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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당명 개정 시도를 우려하며

노동당 새 대표단은 7월 7일 당대회에서 당명을 “기본소득당”으로 바꾸려고 한다. 당대회에 상정할 안건을 결정하는 6월 6일 전국위원회에서 당명 개정안은 압도 다수 득표로 통과됐다. 그러나 표결 전 반대 토론에 5명이나 나서는 등 내부 반대도 만만찮다.

당명 개정 논쟁의 이면에는 노동당의 전략이 무엇이어야 하는지가 놓여 있다. 최근 노동당의 세력 약화 때문이다. 노동당은 최근 당원, 재정, 인원(상근자), 선거 성적 등이 꾸준히 하락해 왔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는 기존 지방의원들도 모두 낙선해, 창당 이후 처음으로 의석이 전혀 없는 상태가 됐다.

2년 전에도 노동당은 활로를 새로 모색하자며 “사회운동정당”으로 전환하자는 혁신안을 당대회에서 채택했었다. 당명, 강령, 조직체계, 활동방식을 모두 바꾸자는 것이었다. 그 성격을 요약하면, 여전히 좌파적이지만 상대적으로 개혁주의적 성격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동당 강령은 반(反)자본주의적 성격이 약화되고 급진적 반(反)신자유주의처럼 보이게 됐다. 사회주의 지향성도 약화됐고, ‘제국주의 반대’ 같은 문구도 사라졌다.

그러나 당명에서 “노동”을 삭제하자는 안은 통과되지 못했다(당시에 “평등당”이 새 당명으로 유력하게 거론됐었다). 노동자 당원들이 당명에서 “노동”을 삭제하는 것에 강하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표단은 당명 개정 안건만 당대회 전에 철회했다.

사실 당명 개정을 추진하는 노동당 당권파는 2015년부터 당 간부층에서 우위를 갖고 당을 운영해 왔다. 따라서, 노동당이라는 당명이 고수돼 왔다 해서 그 당명이 상징하는 전략이 당 차원에서 일관되게 실천돼 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2017년 당대회 때 이뤄진 절충이 단합의 효과를 내기보다는 조직의 효율을 정체시키기만 한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2017년 당명 개정 불발 이후 찬반 양쪽 세력 다 낭패를 겪었다. 주로 당권파를 지지해 왔던 청년 페미니스트들은 당명 변경 포기에 실망해 2017년 말2018년 초(‘언더조직 논란’) 연쇄 탈당했다. 그 뒤 치러진 6월 지방선거에서는 당명 개정 시도에 가장 크게 반발한 영남권 노동벨트의 노동당 조직들이 역대 최악의 성적을 거뒀다. 현역 기초의원들마저 정의당 등에 밀려 모두 낙선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당권파는 이번에 반드시 당명을 바꾸겠다는 태세다. 신지혜, 용혜인 두 청년 정치인을 공동대표로 한 현 대표단은 당권파가 배출했고, 대표단 전원이 당명 개정을 걸고 한 팀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2년 전과 달리 대안적 당명(“기본소득당”)도 일찌감치 내놓았다. 개정 방향은 물론 그 의지도 과시한 것이다.

새 대표단은 최근 문건 2개(‘노동당 6년 전략의 평가’, ‘노동당 3년의 전략’)를 발표하고 전국 순회 토론회 등을 통해 당원들을 설득하고 있다. 문건 하나의 주제문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2017년 8월 27일에 당대회를 열어 사회운동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의[한] … 사회운동정당 노선이란 당명 개정, 정치운동 방식의 변화, 조직 체계의 혁신안을 포함한 내용이지만 이 가운데, 당대회에서는 조직 체계의 혁신안만이 현실화되었다. 즉 미완의 혁신이 추진된 것이었다.”(‘노동당 3년의 전략’)

흥미로운 건 당시 혁신안(당명, 강령, 조직체계로 표현된 중단기 정치방침 등)에서 당명 하나만이 개정되지 못했을 뿐인데도 새 대표단은 “조직 체계 혁신안만 현실화”됐다고 한다는 점이다. 사실상 “정치운동 방식의 변화”(중단기 정치방침)를 위해 당명을 바꾼다는 뜻으로 보인다.

당명에서 “노동”을 빼는 것이 단지 “브랜드”만 인기 있는 걸로 바꾸는 게 아니라 “노동 중심의 정치”를 분명하게 버리자는 것으로 보이는 이유다. 이 때문에 노동당 당명 개정 논쟁은 현 시기 좌파의 정치 전략과 관련있다고 할 수 있다.

계급 정당의 실패?

노동당 지도부는 당명 개정의 취지를 “‘노동’당 운동이 답습해 왔던 계급정당 노선”을 버리고 “사회운동정당” 전략을 채택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2015년부터 당 지도부를 맡아 온 당권파가 최근 노동당의 실천을 ‘계급정당 노선’이라고 지칭하는 게 낯설긴 하다.

당권파가 거부하는 노선은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정당 모델인 듯하다. 정당이 공식정치 영역(정치운동)을 맡고 노동조합이 임금 등 노동조건 영역(경제투쟁)을 맡는 모델 말이다. 당명 개정을 추진하는 당권파는 이 모델의 역사적 시효가 끝났다고 본다.

“노동조합과의 결합을 통한 노동조합의 지지를 얻고자 하는 성장 전략을 벗어나[야 한다.][과거에] 조합 운동과 정당 운동은 각각 계급 운동의 영역을 대표하며 … 통합이 유지되었다. 사회운동정당의 출발점은 이와 같은 계급 정당이 더 이상 불가능하거나 실효성이 없다는 인식에 기초한다.”(‘노동당 3년의 전략’)

그동안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모델로 한 한국 진보정당들의 주된 실천은 노동조합주의적 실천과 선거 중심 정치를 결합하는 방식이었다. 바로 “조합 운동과 정당 운동은 각각 계급 운동의 영역을 대표하며 … 통합을 유지”(앞의 인용문)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실천은 노동조합 운동의 부문주의를 극복하는 데에도 실패했고, 진보정당이 시간이 갈수록 선거를 의식하는 정치로 기우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런데 이를 버리자는 것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민주노총 내에서 지지 기반 만들기 등에 둔 강조점을 이제는 버리자는 것으로 읽힌다. “최근 노동당의 주요 전략 사업은 민주노총에 개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 우리 당에 대한 조직된 노동자들의 지지를 형성하는 것에는 실패했다.”(‘노동당 6년 전략의 평가’)

사실 최근 몇 년간 노동당의 당세 약화는 노동조합 지도층 인사들이 정의당, 민주당으로 지속적으로 이탈해 온 탓이 단연 크다. 개혁주의 정당들은 노동조합 고위 상근간부층을 매개로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기 때문에,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노동당에서 이탈한 것은 노동조합 운동(민주노총) 안에서 노동당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그 이면에서 정의당 개혁주의가 성장했다.)

당권파의 제안이 좌파 정당으로서 노동자 운동에 대한 개입주의를 유지하면서도 민주노총 지도자들에게도 할 말을 하며 노동조합 지도자 의존적인 실천을 벗어나자는 취지라면 공감되는 바가 크다. 좌파인 노동당 당권파의 문제의식에는 그런 취지도 있긴 할 것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형태는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을 분리시키려는 경향이 있다(다양한 경제·사회 영역에서의 정치 배제 논리). 그 한 가지 목적은 정치와 경제 둘 다를 지배하는 계급 권력에 대한 도전이 선거 정치 이상이 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혁주의 정당과 노동조합들이 이런 분업 실천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 국가에 자기 자신을 적응시키는 처사다. 자본주의 국가에 도전해 그것을 타도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당 당권파의 강조점이 그런 개혁주의적 정치/경제 분업을 타파하는 당을 만들자는 취지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사회운동정당 노선은 신자유주의의 노동시장 분할과 불안정 노동의 확산, 공장 단위로 조직된 산업노동자층의 약화와 노동조합 조직률의 저하, 이에 따른 노동자운동의 영향력 저하, 사회운동 방식의 변화 등의 조건에 대응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선 전환을 뜻하는 것이었다. 또, 기존의 주체 호명 방식의 운동을 벗어나, 신자유주의 종식을 목표로 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기하는 의제 중심의 사회운동을 형성하자는 결의이기도 했다.”(“노동당 6년 전략의 평가”)

노동당 당권파는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기술 변화 때문에 노동자 운동이 위축되고 약화됐다고 본다. 노동자들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그저 피해 대중으로 전락할 뿐이라면 전략적 주체가 될 자격이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실제로 노동당 당권파는 신자유주의 종식을 목표로 한 피해자 대중의 연대를 추구해 왔다). 실제로 20세기 후반 이후 기존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나 주류 노동조합 운동이 약화돼 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나 기술 혁신에 따른 불안정 노동 증대가 거부할 수 없는 필연적 자연법칙 같은 것이기 때문은 아니다.(이 문제를 여기서 다 다룰 순 없다. 상세한 논의는 “신자유주의가 노동계급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4차 산업혁명이 노동의 미래를 바꿀까?” 시리즈를 참조하시오.)

그 이유는 오히려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노동조합 연맹체들이 신자유주의적 개악 시도에 저항하기는커녕 거듭거듭 굴복하며 수용해 왔기 때문이다. 가령 독일 사민당 슈뢰더는 “신(新)중도”를, 영국 노동당의 블레어는 “제3의 길”을 표방하며 실제로는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였다. 바로 이런 배신의 역사가 누적되면서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정치적 신용을 잃었고 노동자 당원수도 감소했다.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거나 노동조건이 악화돼 노동조합 조직률도 하락했다. “사회자유주의”, “극단적 중도” 같은 용어들은 이런 중도좌파들의 배신과 실패를 설명하려고 고안된 신조어들이다.

이런 역사를 살펴보면, 노동당 당권파가 노동운동의 약화를 그저 신자유주의와 기술 혁신의 필연적 결과물인 듯 취급하는 건 옳지 않다. 사회민주주의의 모순과 한계, 배신이 드러난 역사에 침묵한 채 노동과 거리를 두는 것은 실제로는 온건화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실제로 노동당 당권파는 기본소득으로 사회를 변화시키자면서, ‘높은 조세를 통한 사회화와 사회 임금(기본소득) 지급’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중반의 복지국가 사회민주주의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적어도 노동당이 내놓은 전망치고는 온건한 듯한 게 사실이다. “토지, 생태환경, 축적된 지식, 금융, 네트워크 등 공유부의 확대에 관한 현대적인 논의는 자신의 노동에 근거한 소득이라는 이념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사적으로 전유된 공유부를 정치공동체가 환수하여 평등하게 분배하는 제도, 곧 배당으로서의 기본소득에 대해 충분한 정당성을 제공한다.”(‘3년의 전략’)

노동계급 다수를 대표하려 했던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실패를 계급의 실패와 등치시키는 것도 곤란하다. 당과 계급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반영한다. 당과 계급을 동일시하는 것은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아나키즘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당이 계급(운동)을 나타낸다고 본다면, 2010년대 경제 불황기에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노동계급 운동에 맞춰 원칙과 강령을 하향시키고자 하는 유혹을 받을 것이다.

전통적 생산과 계급 모순의 해체?

노동당 당권파가 추구하는 사회운동정당의 목표는 “신자유주의 종식”이다. 달리 말하면, 당권파의 정치적 전망은 신자유주의 종식이라는 목표를 고리로 연결된 사회운동들의 접합점 구실을 하는 사회운동정당이다. 논리적으로 이런 정당은 (급진적인) 개혁주의 운동들을 수렴하는 개혁주의 정당이다. 좌파적 형태일지라도 말이다.

노동당 당권파는 사실 예전부터 ‘신좌파’를 표방해 왔다. 자율주의 이론의 ‘비물질 노동’ 개념에 친화적이고 노동계급 중심성 원칙에 비판적이다. 그래서 노동당 당권파의 사회운동정당론은 과거 1980년대 이후 서구 신좌파와 구분이 잘 안 된다.

신좌파는 소련 스탈린주의 국가의 일당 독재를 노동자 권력(마르크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으로 오해했다(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였을 뿐인데도). 그래서 (일당 독재로 귀결될 뿐인) 계급 범주를 “특권화”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사실상 자유주의적인 다원주의 정치구조를 지향했다. 이런 지향의 실천적 결론은 개혁주의 정치였다.

당권파의 최신 자본주의 분석은 ‘임금노동 대 자본’의 착취 관계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적 강탈론에 가깝다. 당권파는 이를 ‘금융 수탈 체제와 불안정 노동 체제의 결합’으로 표현해 왔다. 이 주장의 핵심은 생산 현장의 노동력 착취보다 금융회사들의 이자를 통한 수탈 같은 것이 더 중요해졌다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금융수탈체제론, 어떻게 볼 것인가”, “《알바들의 유쾌한 반란》: 어떻게 약자들의 연대를 넘어설 수 있을까”를 참조하시오.)

여기에 최근에는 플랫폼 자본들이 ‘빅데이터’처럼 본질적으로 공유 자산이어야 할 것들을 독점해 수익을 얻는다는 주장이 추가됐다. 그 때문에 물질적 노동이 부차화되고 비물질 노동이 중요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비물질 노동은 특정한 공간에 밀집돼 행해지지 않으므로, 개별화되고 불안정해진다고 한다.

대출 이자 등을 통한 수탈이나 플랫폼 자본의 ‘비물질적’ 이윤 창출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특징이 됐다면, ‘물질적 노동’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노동당 당권파는 요즘 같은 디지털 혁신 시대에는 플랫폼 자본의 이윤을 무거운 증세로 환수해 기본소득으로 배당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노동당 당권파가 노동계급 중심성을 해체하는 것, 당명에서 노동을 지우는 것, 계급이 아니라 (추상적) 개인들을 행위 주체로 보고 개인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을 가장 중요한 대안으로 여기는 것은 이런 피상적 자본주의 분석과도 연결돼 있다(바로 아래에서 다루겠다). 그리고 여기에서 신자유주의 종식을 목표로 하는 신자유주의 피해자들의 연대를 중시하는 좌파 포퓰리즘 정치가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그러나 기술 혁신이나 디지털 생산은 결코 새로운 현상도 아니고 자본주의의 고유한 모순이나 노동계급의 결정적 중요성을 전혀 해체시키지 못한다. 개별 자본이 특별이윤을 획득하려고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술 개발과 생산수단 혁신에 투자를 늘리는 경향이 있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자본주의의 역사가 기술 혁신의 역사이지만, 고용된 노동계급의 수와 비중은 꾸준히 늘어 왔다.

한국은 최근 제조업 노동자 1인당 로봇 수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그 기간에 제조업 종사 노동자는 늘었다. 전체 임금노동자 수도 꾸준히 늘어 이제 2000만 명이 넘었다.

만약 생산성 향상으로 생산량이 늘었는데도 일하는 노동자가 줄었다면 이것은 더 적은 노동자가 더 많은 생산력을 나타내게 됐다는 것, 즉 노동자들의 경제적 힘(그리고 정치적 잠재력)이 더 커졌다는 뜻이다.(물론 개별 자본이 통제하는 해당 사업장으로만 좁혀 보면 일자리 감소 위협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경제 전반의 추세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 진정으로 합리적인 사회라면, 이런 생산성 혁신의 경우에 더 많은 노동자가 더 적게 일하는 식으로 일을 나눌 것이다.)

우버나 타다 같은 플랫폼 자본이 성공하려면, 사회적으로 자동차와 운전 노동자, 통신케이블, 통신망, 스마트폰 같은 통신장비 등 물질적 생산(에 대한 투자)이 뒷받침돼야 한다. 구글 같은 검색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구글도 첨단 기술과 서버, 광고 영업, 고용 등에 물질적 투자를 해야만 한다.

그래서 여전히 일터와 아래로부터의 노동계급 정치는 중요하다. 자본주의가 나날이 강해지는 그 영역에서 자본주의는 결국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 그런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노동자들이 이제는 사회의 다수를 이루고, 도시와 사업장에 밀집해 있다.

기본소득 중심성?

한편, 각자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분절돼 있는 사회운동들이 상호 동등한 가치와 비중을 갖는다는 주장은 이론적 근거도 부실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사회운동의 “동등한 연쇄” 주장이 그저 도덕적 당위에 더 가까운 것처럼 들린다. 운동에 상대적 중요성이 있다는 것을 ‘운동 간 위계’로 보면 곤란하다. 특정 차별에 저항하는 운동의 당사자들은 부당한 차별이나 배제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제 분석에서, 그리고 정세 맥락에서 중심 고리는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정치 전략은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다는 식으로 세울 수는 없다. 그런 관점을 두고 운동주의라고 하는데, 노동당 당권파는 “사회운동들의 등가 연쇄”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본소득”을 당명에까지 반영하려고 하는 것은 특정 쟁점을 둘러싼 특정 운동에 ‘특권’을 부여하는 전략적 행위 아닌가. 노동당 당권파는 “신자유주의 종식을 목표로 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기하는 의제 중심의 사회운동”으로 기본소득 운동을 설정한다. 이를 중심으로 당이 각각의 사회운동을 건설하고 신자유주의 종식을 목표로 하는 정치운동으로 접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당권파는 신자유주의와 기술 혁신으로 고용이 줄어드는 시대에는 일자리 패러다임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 운동이 아니라 획기적인 노동시간 단축과 결합된 기본소득이 대중의 삶을 개선하고 체제를 전환할 수 있는 핵심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당이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운동과의 연대·개입에 에너지를 그만 쏟고, 기본소득이 한국 사회의 주요 의제가 되는데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기본소득 전선을 형성하고 일차적으로 내년 총선에서 주목을 받으면, 내후년 대선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한다.

“보수 야당[여당의 오타인 듯]의 정치인이 기본소득 정치의 주도권을 형성하고 있는 현재는 … 1퍼센트도 되지 않는 지지율의 정당인 우리 당의 조직적 상황에서는 기회이기도 하다. … 기본소득당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등장할 수 있는 다양한 기본소득 정치성 가운데 우리 당이 기본소득을 대표하겠다는 선언이며, 이에 따라 당명 자체가 당의 초기 성장조건이 될 수 있다.”(‘3년의 전략’)

아마 노동당 당권파가 말하는 “보수 여당의 정치인”은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재명 경기지사는 최근 기본소득 국제컨퍼런스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이 행사에는 노동당 당권파와 교류해 왔던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인사들도 대거 참여해 이재명 지사에 감사를 표했다.(노동당 당권파는 이 단체의 한국 지부인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왔다.)

노동당 당권파가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면, “기본소득당”이 주도하는 ‘기본소득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이는 대체로 이재명 지사를 비롯한 일부 민주당 정치인들과 공동 보조를 취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민주당을 “보수 여당”이라고 부르는 노동당 현 지도부가 그런 공동 보조를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취할지는 미지수다.

기본소득은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처지의 노동계급에 그 압력을 덜어 주기 때문에 노동계급에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그래서 우리 단체도 여러 해 전부터 지지해 온 요구다. 이처럼 노동자들이 지지할 만한 요구이므로 기본소득 요구를 현실화하려고 정치적 공조를 할 수도 있다. 문제는 충분한 액수를 요구해야 하고(그 점에서 노동당이 지난 총선 때에 요구한 30만 원보다 더 많은 액수를 요구해야 한다고 본다), 이런 운동들이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고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제 침체가 더 장기화하면,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도 늘겠지만, 고용 보장이나 임금 삭감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투쟁도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본 기본소득론(고용과 임금을 중시하지 않는)은 노동 현장의 쟁점과 접점을 찾기가 어렵다. 일상적 임금 투쟁이 노동자들의 각성과 조직화에서 하는 구실을 별로 인정하지도 않으니 이 어려움은 더 커질 것이다.

따라서, 성장하고 다시금 활성화되는 노동자 운동과의 접합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에서 ‘기본소득당’은 부자와 사용자들에 대한 높은 과세에 기초한 기본소득이라는 급진적 요구를 어떤 사회세력을 기반으로 쟁취할 수 있을까? 과세와 기본소득에 대한 지배계급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텐데 말이다.

기본소득 운동이 독자적인 대중적 동원력을 갖춘 것도 아직 아니다. 더구나 민주당의 기성 정치인 등과 공조를 하게 되면 이런 투쟁적 방식은 더더욱 환영받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강한 조세와 기본소득은 강한 국가를 전제로 한다. 노동계급 같은 사회세력에 의존하지 않고서 강한 국가를 목표로 하고 또 그에 의존하는 개혁을 지지한다면, 행여라도 선거정치를 더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게 아닐지 우려스럽다.

한편, 기본소득 의제가 부각된다고 해서 ‘기본소득당’이 조금이라도 그 수혜를 입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도 따져 봐야 한다. 가령 최저임금 1만 원은 2017년 대선 전에만 해도 노동당의 고유한 프로젝트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공식정치의 의제가 되고 새 정부의 공약까지 된 상황에서 (상징적 저작권을 지녔던) 노동당은 정치적 수혜자가 되지 못했다.

사회적 힘이 더 큰 세력이 저작권을 독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최저임금 1만 원 운동 사례에서 얻은 교훈 때문에, 노동당 당권파는 당명을 개정하면서까지 올인해야 기본소득 요구가 보편화됐을 때 정치적 수혜자가 될 가능성이 생긴다고 보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마 기본소득 전선 안에서 자신들이 유일하게 “해방적 기획”으로 보편적 기본소득 방안을 내놓을 테니 차별화가 가능하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노동계급을 동원하는 방식을 배격하면서 단일 쟁점에 올인하는 것이 노동당 지도부 자신이 말한 좌파적 헤게모니를 구현하는 데에 도움이 될까? 또 다른 모순을 낳을 개연성이 (그 반대 가능성보다) 더 커 보인다. 가령, 노동당 당권파는 지금부터 3년간 기본소득 쟁점화에 올인해 2022년 대선에서 성과를 얻겠다는 계획인데, 그 대선에 이재명 지사가 기본소득을 내세우면서 출마하면 노동당의 계획은 어떻게 될까?(마침 심상정 정의당 의원도 당 대표에 출마하면서 ‘기본소득’ 도입을 제안했다.)

사회주의 정치

오늘날 사회주의적 정치가 중요한 이유는 지금 자본주의가 그 근원에서 비롯한 위기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 침체를 배경으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엄청나게 자라났고, 열강의 지정학적 갈등과 충돌의 위험성도 고조되고 있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의 ‘정당성 위기’가 존재한다.

이 맥락에서 생겨난 정치적 양극화가 기존 공식정치를 지배해 온 중도(좌우)파를 약화시키고 있다. 이는 좌파에게 성장의 기회가 있다는 말이다. 물론 서구에서는 위험천만이게도 이 틈을 비집고 극우와 파시스트가 성장하고 있다.

좌파의 정치가 노동계급 운동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인 이유다. 반면, 좌파가 계급 정치에서 퇴각하는 것은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도전에서 후퇴하는 것으로, 전략적으로 부적절하다.

문재인 정부와 우파가 노동자 투쟁을 견제하려고 최근 탄압과 비방 공세를 하는 상황에서 “노동” 당명의 삭제는 마치 노동운동 안에서 계급 정치가 지지를 잃는 듯한 인상을 줘서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신자유주의가 적어도 20년간 보통 사람들을 괴롭히며 자리를 잡아 왔지만, 노동계급은 더 늘었고 노동운동은 부침을 겪으면서도 최근에는 전진해 왔다. 민주노총 조합원은 최근 3년새 20만 명가량 늘었다. 민주노총은 박근혜 퇴진 때뿐 아니라 문재인 정부에 대한 항의도 대표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노동당 당권파가 현실을 잘못 보고 노동운동에서 더 멀어지려는 것은 잘못이다. 노동당 당권파는 오히려 계급 정치를 버림으로써 절충 상태를 끝내야 한다고 보는 듯하다. “사회운동정당은 사회 변화를 이끌 주도 계급을 선험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 다양한 사회운동의 수평적 연대를 인정하며 정당을 통해 이를 등가 연쇄하여 하나의 정치적 틀과 형식 아래 묶어내는 헤게모니 프로젝트이다.”

물론 노동계급이 일상 현실에서 잘 단결해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성별, 민족, 인종, 종교, 성적 지향 등으로 천대받는 사회 집단들의 차별 문제가 계급 문제로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체계적 차별은 오늘날 자본주의 질서의 지탱을 위한 구조의 일부이다. 차별에 맞서는 투쟁들이 자본주의에 맞선 저항으로 힘을 모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는 나날의 노동력 착취(임금몫보다 더 일하는 부불 잉여 노동)에 의존해 돌아가고 있다. 이윤이 체제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분열시키는 근본적인 분단선은 계급(자본 대 임금노동)이다. 게다가 산업화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동계급은 인구의 다수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타도하려면 노동계급의 잠재력에 의존해야 한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를 타도하지 않고서는 착취와 차별의 굴레에서 해방될 수 없다. 노동계급은 생산에서의 구실과 존재 조건의 집단성 덕분에 자본주의에 일관되게 반대할 객관적 이해관계와 잠재력을 갖춘 유일한 사회세력이다. 여성에 관해 말하자면, 오늘날 적지 않은 여성들이 임금노동자인 현실은, ‘가정 돌봄과 일’이라는 이중의 부담 속에서도 노동계급 여성들이 (‘여혐 사회’의 수동적 피해자가 아니라) 이 사회의 해방자 구실을 할 잠재력을 동등하게 지녔다는 뜻이다.(이주민 다수도 그렇다.)

그러므로 좌파의 계급 정치는 노동계급을 단결시키고 의식을 선진 부위 수준으로 끌어올려 그 잠재력을 현실화하는 전략이어야 한다. 이는 피억압 대중이 받는 차별과 천대에 대한 분석과 정치를 노동계급 정치와 별도로 구성돼야 하는 것으로 보는 ‘정체성 정치’와 다른 것이다. 사회주의적 정치는 노동계급이 주도해서 차별과 천대에 맞서고 피억압 대중을 자본주의에 맞선 저항으로 이끌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계급 정치는 노동당 당권파의 주장과 달리 오히려 ‘노동계급 헤게모니 프로젝트’의 성격을 내포해야 한다.

바로 이런 사회주의적 목적을 위해서 좌파의 노동 중심 정치는 “조합 운동과 정당 운동이 각각 계급 운동의 영역을 대표하며 … 통합을 유지”하는 방식을 피하려고 한다.좌파 정당은 노동조합 투쟁과 정치를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고무하는 방식으로 결합시키려고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만 선거 정치와 노동조합주의의 기계적 결합 이상을 성취할 수 있다. 즉, 좌파가 사회민주주의적 분업론을 거부하고 생산 현장의 실천과 사회주의 정치를 결합하려는 것은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지난 몇 년간 노동당의 정치는 정치와 현장을 결합시키지도, 진정한 의미에서 헤게모니적이지도 않았다. 노동과 젠더를 불필요하게 대립시키는 급진 페미니스트 정치와 노동 정치를 실용주의적으로 절충하려다가 양쪽 모두에게서 불만만 샀다. 자기 당 대표를 “아재 정치”라고 부르는 것에서 환대나 헤게모니 정치를 읽어 내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국, 진정한 차이는 노동계급 중심성 원칙을 거부하는 노동당 당권파의 정치의 끝(목적과 목표)에는 무엇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좌파의 목표는 자본주의의 개혁인가, 자본주의의 전복인가? 사회를 변혁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글 말미에 부연 설명을 조금 보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