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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글:
내가 기억하는 이승민 동지

내가 기억하는 이승민 동지는 ‘의식을 깨친 이래’ 근 30년의 생애를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살아 왔다.

27년 전 내가 국제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에 헌신하는 당을 건설하겠다며 조직에 가입했을 때, 그는 나보다 고참 회원이었다. 고1이니 고참이라고 우스갯소리도 했지만, 교복 입고 혁명적 정치 활동을 하는 그를 보며 나를 비롯한 여러 회원들이 ‘나는 저 나이 때 뭐 했나, 내가 이러려고 나이를 먹었나, 자괴감이 든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당연히 우리에게는 거의 경이로운 동지였지만, 가족에게는 ‘철부지 골칫덩어리’ 같은 존재였을 터, 그는 머나먼 뉴질랜드로 유배 아닌 유배를 떠나야 했다. 그래도 그야말로 불굴의 투지로 모든 것이 낯선 이국 땅에서 정치 활동을 계속했고 토니 클리프에게 격려 편지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우리가 ‘역시!’ 하며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일시적 ‘정계 은퇴’ 상황에서 실업자가 돼 집에서 인류의 사회주의적 미래보다는 생물학적 미래에 기여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몇 년 만에 나에게 연락해서 ‘정계 복귀’를 권유한 고마운 동지이기도 하다.

그가 뒤늦게 번역을 해 보겠다고 의욕을 발휘했을 때는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스스로 이론이 취약하다고 자평하고 있었기에 의지는 있으나 능력이 모자라서 겪게 되는 개인적 비극으로 귀결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특유의 ‘고집’과 노력으로, ‘불균등 결합 발전’이 연속혁명론의 정치경제학적 근거만은 아님을 온몸으로 입증했다. 번역의 후발 주자가 빠르게 치고 나가서 청출어람 식으로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내 일거리를 많이 덜 수 있게 됐다고 좋아하던 차에 느닷없이 암 투병 소식을 듣고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날벼락 같은 일이 있나 싶었다.

지난주에 호스피스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 내 시답잖은 농담에 여전히 쓴웃음을 짓고 스스로 걸어 다니는 걸 보고 앞으로도 몇 번은 더 볼 수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급작스럽게 떠나다니 정말 황망하고 서글프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혁명적 사회주의자 투사였고 당인(黨人)이었기에, 그는 아마 저승에서도 책을 번역하고 신문을 판매하며 혁명적 당 건설 활동을 계속할 것이다. 그렇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처럼 저승의 정치 활동보다는 이승의 정치 활동이 나을 것이므로, 내가 살아 숨 쉬는 한 나는 희망을 간직한 채 미래를 위해 투쟁하며 고인의 몫까지 다하려고 노력하겠노라고 다짐해 본다.

※ 이승민 동지를 기억하는 여러분들의 추모의 글과 사진을 신문사(wspaper@ws.or.kr)로 보내 주세요. 함께 모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