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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치열하게 살다간 승민을 생각하며

승민 동지는 내가 대학 3학년생일 때 처음 만났다. 신생 마르크스주의 조직의 신입회원이 돼 마냥 신나던 때에 중3인 이승민을 만났다. 당시 학생들의 급진화 수준이 높아서 고등학생이 혁명적 정치단체의 일원인 경우가 드물지 않았지만, 중학생의 가입은 처음 보며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승민의 친근한 모습, 적극적이고 진지한 태도가 참 마음에 들었다. 그런 그가 보이지 않아서 소식이 궁금하던 차에(나중에 뉴질랜드로 가게 됐음을 알았다), 어느 날 갑자기 단체 회원 토론회장 입구에 나타나 빙그레 웃음 짓는 걸 보고 깜짝 놀랐던 게 기억난다.

국가보안법이 맹위를 떨치던 시기라 좌파 단체 활동가라면 언제든지 감옥에 갈 수 있던 때. 실제로 내가 속한 단체 회원들은 1991년 이후 2000년까지 NL 다음으로 많은 국가보안법 구속자를 내며 혹독한 국가 탄압을 받았다.

운 좋게 국가 탄압을 피할 수 있었던 동지들도 가족에게서 활동 중단의 압박을 받아야 했다. 자식이 가시밭길을 걷지 않게 하려고 ‘위험한’ 단체로부터 자식을 떼어 놓고자 애쓴 부모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게 부모와 자식을 갈라놓는 국가보안법과 자본주의 체제의 압력이 참 원망스러웠지만, 지독히 불평등하고 불의가 가득한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분투한 선배 혁명가들의 투지를 기억하며 마음을 다졌던 동지들이 많았다. 그중 가장 나이 어린 동지가 승민이었고 당차게 10대 중반 이래 지금껏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치열하게 살다 갔다.

10개월 전 날벼락 같은 말기 암 진단을 받고나서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승민은 “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며 최선을 다해 암과 맞서 싸우겠다고 말했다. 또,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으니 후회가 없다”며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실로 그는 놀라울 정도로 투지를 발휘해 암과 싸웠다. 평소 운동은 질색이었던 그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하루 1만 보 걷기를 했다. 그를 만나면 식사 뒤 같이 호수 둘레길을 걸어야 했다. 덕분에 나도 못(안?) 하던 운동을 같이 했다.

혹시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지만, 끝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 기량이 오르던 차에 갑작스런 암 발병으로 너무 일찍 가게 돼서 참 안타깝다.

승민은 성품이 소박하고 운동과 우리 단체에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활동에 집중하고자 아르바이트도 최소한만 했다. 뉴질랜드 유학 경험이 있어서 영어 과외 수업 의뢰가 많이 들어왔지만 최소한만 하면서 활동에 집중했다. 어떻게 그 돈으로 생활할 수 있는지 검소한 생활을 하며 활동에 헌신했다. 단체에 필요한 일이 많지만 사람이 부족한 현실을 메우고자 애쓴 것이다.

사무국의 신뢰받는 성원이었던 그가 번역이라는 새로운 일에 도전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번역 글을 다듬다 보면, 번역이 참으로 힘든 일이라는 것과 끈기와 사명감이 없다면 잘하기 힘들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승민은 여러 마르크스주의 책을 번역하면서 대단한 의욕을 보였다. 자신의 번역에 공을 들였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원고도 꼼꼼하게 보며 오역을 잡아내거나 번역을 매끄럽게 고치곤 했다.

암 투병 전 7년 동안 그는 많은 번역을 했다. 단행본으로는 《아나키즘: 마르크스주의적 비판》(2013),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조합 투쟁》(2014), 《동성애 혐오의 원인과 해방의 전망》(공역, 2016), 《노동조합 속의 사회주의자들》(2018)이 있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해방론》(2015), 《계급, 소외, 차별: 마르크스주의는 계급, 소외, 여성·성소수자·인종 차별을 어떻게 설명하는가?》(2017) 등에도 그가 번역한 글이 실려 있다.

이 책들은 노동운동과 여성·성소수자 운동 등 사회운동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책이다. 착취와 차별에 맞서 싸우며 운동의 진전과 대안을 모색하는 활동가라면 이 책들을 꼭 읽어 보기를 권한다. 번역자의 노고 덕분에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승민 동지는 《사회변혁적 노동조합운동》(2015) 등 여러 책들을 편집하기도 했는데, 특히 《트랜스젠더 차별과 해방》(2018)은 촉박한 출판 일정을 맞추고자 여러 날 밤을 새우며 작업했다. 승민의 파트너인 김종환 동지가 번역한 이 책은 두 사람이 없었다면 그렇게 신속하고 매끄러운 번역으로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철저하게 하고자 애썼고 그 때문에 몸도 자주 아팠다. 몸이 아파 쉬어야 했는데도 큰 집회가 열리면 가서 신문이나 다른 간행물을 팔다가 아픈 게 도지기도 했다. 이렇게 그는 출판과 간행물 판매에 열의가 높았다. 단체 사무국 일을 오래한 사람답게 일을 꼼꼼하게 조직했다.

그는 배울 게 많은 동지였다. 또 나와도 죽이 잘 맞는 친구였다. 이 얘기, 저 얘기하다 보면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함께 일하고, 같이 점심을 먹고, 집으로 가는 같은 방향의 지하철을 타고 가며 얘기하던 때가 그립다. 그 자리엔 거의 늘 김종환 동지가 같이 있었다. 둘은 닭살 커플이었다.

힘든 투병 기간 동안 헌신적으로 돌본 종환 동지의 애정 덕분에 승민이 외롭지 않게 보낸 게 참 고맙다. 파주에 있는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겨 동지들을 자주 만날 수 없게 돼 나는 그가 외로울까 봐 걱정했다. 지난주 토요일에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승민은 웃으며 “지루할 틈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지루할 틈이 없게 승민에게 말벗이 돼 주고 돌봐 준 종환 동지에게 감사와 위로의 인사를 전한다. 두 동지의 가족에게도 위로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혁명적 열정이 가득했던 승민의 삶을 생각하며 타성에 빠지지 말고 자본주의 사회 변혁과 혁명적 조직 건설에 매진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초콜릿 먹는 승민 다람쥐같이 귀엽다 ⓒ정진희
늘 밝았던 승민 병실에서도 우리를 환하게 맞았다 ⓒ김종환

※ 이승민 동지를 기억하는 여러분들의 추모의 글과 사진을 신문사(wspaper@ws.or.kr)로 보내 주세요. 함께 모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