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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가 달라지고 있다

아르헨티나가 달라지고 있다

  이정구

 지난 7월 19일 델라루아 정부의 초긴축 정책에 항의하는 하루 총파업이 벌어져 아르헨티나 산업은 완전히 마비됐다. 공공 서비스, 버스, 철도, 항공기 운항이 중단됐다.

 아르헨티나 노동총연맹(CGT)이 주도한 이번 총파업에는 거의 모든 조합원들이 참가했다. 참가율이 95퍼센트에 달했다. 공무원 임금을 13퍼센트 삭감하고 연금 생활자들의 연금을 삭감해 재정 적자를 줄이려는 신임 재무장관 도밍고 까발로의 계획이 총파업의 도화선이 됐다.

 아르헨티나 노총은 "정부가 임금과 연금 삭감 등을 통해 올 하반기 15억 달러에 이르는 재정 지출을 줄이면 가뜩이나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노동자와 연금 생활자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고 말 것"이라며, "정부는 외채 위기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지 말라"고 주장했다.

 한 노조 지도자는 델라루아의 긴축 계획이 1976년 군부 쿠데타 이래 민중에 대한 최대 공격이라고 비난했다.

 지난 3월 총파업으로 경질된 전임 로페스 머피에 이어 재무장관이 된 도밍고 까발로는 카를로스 메넴 정권에서 1991∼1996년 동안 재무장관을 지냈던 자다. 당시 그는 기업주들 사이에서 아르헨티나 경제 "기적"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칭송받았다.

 지난 3월의 신자유주의 계획과 마찬가지로 이번에 까발로가 내놓은 긴축 정책도 아르헨티나 기업주들과 국제 금융 자본가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초긴축 정책과, 아르헨티나 페소화를 미국 달러에 연동시키는 고정환율제를 실시하겠다고 해외 투자자들에게 약속했다.

신자유주의

 아르헨티나를 포함한 이른바 "신흥 시장"들은 1990년대 초반에 호황을 누렸다. 서방의 투기 자본들이 단기 차익을 노리며 라틴 아메리카로 몰려왔다.

 그러나 1990년대 하반기에 신흥 시장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1994∼1995년에는 멕시코에서 금융 위기가 발생했고, 1997∼1998년에는 동남아 국가들이 위기를 맞이했다. 이어서 1998년 8월에는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했고, 1999년 1월에는 브라질이 국가 부도 사태 일보직전까지 갔다.

 페르난도 델라루아는 집권하자마자 경기 침체와 정치 부패의 해결을 약속했다. 그러나 경제 상황은 오히려 더 나빠졌고, 부패 또한 끊이지 않았다. 작년 5월에는 델라루아 정부의 첫 재무장관이 재정 지출 삭감 계획을 발표하자 대중적 항의가 빗발쳤다. 지난해 10월에는 부패에 대한 항의 때문에 부통령이 사임해야만 했다.

 아르헨티나는 작년 말까지 18개월 동안 계속 경기 침체를 겪었고 통화 가치는 곤두박질쳤다. 그러자 국제 금융 자본가들은 아르헨티나가 채무 불이행을 선언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작년 12월 IMF는 4백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혹독한 초긴축 정책들을 요구했다.

 올해 3월이 되자 아르헨티나 상황은 더 절박해졌다. 터키가 금융 위기에 직면해 IMF한테서 구제금융을 신청하자 국제 금융 자본가들은 다음 차례가 아르헨티나가 아닐까 하고 초조해 했다. 국제금융연구소는 올해 아르헨티나가 1퍼센트밖에 성장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도 이조차 상당히 낙관적인 예측치라고 경고했다.

 델라루아는 국제 금융 자본가들의 압력에 따라 초긴축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두번째 재무장관이 된 로페스 머피가 올해 공공부문 예산을 20억 달러 삭감하려는 계획을 발표하자 또다시 커다란 저항이 일어났다.

 학생과 교사들이 동맹휴업과 파업을 하며 학교와 주요 도로를 점거했다. 노동자, 실업자, 연금 생활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 곳곳에서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결국 델라루아는 신자유주의 계획을 철회해야 했고, 로페스 머피는 공공부문 재정 삭감을 발표한 지 3일 만에 물러났다.

 아르헨티나 위기의 책임은 노동자와 민중이 아니라 사장들과 IMF와 이를 앞세운 국제 금융 자본가들한테 있다.

 미국에서 사장들한테 영향력 있는 잡지 〈포브스〉조차도 "IMF는 아르헨티나 위기에 책임이 있다. IMF는 아르헨티나가 1995년에 세금을 인상하도록 했고, 경제 성장을 가로막아 외채를 갚지 못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아르헨티나의 3월 위기에 대해 IMF 출신인 제프리 삭스조차 이렇게 말했다. "지금 더 큰 문제는 구제금융이 아르헨티나를 구제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정부 지출을 줄이고 세금을 늘리라는 IMF의 권고는 위기를 더 심화시킬 것이다."

 1999년 12월 델라루아는 전임 대통령 메넴에 대한 불만 때문에 당선됐다. 하지만 델라루아는 당선되자마자 전임자와 꼭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계속 추구했다.

페론주의

 역사적으로 아르헨티나 기성 정치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등장했던 군부 지도자 후안 페론을 지지하는 페론주의와 페론주의에 반대하는 "급진당"으로 나뉘어 있었다.(급진당은 실제로는 전혀 급진적이지 않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들의 정당이다.)이들 각각은 상이한 부문의 사장들한테서 지지를 얻고 있었지만, 페론주의자들은 노동조합 지도자들한테서도 지지를 얻고 있다.

 1983년 군사정부가 무너지고 등장한 알폰신과 지금의 델라루아가 속한 급진당이든 페론주의자 메넴이든 노동자와 민중을 공격하고 사장과 국제 금융 자본가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데에는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도 노조 지도자들은 페론주의가 급진당보다 더 낫다는 착각을 조장했다.

 페론주의의 주인공 후안 페론이 집권할 당시 아르헨티나는 경제가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치 상황은 매우 억압적이었다. 세력이 성장하고 있던 국가 관료들은 노조 지도자와 재계 지도자들을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두었다.

 한편, 경제가 성장하자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 활발해졌고, 실질 임금이 해마다 올랐으며, 직장위원회나 공장위원회 등과 같은 현장 노조 조직들이 확대됐고,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노동법이 통과되기도 했다.

 페론은 투쟁에 나서는 노동자들을 공격하여 분쇄하려 하기보다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매수하여 체제의 틀 내에 안주하도록 했다. 페론의 이러한 책략은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활동을 용인해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경제 성장이 멈추면서 수출이 붕괴하고 실질 임금이 격감하자 페론은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1955년 아람부루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페론을 몰아내기 2년 전부터 이미 페론주의는 몰락했다. 그 뒤에도 페론주의를 자처하는 많은 민간 정부들은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낮추려 했다.

 아르헨티나 경제는 1960년부터 회복되어 1970년대 중반까지는 그럭저럭 4퍼센트 정도의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1970년대 중반 세계적 위기가 닥치자 아르헨티나 지배자들은 비효율적인 중공업 시설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 갈림길에 봉착했다. 중공업에 중요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던 군부는 아르헨티나 경제가 자유시장 경쟁에서 위기에 봉착하자 소련식 폐쇄적 국가 자본주의 모델을 따랐고 제한적이나마 코메콘(공산권경제상호원조회의)과 물물 교환을 했다.

 1976년 군부 쿠데타가 아르헨티나 지배계급한테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주된 원인은 노동자 투쟁을 진압하여 '평화'와 '사회 질서'를 회복해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부가 지배하면서 경제는 쑥대밭이 됐다. 군부는 국영부문에 대해 강력히 통제하는 한편으로, 민간부문에 대해서는 통화주의(신자유주의) 정책을 펴, 잘 나가는 일부 기업만이 생존할 수 있었고 나머지 대부분의 기업들은 빈사 상태에 빠지거나 문을 닫았다. 1976∼1980년에 산업 생산은 4분의 1이나 줄어들었고, 외채는 70억 달러에서 400억 달러로 늘어났으며, 임금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알폰신

 말비나스 전쟁(서방은 '포클랜드 전쟁'이라고 부른다)이 끝난 직후 군사혁명평의회가 무너지고 1983년에 알폰신이 등장했다. 그는 등장하면서 외채를 갚지 않겠다는 '좌파적' 미사여구를 사용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본색을 드러냈다.

 알폰신 정부에서도 경제는 여전히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인플레는 수백 퍼센트였고, 외채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였다. 알폰신은 IMF와의 협상을 통해 외채 상환을 연기하는 한편, 임금과 물가를 동결해 인플레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조치는 노동자들의 고통 위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초긴축 정책, 높은 실업률, 실질 임금의 감소로 인해 1986년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은 1983년에도 미치지 못했다.

 지금의 델라루아와 비슷하게 알폰신은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추구하는 데서 몇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첫째, 정부의 재정적자 규모를 줄이기 위해 군사 정권 때 급속하게 비대해진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공공부문에서 특별히 강력한 노조 지도자들이 설사 비민주적이고 부패했다 할지라도 조합원들에게 임금 인상을 제공함으로써 수동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공무원 임금 삭감과 연금 생활자들에 대한 공격 등 공공부문 구조조정은 노동자들의 이익을 보호해야 하는 노조 지도자들로부터 저항을 받았다.

 둘째, 군부가 방위 계약 등의 형태로 공공부문과 연관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공공부문에 대한 공격은 군부의 반발을 부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초긴축 정책은 노동자들의 저항뿐 아니라 지배계급의 분열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중반은 초긴축 정책과 생활수준 급락으로 노동자들에게는 매우 힘든 시기였다. 약 18개월 동안 총파업이 7번이나 있었지만 수동적이었고 또한 효과적이지도 못했다. 경제가 침체 상태였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파업을 해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별로 없었다.

 알폰신에 대한 대중적 불만 덕분에 1989년 선거에서 메넴이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메넴도 전임자에 비해 다를 바 없었다.

전망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은 1970년대 중반에 커다란 패배를 맛보았다. 이로 인한 사기 저하는 1983년에 군사독재 정부가 무너진 뒤에도 치유되지 않았다. 1990년대 들어 집권한 정부마다 노동자들을 공격했고 노동자들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러한 감정은 매우 관료적인 노조 지도자들에 의해 조장되고 강화됐다.

 하지만 지난 18개월 동안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은 그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노동자들은 여섯 번의 총파업을 벌이며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실업자와 함께 대중 집회를 가졌다.

 노동자들의 저항과 투쟁은 남미의 다른 나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에서도 계급적 분열과 갈등이 두드러짐을 보여 준다. 얼마 전 아르헨티나 총파업은 남미에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한 가장 최근의 투쟁이었을 뿐이다. 그 전에도 콜롬비아, 에콰도르, 볼리비아, 과테말라 등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파업, 시위, 폭동이 일어났다. 남미의 많은 나라들에서 일어난 저항 운동들은 계급간 적대에 기초해 있다. 이 때문에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강력한 저항과 새로운 대안을 위해서는 진정한 계급 정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