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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승민 동지가 너무 보고 싶다

2005년 브라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 가서. 뒷줄 맨 왼쪽이 이승민 동지, 앞줄이 필자인 최영준
이승민 동지가 우리 곁을 떠났다. 여러 동지들은 이승민 동지가 투병 생활을 했던 10개월 동안 한두 차례 이상 만났지만 나는 ‘나중에 봐도 되겠지’ 하며 미루다 위로 한마디 못 하고 보냈다. 너무 안타깝고 나 자신이 후회스럽다.

나는 그녀와 20년 넘게 함께 활동했다. 내가 1991년 말 한 좌파 단체에 가입했을 때, 이승민 동지는 중학생이었지만 이미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활동하며 조직 안에서 널리 회자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활동한 것은 몇 년 후였다. 나는 군복무로, 이승민 동지는 뉴질랜드 유학으로 만나지 못했다.

이승민 동지와의 첫 만남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함께 활동하면서 생긴 수많은 에피소드도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무엇보다 내가 기억하는 이승민 동지는 항상 자신을 채찍질하는 부지런한 혁명가였다.

그녀의 첫 번역 작품인 《아나키즘》이 출간된 후 격려 문자를 보냈더니 이승민 동지는 진정한 격려는 ‘읽어 보고 어색한 문장이나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것’이라며 내게 숙제를 내 주기도 했다.

이승민 동지는 항상 자신이 한 활동에 만족하지 않고 부족한 부분을 찾아 내려 했고, 이를 채우기 위해 동료들과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뿐 아니라 실천을 중시했다.

그녀가 항상 스스로 이론이 부족하다고 주장한 것도 이런 태도 탓일 게다. 하지만 이승민 동지는 이를 채우기 위해 질문을 던지고 다른 동지의 의견을 경청하고 탐구하려 했다. 이 때문에 나 자신도 항상 자극을 받았다. 이승민 동지처럼 나도 항상 이론이 부족하다는 말을 달고 살아 왔다.

이승민 동지는 자신의 삶을 혁명적 활동(과 조직)에 종속시키는 투철한 혁명가였다. 어느 날인가 내가 이승민 동지에게 “이왕 유학 간 김에 편하게 있지 뭐 하러 사지로 다시 돌아왔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그녀와 내가 속한 단체는 1990년대 내내 비합법이었고, 국가 탄압을 받았다. 이승민 동지가 몰래 한국으로 돌아온 시점에도 여전히 구속자들이 있었다.

이승민 동지는 웃으며 내게 “동지들이 너무 보고 싶었고, 한국에서 혁명 활동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녀의 말처럼 죽기 전까지 그녀는 혁명적 활동을 했고, 자신의 모든 삶을 여기에 종속시켰다.

이승민 동지가 “동지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고 했듯이, 지금 이승민 동지가 너무 보고 싶다.

※ 이승민 동지를 기억하는 여러분들의 추모의 글과 사진을 신문사(wspaper@ws.or.kr)로 보내 주세요. 함께 모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