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파탄 난 결혼 관계를 껍데기만 유지하게 하는 유책주의 ⓒ출처 <SBS뉴스>

얼마 전 영화감독 홍상수 씨의 이혼 소송이 기각됐다. 법원은 홍상수 씨가 배우 김민희 씨와 혼외 관계를 맺어 혼인 파탄에 책임이 있는 ‘유책’ 배우자이기 때문에 이혼을 청구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한국 법원은 혼인 파탄에 책임이 있는 배우자는 이혼을 청구할 수 없다는 ‘유책주의’를 원칙으로 삼아 왔다. 2015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찬성 7명, 반대 6명으로 또다시 유책주의를 고수했다. 

2015년 간통죄 폐지는 대중의 의식 변화를 매우 뒤늦게야 반영한 것인데, 그 뒤에도 유책주의가 남아 여전히 성인 남녀 이혼 자유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러나 결혼과 이혼은 개인의 온전한 선택이 돼야 한다. 그 이유가 성격 차이이든, 경제적 문제든, 애정이 식은 것이든 더는 혼인 관계를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국가가 관계 유지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대체로 유책주의는 이미 깨진 혼인 관계를 껍데기만 유지하게 한다. 예컨대 시부모와의 갈등, 경제 사정 때문에 가출해 28년 동안 별거한 여성이 이혼을 청구했을 때 법원이 유책 배우자라는 이유로 이혼을 불허한 경우도 있다.

그래서 2015년 대법원 판결에서 유책주의에 반대한 대법관들은 혼인 관계가 실제로 깨졌다면 이혼을 허가하는 ‘파탄주의’가 현실적이라고 주장했다.

유책주의는 흔히 당사자들의 감정의 골을 더 깊게 만든다. 법정에서 배우자가 혼인 파탄에 책임이 있다고 입증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적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유책주의가 또한 ‘너 이 새끼(여편네) 한 번 당해 봐라’ 하는 복수심이나 재산 분할에 유리하게 이용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법원은 유책주의가 여성과 자녀를 보호할 수 있는 방침이라고 주장한다. ‘바람 피운’ 남성 배우자 때문에 여성이 경제적 곤궁에 빠지는 “축출 이혼”을 막겠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페미니스트 일각에서는 홍상수 씨의 이혼 소송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가령 정희진 씨는 홍상수-김민희 관계에 대해 “‘불같은 사랑’이라고 해서 책임과 윤리가 면제되는 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물론 이혼 후 생활수준이 하락하거나 혼자서 자녀를 키우며 힘들게 살아가는 여성들이 많다. 그러나 이혼을 어렵게 해서, 여성에게 불행한 결혼을 유지하며 남성의 경제력에 의존해 살라고 하는 게 대안일 수는 없다.

양육 부담을 개별 가정의 여성에게 떠넘기는 것 자체가 근본 문제이지만, 경제적 곤궁이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문제이므로 해결책이 개인들에게 떠넘겨져서도 안 된다는 점도 중요하다. 남성 개개인이 위자료와 양육비를 충분히 지급해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그런 경제적 여력이 없는 노동계급 남성들도 많다.

그러므로 국가가 이혼 가정의 자녀 양육 비용이나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적극 지원하도록 돼야 한다. 

유책주의가 여성에게 훨씬 억압적이고 가혹하다는 점도 봐야 한다. 성과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크게 달라져 왔고, 여성이 이른바 ‘유책’ 당사자인 경우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혼외 성관계를 맺은 여성은 여전히 남성보다 훨씬 더 비난받는다. 남성의 혼외 성관계는 한 번쯤 눈감아 줄 수 있지만 여성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이중적 성도덕이 여전히 존재한다. 배우 김민희 씨가 ‘불륜을 저지른 여성’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상황만 봐도 이 점을 알 수 있다. 

유책주의가 수호하려는 일부일처 가족제도는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억압적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부일처 가족제도는 여성 차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자본가들과 자본주의 국가는 노동력 재생산을 개별 가정에 떠넘기면서 보육·복지에 투자해야 할 책임을 덜어 왔다. 이 때문에 노동계급 여성은 양육과 가사에 시달려야 하고, 경력 단절이나 저질 일자리를 감수해야 한다. 남성 노동자들은 부양 책임 때문에 (전보다) 더 오래 혹사당한다.

유책주의는 이런 가족제도를 강화하고 성적 보수주의를 부추기는 역할을 한다. 유책주의는 파탄주의로 바뀌어야 하고, 온전한 이혼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

이혼과 성적 자유를 위한 투쟁은 이를 가로막는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투쟁과 연결돼야 한다. 러시아 혁명 직후 노동자 정부는 (다른 여성 해방 조처들과 함께) 누구든지 원하면 이혼이 가능하도록 했다(한쪽의 의사만으로도 이혼이 가능했다). 이는 노동계급의 혁명이 진정한 여성·성 해방을 이룰 수 있는 잠재력이 있음을 힐끗 보여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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