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정상회담 결과를 둘러싸고, 좌파 민족주의자들의 일부는 북핵 문제와 남북 관계에 전환적 계기가 됐다며 기대감을 보이고 있다.

〈자주민보〉는 이번 정상회담 결과가 “노무현 대통령의 성과”라며 추켜세우고 있다. “북핵문제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서라도 남북대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하여 부시에게 동의를 구”했고, “부시에게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합의도 이끌어내었다”는 것이다.

21세기코리아연구소도 한미정상회담이 “북미관계와 남북관계가 질적 전환을 앞두고 있다는 신호”라고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특히, 한미정상회담 며칠 후 있었던 정동영과 김정일의 면담 때문에 이런 기대감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김정일이 “7월 중에 6자 회담에 복귀할 수도 있다”고 말한 것과 남북 교류를 확대하기로 합의한 점 등이 이런 기대감을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이번 한미정상회담은 노무현이 우위에서 부시의 양보를 받아낸 그림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의 주된 의제였던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서 노무현은 부시의 뜻을 다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정상회담 사전 조율 과정에서 이 점은 충분히 예견됐다.

“동북아 균형자론”이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자, 노무현 정부는 한미정상회담 직전에 “동북아 지역의 최후의 균형자는 미국”이라고 꼬리를 내렸다.

북한 체제 붕괴 시나리오를 염두에 둔 ‘작전계획 5029’ 또한 잠시 논란을 빚더니, 금세 ‘개념계획 5029’로 이름만 살짝 바꿔 미국과 합의했다.

사전 조율 과정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매우 중요한 의제였을 파병 문제에서도 노무현은 부시에게 확고히 ‘충성’을 다짐하고 온 듯하다. 한미정상회담 직후 국방장관 윤광웅은 올해 말에도 파병연장안을 상정할 계획이고, 아르빌 유엔 청사에 대한 자이툰 부대 경계 업무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현재 조지 부시는 미국 국민의 60퍼센트가 이라크에서 미군이 철수하는 것을 지지하고 있는 상황 때문에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은 이라크 점령에 한국군이 더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을 약속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조지 부시의 구원투수 구실을 자처한 셈이다.

한편, 이번 정상회담이 북핵 문제에 대한 전환적 계기가 될지도 미지수다. 이라크에 발목 잡힌 미국은 최근까지도 북핵 문제를 전혀 진척시키지 못한 채, 북핵 문제 유엔 안보리 회부 협박과 6자 회담 복귀 설득 사이를 왔다갔다하기를 반복해 왔다.

이 점에서, 이번 회담에서 부시와 노무현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용납할 수 없다면서도 그와 동시에 북핵 문제를 ‘평화적’이고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합의한 것은 기존 미국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노무현은 얼마 전 미국이 북한을 위협하기 위해 스텔스 전투기 15대를 남한에 배치한 것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다만, 한미정상회담 직후 정동영과 김정일이 남북 관계 개선 방안에 대해 합의한 점 때문에, 남한 정부의 노력으로 북핵 문제에 대한 진전이 있는 것 아닌가 하고 기대감을 가질 법하다.

그러나 이번 남북 합의 사항들은 대체로 남북 교류에 관한 내용들에 국한돼 있고, 6월 21일부터 시작된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도 북핵 문제에 대해서는 진전이 없을 듯하다.

사실, 정동영과 김정일의 면담에서 오간 북핵 문제와 북미 관계에 관한 발언들의 실 내용은 기존과 크게 달라진 바 없다.

김정일의 6자회담 복귀 발언은 기존의 ‘조건부 복귀’ 입장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이번 면담에서 김정일 자신은 북한의 6자회담 복귀 여부는 어디까지나 미국이 북한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미국과 수교가 이뤄지면 중·장거리 미사일을 모두 폐기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김정일의 발언도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북한은 5년 전 클린턴 행정부 말기에도 미국이 보상해 준다면 미사일 계획을 중단하겠다는 제의를 한 바 있다.

더 큰 난관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북한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용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정동영과 김정일의 면담에서 김정일이 미국에 태도 변화를 요구하자 콘돌리자 라이스는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지 않기 위한 구실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미국과 북한의 화해에 대해 희망 섞인 관측을 할 법도 한 미국내 비둘기파 북한 전문가 셀리그 해리슨조차 이렇게 평가했다. “김 위원장 발언은 (북한의) 기존 태도에서 벗어난 게 하나도 없고, 부시 행정부 역시 마찬가지여서 회담이 재개되더라도 그 앞날은 매우 불투명하다.”

한반도 평화는 남한과 북한의 협상을 통해서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미국은 경쟁 제국주의 강대국들에 맞서 동북아시아에서 자신의 맹주권을 유지하기 위해, 북한에 전면적으로 양보하지 않은 채 대북 압박을 지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국주의 세계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국제적인 반제국주의 투쟁만이 한반도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진보 진영은 남한의 외교력이나 북한의 군사력에 기대기보다는, 미국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인 이라크 점령과 한국군 파병에 반대하는 투쟁을 굳건히 건설함으로써 한반도 평화를 위한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