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법인 분할에 반대하는 투쟁을 하고 있는 이때, 30년 전인 1989년 128일 파업의 의미와 교훈을 새겨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1989년 봄 울산에서는 거리 행진과 시가전들이 연일 벌어졌다. 3월 30일 경찰 병력 1만 5000명이 육·해·공 모두에서 현대중공업 파업 노동자들을 공격했다(작전명 ‘아침이슬’). 이에 맞서 노동자들뿐 아니라 전국에서 모여든 대학생들까지 거리 전투에 참가했다. 여러 모로 ‘제2의 광주’를 방불케 했다.

경찰력 투입에 맞서 저항하는 노동자들 ⓒ출처 사회사진연구소

1987년 이후 최고조에 이른 두 강력한 운동 — 노동운동과 학생운동 — 이 연대했다. 노동자 가족들은 대책위를 만들어 시위대에게 주먹밥을 제공했다. 

힘을 자각한 노동자들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은 1988년 12월 12일 시작해 1989년 4월 18일까지 이어졌다.

노동자들은 단체협약 체결(상여금 지급과 수당 인상, 토요일 오전 근무 등)과 해고자 4명의 복직을 요구했다. 

노동자들은 현대그룹의 부를 늘려 주느라 20여 년간 배 밑바닥에서 용접을 하다 질식해 죽고, 불에 타서 죽고, 떨어져서 죽고, 다쳐서 불구가 됐다.

그런 노동자들이 1987년 7∼8월 노동자 대파업 투쟁을 체험하며 자신들의 힘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하늘 같기만 하던 회사 간부와 관리자들이 쩔쩔맸다. 노동자들의 삶에 눈길 한 번 안 주던 TV·라디오·신문이 매일 노동자 투쟁을 다루며 미주알고주알 걱정하는 것을 봤다.

대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친사측 노조 집행부를 대체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오좌불 독신자 숙소가 주요 근거지였다. 이곳에서 노동자들은 토론하고, 다른 현대그룹 계열사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모색했다.

오좌불 숙소에서 시작된 투쟁 불씨가 사업장 안으로 번져갔다. 현대중공업 사업장 내 비공식 그룹인 ‘선봉’이 발행한 유인물 〈선봉〉이 나오는 날이면 사업장 전체가 술렁거렸다. 당시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친사측이 통제하고 있었다.

1988년 11월 13일 개최된 전국노동자대회도 현대중공업 민주파 활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 3만여 명이 참가해 노동법 개정을 요구했다. 현대중공업 참가자들은 단결의 위력과 전국적 노동자 연대의 필요성을 느꼈다.

마침내 12월 12일 쟁의 행위 찬반 투표를 했다. 전체 조합원 1만 8693명 중 1만 3425명(71퍼센트)이 파업에 찬성했다.

친사측 성향의 노조 위원장 서태수는 조합원들의 열기에 떠밀려 파업을 선언했다. 서태수는 3일 만에 사측 안(생산장려금 12만 원, 수당 1만 원 인상)을 찬반 투표에 붙이려 했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투표 자체를 거부했다. 그러자 서태수는 12월 18일 회사 측과 일방적으로 정상 조업에 합의하고 잠적했다. 서태수는 현대중공업 근처 산수장여관에 사무실을 차리고 안전기획부(안기부), 울산경찰서, 친사측 대의원 등과 함께 파업 분쇄 음모를 꾸몄다. 이 자리에 당시 현대그룹 총수 정주영이 고용한 제임스 리가 있었다. 이 자는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노조 파괴 전문가였다. 요즘 악명 높은 노조 파괴 전문업체 창조컨설팅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다.

12월 20일 ‘이원건 권한대행 체제 인정 및 쟁의 계속 여부’ 투표에서 조합원 1만 716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이 며칠은 노동자 파업의 역동성을 잘 보여 줬다. 파업 투쟁을 둘러싼 다양한 입장들이 등장해 대립하다 하루 만에 사라지곤 했다.

이렇게 골리앗의 사슬이 끊어졌다. 골리앗(크레인)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세웠지만, 그와 동시에 현대그룹의 착취와 억압의 상징이었다.

파업의 정치화

노동자 투쟁이 기세등등해지는 것이 두려워, 당시 대통령 노태우와 정주영은 노동자들의 요구에 매우 강경하게 대응했다.

정주영은 파업에 밀리면 자신의 통제력이 걷잡을 수 없이 약화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노동자들의 기세를 꺾고자 했다. 정주영에게 노태우 정부는 든든한 원군이었다.

노태우는 1987년 6·29 선언 이후 ‘보통 사람의 시대’라는 가면을 쓰고 등장했다. 노태우는 1988년 취임 첫해부터 노동자 투쟁이 격화하자 위기 의식을 느꼈다. 유화적 제스처만으로는 노동자 투쟁을 달랠 수 없게 되자 채찍을 더 세게 휘둘렀다. 1988년 12월 28일 노태우는 체제 수호를 다짐하며 ‘민생 치안의 확립을 위한 특별 지시’를 발표했다. 탄압을 전면화(‘공안정국’이라고 불렸다)하겠다는 선전 포고였다.

1989년 1월 8일 새벽, 현중 사측이 동원한 폭력배 40여 명이 현대그룹해고근로자복직실천협의회 사무실 등을 급습해 노동자들을 폭행했다. 노태우 정부가 풍산금속과 모토로라 농성 노동자들을 강경 진압한 직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파업 노동자들은 시내로 행진하며 폭력 테러 만행을 규탄했다. 1월 28일 파업 노동자  7000여 명이 일산해수욕장까지 거리 행진을 했다.

언론의 편파·왜곡 보도도 노동자들을 분노케 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대규모 거리 행진을 통해 파업 투쟁의 정당성을 다른 노동자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투쟁은 정치화하기 시작했다. 

1·8 폭력 테러는 노동자 연대가 확대(정치투쟁)되는 계기가 됐다. 1월 15일 태화강 고수부지에서 ‘노동운동 탄압 분쇄 및 테러 만행 규탄 전국노동자대회’가 개최됐다. 전국에서 노동자 3만 명이 참가했다.

설 연휴가 다가오자 현대그룹은 파업 노동자들의 경제적 곤궁함을 파고들었다. 설 상여금 160만 원(당시로선 큰 돈이었다)을 지급하겠다고 미끼를 던졌다. 또, 일방적 조업 재개를 발표하고 조업에 참가하는 조합원들에게만 연월차수당을 지급하겠다고 했다. 사측의 조업 재개 방침은 파업 노동자들에게 빼앗긴 작업장을 탈환하겠다는 의도였다.

파업 노동자들은 “미꾸라지 소탕 작전”에 돌입했다. 파업 투쟁의 전열을 내부로부터 무너뜨리는 것은 배신 행위였기 때문이다. 2월 11일부터 파업 노동자들은 각 정문들을 봉쇄해 대체인력의 출입을 막았다.

그러자 2월 21일 회사 측의 사주와 지휘를 받는 노골적인 파업파괴자들인 ‘구사대’ 2000여 명이 회사 정문 앞에서 평화 시위를 하고 있는 파업 노동자들을 식칼로 찌르고,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두들겨 패는 ‘식칼 테러 만행’을 저질렀다. 경찰 병력 수천 명이 이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3월 12일 연세대에서 ‘현대 재벌 폭력 테러 규탄 국민대회’가 열렸다. 노동자와 학생 7000여 명이 집회 후 신촌 거리로 진출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1989년 3월 12일 연세대에서 열린 '현대 재벌 폭력 규탄 국민대회' 현대중공업 조합원들이 사측의 식칼 테러 만행 사진을 들고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 ⓒ출처 사회사진연구소

노태우 정부는 경찰력 투입을 본격 준비해 나갔다. “2000여 명이 집단 농성 중인 회사 안에 화염병, 중장비 등이 많아 경찰을 투입하여 진압하기 위해서는 80개 중대의 1만여 명의 병력이 필요[하다.]”

경찰력 투입이 임박하자 파업 노동자들은 중장비와 부품 등을 동원해 현대중공업 정문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정당방위를 위해 무장하기 시작했다. 최후까지 파업을 지키려는 파업 노동자들이 속속 바리케이드로 집결했다.

학생들도 연대 행동을 조직했다. 대구·영남 지역 학생들은 모금 운동을 해, 300만 원을 노동조합에 전달했다. 그리고 “만약 공권력이 개입한다면 화염병과 짱돌을 들고 전국의 현대 건물을 박살내겠다”고 약속했다.

3월 25일 부산 지역 11개 대학 대표자 300여 명이 현대중공업 파업 투쟁 지지 집회를 개최했다. 3월 26일에는 광주·전남 지역 대학생 400여 명이 현대중공업 파업 지지 울산 방문 출정식을 가졌다.

3월 30일 경찰 병력 1만 5000명이 현대중공업에 투입됐다. 그 직전에 문익환 목사(1994년 작고)가 방북하자, 노태우 정부는 그 일을 빌미 삼아 진압 작전을 개시했다.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울산 동구 곳곳에서 격렬하게 시가전을 벌였다.

결국 1989년 4월 18일 현대중공업 노조 지도부는 정상 조업 성명서를 발표하고 현장 조합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찰서로 자진 출두했다. 총 53명의 구속자와 55명의 해고자가 발생한 128일 파업은 가공할 국가 폭력과 사용자 측 테러에 의해 중단됐다.

그러나 128일 파업이 단순히 패배한 것은 아니다. 그 뒤 노조 지도부 선거에서 더 투쟁적인 집행부가 등장했고, 그해 8월 10일 구속자 석방과 해고자 복직에 관한 합의서를 쟁취했다.

128일 파업은 1987년 7∼8월 대파업 투쟁으로 고무된 노동자들이 자신의 작업장과 거리에서 벌인 투쟁들 중 가장 멀리 나아간 투쟁이었다. 정부와 사용자가 합세해 무지막지한 폭력으로 강경 대응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에 맞서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연대를 구축하면서 투쟁의 정치화를 촉진시켰다.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은 엥겔스의 유명한 말을 실현할 잠재력이 노동자들에게 있음을 보여 준 영감 충만한 투쟁이었다. “단 한 명의 부르주아를 굴복시키기 위해 그토록 오래 견디는 노동자들은 전체 부르주아지의 권력을 전복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