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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민(1976~2019) 동지를 기리며

노동자연대 회원들과 〈노동자 연대〉 신문의 독자들, 책갈피 출판사 관계자들과 독자들께 슬픈 소식을 전합니다. 지난해 여름 암 투병을 시작한 이승민 동지가 몇 시간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곁을 지킨 김종환 동지가 전하길, 이승민 동지는 나중에라도 기회가 되면 이 말을 꼭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나를 챙겨 준 노동자연대 단체에 매우 고마웠습니다.

“내가 혁명적 사회주의자인 게 자랑스럽습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인 덕분에 죽음마저도 매우 의연하게 맞이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덧붙이기를 “반드시 ‘혁명적’ 사회주의자라고 해 줘. 그 차이가 작지 않거든.”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100점 만점에 95점이었다고 했답니다. 갑자기 찾아온 병마는 그녀의 삶을 단축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죽음을 준비할 기회를 가졌고, 이를 활용해 우리에게 용기를 전해 줬습니다.

이승민 동지는 1976년 5월 3일 서울 평화시장에서 옷가게를 하는 부모님의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옷가게에는 공장도 하나 딸려 있었는데, 그녀는 훗날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어떻게 그렇게 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이 일하고 심지어 생활하는지 너무 이상한 기분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마 당시 전태일 같은 노동자들이 일하던 곳이었을 거라고요.

그녀는 중학생 시절 전교조 교사가 이끄는 학내 독서모임에 가입했습니다. 그런데 존경하는 선생님들이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고되는 것을 보며 급진화했습니다.

학생회장이던 그녀는 다니던 학교 옆 경찰서에서 학생회장에게 수여하는 공로상을 받으러 가면서 전교조 교사들을 방어하는 구호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갔습니다. 경찰서장은 뭐 씹은 표정을 지었고, 다음 날 전교생이 모인 조회 자리에서 교장은 손찌검까지 하려 했지만 주변에 있던 선생님들에게 제지당했습니다.

청소년 이승민은 그 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알려고 집회 등에 참가했고 ‘국제사회주의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당시 중학생이던 자신과 진지하게 대화를 해 주던 매우 드문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그녀는 뉴질랜드로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그러나 혁명적 전통에 확신과 자신감을 느낀 그녀는 뉴질랜드 조직을 찾아가 가입했고 모임에도 꼬박꼬박 참가했다고 합니다.

3년 가까이 머무른 뉴질랜드 생활이 외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과일과 맑은 날씨를 좋아하는 그녀에게 뉴질랜드는 언젠가 꼭 한 번 다시 가 보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또 다른 좋은 기억은 아쉬운 기억이기도 합니다.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창립자인 영국의 사회주의자 토니 클리프가 그녀를 격려하는 편지를 직접 써서 보내 준 것이었습니다. 귀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렸죠.

대학생이 된 뒤 그녀는 뉴질랜드 조직의 도움으로 부모님 모르게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승민 동지가 남한에서 사회주의자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여권과 차량 등을 마련해 이모님도 모르게 전격 귀국 작전을 펼쳐 줬다고 합니다. 그의 손에는 등록금으로 받은 몇백만 원이 있었습니다.

귀국한 뒤 그녀는 24년 동안 한결같은 사회주의자로 살아왔습니다. 국가 탄압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에도,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던 시절에도, 반전 운동과 대안 세계화 운동에서도 언제나 그녀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동지들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가족 같은 존재였고 마지막까지도 그들과 함께라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조직 문제에서는 꼼꼼하기로 둘째가라면 서운해할 만큼 유능한 동지였습니다. 누구든 그녀와 함께하길 원했고 든든하게 여겼습니다.

그녀는 늘 자신이 이론이 부족하다고 자기성찰적으로 돌아보곤 했는데, 지난 몇 년 동안 책갈피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스스로 많은 발전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에 도움을 준 동지들에게 각별히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번역해 투병 생활을 시작할 무렵 출간된 《노동조합 속의 사회주의자들》은 오늘날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라면 꼭 읽어 봐야 할 책입니다. 적지 않은 전투적 노동자들이 이 책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녀의 첫 번역서인 《아나키즘》도 사회주의자들의 필독서죠.(이 외에도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조합 투쟁》, 《동성애 혐오의 원인과 해방의 전망》(공역) 등을 번역했고, 여러 책의 편집에 참여했습니다.)

30년을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살아온 노동자연대의 최고참 회원답게 그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전통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고인은 박근혜 퇴진 운동 당시 신문을 판매하던 사진을 영정 사진으로 쓰는 게 좋겠다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사진 속 신문에는 ‘박근혜를 구속하라’는 구호가 쓰여 있습니다. 당시 그녀는 하루에만 그 신문을 400부나 팔았습니다. 평소 책 몇 권도 무거워하던 약골이었지만 신문 200부를 들고 나가 사회주의자들의 목소리를 전하려 애썼습니다.

촛불 투쟁을 기록한 한 사진책에도 그녀의 사진이, 영국 사회주의자들의 신문에도 그녀의 신문 판매 모습이 실려 있습니다. 아마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기억되길 바랐을 것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잊힐까 걱정한다고 합니다. 그녀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녀를 기억해 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가 평생을 바친 꿈을 이어받는 것일 것입니다. 오랜 금식 끝에 사과 주스 한 모금을 마시고는 “너무 좋다”고 하던 그 표정이 잊히질 않습니다.

이승민 동지를 사랑한 많은 동지들을 대리해

장호종 드림

※ 이승민 동지를 기억하는 여러분들의 추모의 글과 사진을 신문사(wspaper@ws.or.kr)로 보내 주세요. 함께 모아 올리겠습니다.

2004년 3월 반전포럼에서 동지들과 토론을 하고 있는 이승민 동지
2005년 브라질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한 이승민 동지
2005년 브라질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한 이승민 동지
2010년 맑시즘에서 발제에 집중하고 있는 이승민 동지
2006년 민주노동당 활동 속 이승민 동지
2006년 민주노동당 송파구 기초의원 선거에 도전한 이승민 동지. 송파구 최초의 민주노동당 후보였다
2006년 3.8 세계 여성의 날 행사에 참가한 이승민 동지
세종호텔노조 목요문화제에 참가한 이승민 동지
2014년 2월 25일 ‘박근혜 정권 1년, 이대로는 못 살겠다. 2.25 국민파업대회’에 참가한 이승민 동지
호스피스 병동에서 동지들을 환하게 맞아줬던 이승민 동지
영정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이승민 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