 관점을 대단히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레닌은 “사회민주주의 관점”이라는 말 외에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나 “노동계급의 관점”, “프롤레타리아의 관점” 등의 표현을 같은 뜻으로 돌아가면서 씁니다.

레닌에게 중요했던 것은 오히려 이 후자의 강조점, 즉 노동계급의 관점으로 차별에 맞서 투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주장이 오늘날 차별 반대 운동에서 우리 사회주의자들과 다른 활동가들 사이의 쟁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레닌의 선구적 기여와 강조점

그래서 ‘노동계급의 관점으로 차별 반대 투쟁을 벌인다’는 것의 의미를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인종이나 민족, 성의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요구이고, 노동계급과 노동계급 정당은 다른 민주주의 투쟁과 마찬가지로 평등을 요구하는 투쟁에서도 주도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닌은 당시 러시아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요구들을 위해 투쟁할 때도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보다 훨씬 일관될 것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둘째, 레닌은 선진적 계급으로서 노동계급은 혁명에서 모든 차별받는 대중을 지도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에서 “지도한다”는 말은 지시하고 명령을 내린다는 뜻이 아니라, 투쟁에서 앞장선다는 의미입니다.

레닌이 이렇게 지도하는 구실을 노동계급에게 부여한 이유는 노동계급이 도덕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이 차지하는 객관적인 사회적·경제적 지위 때문입니다.

셋째, 차별에 맞서 싸우는 주된 이유는 단결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레닌은 차별하는 민족의 노동자들과 차별받는 민족의 노동자들(러시아의 경우에는 러시아 민족의 노동자들과 다른 소수민족 노동자들)이 단결하려면, 차별하는 민족의 노동계급이 차별받는 민족의 분리·독립권을 옹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 주장의 궁극적 목적은 민족 자결권 자체보다는 노동계급의 국제적 단결 그리고 모든 민족국가의 자유로운 결합이었습니다.

넷째, 혁명적 정당에서는 여성이나 유대인이나 흑인 등의 조직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된 단일 조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통일된 세계 정당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나중에 코민테른 창립에서 이것이 부분적으로 실현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원칙 때문에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2차 당대회에서는 유대인 사회주의 노동자들의 조직인 분트와 날카로운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이 유대인 분트는 당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가맹 조직이었지만, 당에서 자율성을 보장받기를 원했을 뿐 아니라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유대인 노동자들을 대표하고 조직할 독점적 권리를 자신들이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둘 다 그때는 〈이스크라〉 파였는데) 모두 분트의 요구를 거부하자 분트는 당대회에서 퇴장해서 독자적인 길을 갔다가 독자적으로 몰락했습니다. 이런 분리주의의 문제점은 뒤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차별에 반대하는 투쟁, 즉 평등을 위한 투쟁은 자본주의에서는 성공적 결말을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사회주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래서 러시아 혁명 후에 레닌은 다음과 같이 거듭거듭 지적했습니다.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난 지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평등을 지지하는 부르주아지의 온갖 선언문이 넘쳐나는데도, 여성의 형식적·법률적 평등이라도 실현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는 단 한 군데도 없다.”

이상으로 차별 문제에 대한 레닌의 견해를 요약 정리해 봤습니다. 이제 이것이 오늘날 어떻게 적용 가능한지, 어떤 의미나 적절성이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이 모든 차별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는 레닌의 주장이 오늘날에도 적절하다는 것은 분명하죠. 그런데 노동계급의 관점으로 차별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주장은 오늘날 평등을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들리거나 심지어 ‘독단적’ 주장처럼 들릴 것입니다.

또, 이론적으로 보면 지난 수십 년 동안 차별 반대 투쟁에서 득세해 온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조류들 — 자유주의, 분리주의, 정체성 정치, 특권 이론, 교차성 이론 — 과 레닌의 견해는 비판적 관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견해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여성 해방의 발을 내딛다 1917년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시위에 나선 러시아 여성 노동자들

레닌주의와 다른 차별 반대 이론의 차이점

먼저 자유주의적 견해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법률적 평등이든 기회의 평등이든 평등을 위한 투쟁은 계급투쟁, 다시 말해서 경제적 평등을 위한 투쟁과 분리돼서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대중성의 측면에서 이것은 이점이 있는 주장입니다. 지배계급을 가장 덜 위협하는 주장이죠. 지배계급이 위협을 받지 않으니까 당연히 타협안을 도출하기 쉬울 것이고, 이른바 ‘현실적’ 변화를 달성할 수 있는 최상의 방안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시민운동가, 사회운동가들에게 이런 자유주의적 견해는 흔히 ‘상식’처럼 들리고, 그래서 그들은 그런 견해를 따르고 그런 실천을 하죠.

그러나 이런 경우에 우리의 바람직한 자세는 제가 지난번 ‘21세기 레닌주의①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낳았는가?’ 발제에서도 말했듯이 ‘몰상식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의 ‘상식’을 우리는 거부하는 거죠.

역사적 경험을 보겠습니다. 이미 240년 전에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물론 그때 인간이 영어로 men, 즉 남성으로 기술돼 있어 여성은 빠져 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미 240년 전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건국의 아버지’들은 선언했고 그런 원칙을 바탕으로 건국된 나라가 미국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미국은 아직도 여성차별과 인종차별이 넘쳐나는 나라입니다. 심지어 대통령이 트럼프입니다. 더 말해 뭐 하겠습니까?

미국만 그런가? 프랑스를 봅시다. 프랑스는 위대한 프랑스 혁명의 무대였고 현대 민주주의의 발생지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무슬림에 대한 심각한 인종차별이 존재합니다. 또 얼마 전 파시스트 조직인 국민전선의 당수 마린 르펜이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까지 진출했습니다. 프랑스는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에도 함량 미달인 나라입니다.

미국과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를 봐도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그들 자체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평등 문제들을 다루는 데서 처참하게 실패했습니다. 단적으로 어디서나 남성과 여성의 평균 임금 사이에는 격차가 존재하죠.

자유민주주의가 이렇게 비참하게 실패한 데는 심각한 구조적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처럼 경제적 불평등에 바탕을 둔 사회, 즉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사람들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에 바탕을 둔 사회는 ‘기회의 평등’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억만장자의 자녀와 가난한 집안의 자녀 사이에 기회의 평등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일컬어 ‘전문 용어’로 “금수저”와 “흙수저”라고 이야기합니다.

둘째, 분리주의를 살펴보겠습니다. 분리주의는 언뜻 보면 자유주의보다 더 급진적인 듯합니다. 1960~1970년대 흑인운동이나 여성운동의 분리주의자들은 당시의 시대정신에 따라서 매우 급진적인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흑인 혁명, 여성 혁명, 페미니즘 혁명을 선언했죠.

그러나 전략으로서 분리주의는 근본적 약점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간단한 사실 때문입니다. 먼저 흑인 분리주의를 봅시다. 흑인은 미국 인구의 약 14퍼센트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모든 흑인이 한 명도 빠짐없이 다 나서서 투쟁하더라도 ‘흑인 혁명’으로 백인 지배 체제를 전복하는 것은 그냥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성 분리주의는 여성이 ‘쪽수’가 훨씬 많으니까 좀 다를 것처럼 보이지만, 역시 여성들만의 혁명도 현실적 가능성이 없습니다. 혁명에서는 비무장의 경제적 약자인 대중이 엄청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진 지배계급과 대결하게 됩니다. 이 대결에서 승리하려면 대중의 압도 다수가 참여해야 하고, 심지어 그럴 때조차 상투적 방식으로 국가의 물리력과 대결해서는 승리할 수 없죠. 아무리 ‘쪽수’가 많아도 기관총 몇 대만 있으면 사람들을 해산시킬 수 있습니다.

인구의 51퍼센트인 여성이 인구의 49퍼센트인 남성에 대항해서 일으키는 혁명이 일어난다고 가정해 볼 때, 지금 세계 어디를 보더라도 경제적·정치적·군사적 힘을 보유하고 있는 자들 중에 남성이 압도적으로 더 많기 때문에 그런 혁명은 성공할 가망이 없다는 겁니다.

심지어 모든 여성이 계급을 초월하고 정치를 초월해서 단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혁명이 성공하기는 힘들죠.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아시겠지만, 모든 여성이 계급과 정치를 초월해서 단결한다는 것 자체가 몽상입니다. 박근혜·최순실과 세월호 유가족 어머니들이 어떻게 단결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렇게 현실성 있는 혁명적 전망이 없다 보니까 ‘혁명적’ 분리주의는 결국 개혁주의적 분리주의로 무너져 버렸습니다. 점점 그렇게 변화해 갔죠.

그리고 직접적·제한적 개혁을 쟁취한다는 면에서 보더라도 분리주의는 효과적인 전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운동의 대중 동원 능력을 극대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제한하는 방식을 추구하기 때문이죠. 한국에서도 ‘불편한 용기’가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그런 한계를 드러낸 바 있습니다.

또, 분리주의는 그 자체의 논리 때문에 파편화를 조장하게 됩니다. 흑인은 백인과 따로 조직해야 하고, 여성은 남성과 따로 조직해야 한다면, 흑인 여성은? 흑인 여성끼리 따로 조직을 해야겠죠. 또 흑인 여성들 사이에는 동성애 혐오가 있을지 모르니까 레즈비언 흑인 여성은 그들끼리 따로 조직해야 하고, 그 안에서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가 있을지 모르니까 트랜스젠더 레즈비언 흑인 여성은 또 따로 조직을 해야 하고 ... 이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분리하다 보면 결국은 조직이 아니라 자기 혼자 남게 될지도 모릅니다.

셋째, 정체성 정치를 살펴보죠. 좀 전에 말했듯이 ‘혁명적’ 분리주의가 개혁주의적 분리주의로 무너져 내린 것과 파편화의 논리, 이 두 가지가 맞물려서 나타난 게 정체성 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정체성 정치는 이론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어쨌든 차별에 맞서 싸우는 전략으로서 정체성 정치는 자본주의 체제 전복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차별받는 집단들이 국회나 대학 강단 또는 노동조합이나 정당 등에서 공정하게 대표되도록 하는 데 점차 집중하게 됐습니다.

물론 이것 자체는 정당하고 진보적인 대의 명분이고 우리가 지지할 수 있습니다. 여성 국회의원과 교수, 흑인 노조 위원장과 시장 등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것은 옳죠. 그러나 전략으로서 이것은 지극히 제한적인 개혁주의, 일종의 최소주의적 개혁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개인의 출세 전략과 잘 맞아떨어지고, 그래서 서로 융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좀 더 생각해 보면, 흑인 시장과 여성 국회의원이 선출되고 성소수자가 교수나 경찰서장으로 임명된다고 해서 실제로 상황이 얼마나 개선될까 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습니다. 평범한 대중, 즉 노동계급 여성이나 노동계급인 흑인 또는 성소수자 등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완화될까 하는 의문도 들 수 있죠.

물론 긍정적 효과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역사적 경험을 볼 때 그 효과는 미미하고 경제 위기 같은 다른 요인들 때문에 쉽게 뒤집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례로, 오바마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러나 미국 흑인들의 빈곤율, 교도소 수감률, 또 경찰에게 살해당한 흑인의 비율이 줄어들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리고 박근혜가 한국 대통령이 됐다고 해서 한국 여성 여러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이렇게 정체성 정치의 전략에 따른 성과와, 차별받는 집단들이 집단적 대중 투쟁, 즉 흑인 공민권 운동이나 여성 운동, 동성애자 해방 운동 등을 통해 얻어 낸 성과는 핵심적 차이가 있습니다. 후자의 성과는 비록 제한적이긴 해도 훨씬 더 실질적인 것이죠.

다음으로, 특권 이론과 교차성 이론은 정체성 정치가 발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특권 이론은 백인이나 남성, 이성애자 등이 ‘노력하지 않고 얻은’ 것처럼 보이는 다양한 이점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차별받는 사람들의 경험적 현실을 합리적으로 묘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죠.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흑인 노동자는 똑같은 일을 하는 백인 노동자보다 자신이 승진 가능성은 더 낮고, 계산대에서 욕 먹을 가능성은 더 높고, 길 가다 불심검문 걸려서 체포될 가능성은 더 높고, 똑같이 체포되더라도 교도소 갈 가능성은 자신이 더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여성 노동자도 마찬가지죠. 여성 노동자는 동료 남성 노동자보다 자신이 승진 가능성도 낮고 성희롱 당할 가능성은 높고 임금은 더 낮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상대적 이점을 ‘특권’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지 아닌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어쨌든 그런 경험적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부인할 수 없죠.

그러나 분석과 전략으로서 특권 이론은 다음과 같은 약점들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다양한 이점과 ‘특권’을 묘사하지만 그런 ‘특권’의 구조적·물질적 뿌리를 이해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어찌 보면 비교적 사소한 이점과 사회의 근본적 계급 분열의 차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이 차이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셋째, 차별하는 사람의 의식과 양심에 호소하는 방식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특권 이론은 ‘남성이나 백인으로서 당신이 누리는 특권을 생각해 보라’는 요구를 흔히 합니다. 이런 요구는 좌파 활동가들이나 대학 내에서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기업 경영진이나 국가 고위 관리, 군 장성 같은 주요 지배자들에게는 별로 효과가 없을 겁니다. 기업 경영자한테 ‘당신이 누리는 특권을 생각해 보라’고 하면 아마 물컵을 집어던지고 욕을 하면서 진정한 특권이 무엇인지를 보여 줄 것입니다. [좌중 폭소]

넷째, ‘당신의 특권을 생각해 보라’는 말은 좌파 활동가들이나 대학 캠퍼스 내에서도 정치적 논쟁을 대신하거나 가로막는 구실로 작용하기 쉽습니다. 남성이나 백인이 아무리 옳은 말을 하더라도 특권 이론 지지자들은 ‘됐거든!’ 하면서 안 듣고, 여성이나 흑인이 얘기하면 그게 비록 설득력 없는 주장이어도 ‘님 좀 짱인 듯!’ 하면서 지지해 주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거죠.

다섯째, 이렇게 개인의 특권을 강조하다 보면 단결과 연대가 절실히 필요할 때, 차별받는 사람과 착취당하는 사람들 사이의 분열에 초점을 맞출 위험이 있습니다. 아까 예로 든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흑인과 백인 노동자들을 생각해 봅시다. 사용자에 맞서 단결해서 투쟁해야 하는데, 서로 네 특권과 내 특권이 어떠니 하면서 노동자들끼리 ‘특권 논쟁’을 벌이다가 제대로 싸우지 못하게 될 위험이 있는 거죠.

한국에서도 ‘정규직 특권론’과 그에 기초한 ‘정규직 양보론’이 일각에서 유행인데,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특권을 누린다고 여긴다면 피착취자들 간의 분열을 조장해 착취자의 진정한 특권을 강화해 줄 위험도 있습니다.

이제 교차성 이론을 살펴보겠습니다. 교차성 이론은 다양한 정체성과 차별들(예컨대, 인종차별이나 여성차별)이 어떻게 서로 교차하고 겹쳐서 독특한 정체성(예컨대, 흑인 여성)을 만들어 내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이런 교차성 개념은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사회적 차별에 적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 특권 이론과 마찬가지로 교차성 이론도 경험적 현실을 묘사하는 장점이 있죠. 그래서 아시아계 동성애자 남성이나 흑인 노동계급 트랜스젠더 여성은 저마다 상호 교차하는 다양한 차별에 시달린다는 점을 이해하게 해 줍니다.

또, 교차성 이론은 분리주의나 다른 형태의 정체성 정치, 또는 특권 이론과 비교했을 때 연대를 더 용이하게 해 주는 장점도 있습니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여성이든 성소수자든 장애인이든 우리는 모두 교차하는 차별들로 고통받고 있으므로 서로 단결해야 한다’ 하고 주장할 수 있는 거죠.

이렇게 교차성 이론은 분리주의 등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사회주의적 입장과 가깝거나 가까워질 수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레닌주의적 견해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교차성 이론에서도 계급 차별은 그저 여러 형태의 차별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죠.

차별과 착취의 관계

그러나 레닌을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자에게 계급은 가장 중요한 범주입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고 말했습니다. “정체성 투쟁의 역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같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이렇게 계급을 강조하면, 정체성 정치 옹호자들은 ‘그런 주장은 노동계급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부당한 처사’라고 여길 것입니다.

이 문제를 분석하려면 계급 범주와 인종, 성, 성적 지향 등 다른 범주들 사이에 기본적인 개념 차이가 있다는 점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마르크스와 레닌이 말한 계급은 착취하고 착취당하는 사회적 생산관계에서, 즉 인간 사회의 핵심 활동이 조직되는 방식에서 직접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개념입니다. 《계급, 소외, 차별》(책갈피)의 공저자 제프리 디스티 크로익스의 표현을 빌리면 “계급은 착취라는 사실의 집단적·사회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성평등이나 인종 평등을 말하거나 요구하는 것과 달리, 계급 평등은 말하거나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계급 개념 자체가 불평등하고 적대적인 관계를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계급 간 평등’이라는 말은 ‘뜨거운 얼음’처럼 형용 모순, 앞뒤 안 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별 차이나 피부색 차이 같은 자연적 차이가 사회적 차별로 바뀌는 메커니즘의 핵심이 바로 착취와 계급 관계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보면 계급 범주는 다른 범주들이 배제하는 것을 포함하고 다른 범주들이 포함하는 것을 배제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노동계급 범주에는 흑인 노동자, 여성 노동자, 흑인 레즈비언 노동자 등은 포함되지만 흑인 자본가나 여성 자본가, 레즈비언 자본가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흑인이나 여성이라는 범주에는 흑인 자본가나 여성 자본가는 포함되지만 백인 노동자나 남성 노동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런 개념 차이를 따지는 이유는 그 자체가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이런 개념 차이에 따른 배제가 전략 차이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닌이 말한 ‘노동계급의 관점’은 정체성 정치가 흔히 분열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을 투쟁 속에서 단결시키는 경향이 있고, 반대로 정체성 정치는 노동계급 정치가 분열시키려는 사람들(노동계급 정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분열을 추구합니다)을 단결시키려고 하죠. 바로 이런 전략의 차이가 중요합니다.

문제는, 특정 차별에 반대하는 직접적 투쟁뿐 아니라 더 광범한 사회 변혁을 위해서도 어떤 전략이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인가 하는 점입니다.

레닌이 말한 노동계급 관점은 사람 수와 사회적 능력의 면에서 투쟁 잠재력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다른 전략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죠. 노동계급 관점은 대중파업이나 총파업, 광범한 작업장 점거 등을 통해서 자본주의 체제의 엔진인 이윤에 타격을 가하고 그래서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높이는 장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주장하면 다음과 같은 지적이 나올 겁니다. ‘현실의 노동계급을 봐라, 이론은 좋아도 현실은 시궁창 아니냐?’, ‘노동계급 사이에 인종차별, 여성차별 등 온갖 편견이 다 있다.’ 그 자체는 틀린 말은 아니죠. 맞습니다. 노동계급 사이에 온갖 편견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착취와 차별에 시달리는 피지배계급이 되지도 않았겠죠.

하지만 그 정도를 과장해선 안 됩니다. 노동계급보다는 중간계급이나 지배계급 안에 다양한 편견이 더 우세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조직 노동계급 사이에서는 이런 편견이 훨씬 약하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에서 투쟁하는 조직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편견이 상대적으로 적기 마련입니다. 반면 지배계급은 이런 편견을 강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고 지배해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그들은 분열 지배, 다시 말해 이간질해서 각개격파하는 전략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온갖 편견과 차별을 조장하는 것이죠.

중요한 점은 투쟁 과정에서, 특히 투쟁의 최고 형태인 혁명 과정에서 노동계급 내의 편견이 대부분 극복된다는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그런 편견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치는 사회주의자와 혁명가들이 투쟁 안에 더 많이 존재할수록 편견을 극복하기가 더 쉬워집니다. 여기서 바로 다음 주제인 혁명적 당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정리 발언

청중 토론에 기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청중 토론은 저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줬습니다.

레닌이 죽을 때까지 억압과 차별에 맞서 싸웠다는 증거 하나가 바로 말년의 반스탈린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 바로 민족 억압·차별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아까 한 분이 민족 문제에 관해 레닌이 말년에 했던 말을 인용하시면서 그게 분리주의자들의 말과 비슷한 거 아니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저는 레닌이 한 말의 맥락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민족주의 문제를 추상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무 쓸모도 없다. 억압 민족의 민족주의와 피억압 민족의 민족주의를 구분해야 하고 큰 민족의 민족주의와 작은 민족의 민족주의를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에 억압 민족이 저지른 짓에 대해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태도를 바꾸거나 양보해서, 과거에 지배 민족의 정부가 비러시아인들에게 가했던 모욕과 불신과 의심을 보상해 줘야 한다.”

저는 설사 분리주의자들이 이 말을 인용했다 해서 레닌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또 분리주의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틀린 말만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전략이 문제이지, 그들이 현실의 이런저런 문제들을 지적할 때는 얼마든지 맞는 말을 할 수도 있고, 심지어 그들 중 일부가 ‘레닌의 이 말은 맞네’라고 생각해서 인용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질문하신 분이 정확히 어떤 맥락에서 얘기하신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레닌이 했던 이 말 자체는 여전히 옳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분이 말씀하셨듯이, ‘레닌주의는 차별받는 사람들이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대기주의 아니냐’라고 오해하거나 곡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레닌뿐 아니라 어떤 진지한 레닌주의자도 그런 식으로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본주의에서는 차별이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 없고, 차별의 뿌리가 계급과 착취라는 점을 설명했던 겁니다. 따라서 계급 착취가 사라지지 않으면 차별의 완전한 해소와 평등의 완전한 실현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레닌은 혁명을 차별 폐지를 위한 필요 조건으로 여겼을 뿐, 혁명이 일어나면 모든 차별이 저절로 해소될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자본주의 틀 내에서는 아무리 싸워도 차별의 완전한 폐지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던 겁니다. 따라서 이른바 ‘대기주의’와 레닌의 견해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죠. 이런 식의 곡해를 바로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성 혐오’ 논란에 대해서도 잠깐 얘기해 보겠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여성 혐오 사회’라는 말이 많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러시아 2월 혁명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한번 떠올려 봅시다.

러시아력으로 2월 23일은 서유럽 달력으로 3월 8일이었고, 이 세계 여성의 날에 러시아 여성 노동자들이 빵을 달라고 투쟁하면서 2월 혁명이 시작됐죠. 당시 여성 노동자들은 단지 여성들만의 힘으로 요구를 쟁취하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남성 노동자들이 있는 공장에 가서 그들에게 투쟁에 동참하라고 했습니다.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여성 노동자들은 눈 뭉치를 남성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장 창문으로 막 던졌어요. 그런데 만약 여성 혐오가 공기처럼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모든 남성이 여성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DNA를 타고날 때부터 갖고 있었다면, 남성 노동자들의 대응은 이런 식이었을 겁니다. ‘아니 저것들이 우리한테 눈 뭉치를 던져? 그렇다면 우리는 돌멩이로 응징을 해 주겠다.’

그러나 남성 노동자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케이! 동참한다’ 하면서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했습니다. 사실은 여성 노동자들이 남성 노동자들을 (아까 말한 것처럼) 지도한 것입니다. 투쟁에서 앞장섰다는 거죠. 그리고 바로 이런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이 러시아 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것은 여성 노동자들이 착취와 차별이 심한 사회에 살고 있지만, 단순한 희생자나 피해자가 아니라 착취와 차별에 맞서 싸울 수 있고 근본적 해결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열어젖힐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는 역사적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차성 이론이 정체성 정치보다 사회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교차성 이론이 변형된 정체성 정치’라는 질문자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제 취지는, 교차성 이론이 그나마 특권 이론이나 정체성 정치보다는 사회주의에 열려 있다는 상대적 차이를 말한 것입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계급 착취와 차별 문제에서 교차성 이론도 분명한 한계와 맹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