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민(1976~2019)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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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승민을 ‘클라라’라고 불렀다. 단체 안에 동명이인이 있어서, 소통 때 헛갈리는 일을 피한답시고 스스로 되풀이해 온 습관이었다. 이승민을 그런 이름으로 부른 건 1991년 말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 중학생
당시에 나는 그와 첫 인사를 나눌 때 그의 중학생 신분을 알고 놀라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난 그 나이에 뭐 했지?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네요.”
바로 그 직후 우리 조직은 보안경찰의 급습을 받았고, 우리는 당분간 지하 깊숙이 들어가야 했다. 이후 그를 다시 보게 된 것은 5년 뒤인 1996년 12월 말, 노동법
클라라는 뉴질랜드 탈출을 위해 꾸준히 저금을 한 데다, 다니던 뉴질랜드의 대학교 등록금을 갖고 튀어, 서울에서의 초기 정착금은 충분히 있다고 했다. 그의 탈출담을 들으며 내가 받은 인상은 그가 매우 계획성과 의지력 있는 조직가라는 것이었다. 성격도 쾌활하고 낙천적인 듯했다.
와병 전까지 그는 책갈피 출판사의 핵심 조직자였다. 번역도 아주 매끄럽게 잘 해, 《아나키즘》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청천벽력이게도 지난해 늦여름쯤 그는 몇몇 여성 연예인들이 사망한 것과 똑같은 종류의 위암에 걸렸음을 통고받았다. 30대와 40대의 젊은 여성이 잘 걸리는, 전이가 빠르고 항암 치료도 힘든 ‘로렌 미만형’이라는 유형이었다.
의사들은 클라라가 연말을 넘기기도 어려울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클라라는 자기 생명을 최대한 연장시켜, 파트너인 김종환
바로 2주 전쯤에만 해도 그는 여러 달 더 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더는 항암 치료가 효과가 없어 호스피스를 알아 보고 있다는 말도 우리는 동시에 들었다.
그의 밝고 명랑한 표정 때문에 우리는 여러 달에 걸친 호스피스 생활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저께 오후 그를 문병했을 때, 그가 이른 아침부터 의식이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는 다음 날 새벽 사망한 것이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병세가 악화된 것이다. 대신에 그는 별 고통 없이 세상을 하직했다.
기독교인인 호스피스 의사분은 이승민 환자가 신심 깊은 그리스도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곳에서 승민이 너무도 담담하고 의연하고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고 있어서였다고 했다.
분명히 승민은 사망 때나, 무기한의 미래에 그리스도 재림 때 자기의 몸이 부활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그는 유물론자이자 무신론자였다. 한 번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그는 삶을 소중하게 여겼고, 삶의 의미를 추구했다. 그가 뉴질랜드 탈출 후 한국에 와서 했던 말이다. “삶이 아무리 힘들어 보여도 우리가 할 수 있고 꼭 해야만 하는 일은 있는 법이잖아요.”
43살밖에 안 된 젊은 여성이 건재하다면 그녀가 “할 수 있고 꼭 해야만 하는 일”은 많을 것이다. 클라라의 부재로 우리는 큰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클라라에게서 영감을 받아,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할 수 있고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한다면, 클라라의 죽음도 그녀의 삶만큼 소중하고 의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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