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20년 전인 1999년 8월 29일 민주노동당 창당 발기인 대회가 열렸다. 공식 창당대회는 2000년 1월에 열렸지만, 창당 발기인 대회가 실질적 창당이었다. 창당 발기인 대회에서 강령을 확정하고 특히 논쟁 끝에 민주노동당을 당명으로 채택했다.

민주노동당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배신과 개혁 파탄으로 생겨난 왼쪽 공백을 메우기 위해 등장했다. 1997년 12월 김대중은 36년 동안 지속된 일당국가에 대한 대중적 반감 덕분에 정권 교체에 성공했지만, 그 정부는 노동자 파업을 공격하고 미국 제국주의의 전쟁을 지지했다. 이것은 노무현 정부까지도 지속된 과정이었다. ‘테러와의 전쟁’ 동참이라는 미명 하에 김대중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노무현은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했다. 이 덕분에 민주당 왼쪽에서 노동자 정치 세력화를 위한 정치 공간이 생겨났다.

주요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부들이 ‘제3의 길’ 등 사회자유주의 ― 1990년대 이후 사회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것을 일컫는 말 ― 를 수용하고, 조지 W 부시와 네오콘이 주도한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하자 이에 대한 반발로 급진좌파 정당들이 부상한 것과 같은 정치 맥락이었다. 급진좌파는 좌파 사회민주주의에서 혁명적 좌파까지 아우르는 국제 운동의 용어였다. 영국의 ‘리스펙트’, 스코틀랜드사회당, 독일의 ‘노동과 사회 정의를 위한 선거 대안’(이후 민주사회당과 통합해 좌파당이 됐다), 프랑스의 반자본주의신당, 이탈리아의 재건공산당, 포르투갈의 ‘좌파블록’, 브라질의 ‘사회주의와자유당’ 등등. 이 정당들의 목표는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 왼쪽에서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정치 대안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부르주아 양당이 정치적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국의 정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노동조합에 기반해 민주당으로부터 독립적인 노동계 정당을 건설하는 것은 진보였다.

물론 민주노동당은 혁명적 강령이 아니라 개혁주의적 강령에 근거해 민주당 왼쪽 공간을 메우고자 했다.

사회민주주의

민주노동당은 의회를 통해 민주·사회 개혁을 법제화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자연스러운 염원을 표현한 것이자 노동조합 상근 간부층의 공식 정치 참여 염원을 표현한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이 등장하기 전에도 진보 정당들이 있었다. 예컨대, 1956년 창당한 진보당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다 같이 거부”하는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했다. 그러나 진보당은 진보 지식인들이 주도한 농민 정당이었다. 진보당은 1958년에 해산당하고, 당 지도자 조봉암은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959년 7월 31일 사형당했다. 1990년에 창당한 민중당도 기본적으로 재야 지식인 운동권이 주축인 당이었다.

과거 진보 정당들과는 달리, 민주노동당은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을 매개로 조직 노동계급의 지원을 받는다는 본래적 의미의 한국 최초 사회민주주의 정당이었다.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민주노동당을 통해 정치 세력화를 하겠다고 결정했다(“배타적 지지” 방침). 실제로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 지도자들의 조직적·재정적 지원에 크게 의존했다. 민주노동당 당원들의 압도 다수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이었다. 선거 자금의 상당 부분도 민주노총이 댔다. 민주노총은 2004년 총선 기금으로 20억 원가량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민주노동당의 투표 기반도 압도적으로 노동자들이었다. 민주노동당은 주로 노동계급 밀집 지구에서 많은 표를 얻었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노총 조합원 가운데 72.2퍼센트가 민주노동당에 투표했다.

민주노동당이 과거의 진보 정당들과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점은 당의 사회적 구성과 기반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민주노동당은 자본주의 체제에 결박돼 있었다. 당 지도자들은 의회 민주주의가 노동계급이 자기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요컨대, 민주노동당은 레닌이 말한 “자본주의적 노동자 당”, 즉 노동자 계급 조직의 지원을 받는 개혁주의 정당이었다.

흥망성쇠

민주노동당은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과 정치적 격변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민주노총이 1996년 12월부터 1997년 1월 사이에 노동법 개악에 반대해 파업했다. 그해 12월 대선에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이 ‘국민승리21’ 후보로 출마해 30만 표를 득표했다. ‘국민승리21’은 2년 뒤 등장한 민주노동당의 모태가 됐다.

다른 한편, 1997년 11월 금융 공황과 IMF 관리 체제 도입도 파업 못지 않게 노동자 대중의 정치적 각성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IMF 사태는 한국 사회가 산업화를 밟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 처음으로 겪은 미증유의 경제 공황이었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경제가 성장 일로에 있는 것이 아님을 체험했다.

여기에 2000년대 들어 새로 부활한 저항 운동 — 호텔롯데·사회보험 노동조합과 국민·주택은행 파업을 비롯한 노동자 투쟁, 미군 장갑차에 의한 두 중학생 압사 사건 항의 운동,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 반신자유주의 운동 등 — 은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의 왼쪽 공간을 메울 필요성과 압력을 창출했다.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을 출발점으로 해서 건설된 민주노동당은 처음에는 상당히 급진적인 모습을 띠었다. 민주노동당은, 서구의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는 달리, 전쟁과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좌파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모습을 띠었다. 그러다 운동이 점차 사그라들자 결국에는 개혁주의 노선에 안주했다.

민주노동당의 정치 여정 속에 나타난 부침을 살펴보자.

창당부터 대략 2004년까지 민주노동당의 성장을 보면, 개혁주의 정당이 결코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선거 득표율을 보자. 1997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당시는 국민승리21이라는 정당의 후보였다)는 30만 표를 얻었다. 2000년 창당 직후 총선 득표율은 1.18퍼센트였다.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 134만 표(8.1퍼센트)를 획득했다. 2002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는 97만 표(3.9퍼센트)를 득표했다. 2004년 총선에서 277만 표(13퍼센트)를 득표해 마침내 10명의 국회의원이 탄생했다. 창당 4년 만에 제3당으로 원내에 진입한 것이다.

당원 수도 짧은 시간에 급증했다. 1999년 7000명에서 2004년 5월 5만 2499명으로 성장했다. 창당 4년 만에 4배 성장했다.

이 시기 민주노동당의 성장은 한층 심화하는 대중의 급진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대중 급진화의 원동력은 노동자 투쟁이었다.

2000년대 들어 호텔롯데와 사회보험 노동자들을 필두로 한국통신과 국민·주택은행 노동자들이 파업했다. 2003년 10월 ‘열사 정국’에서 노동자 투쟁이 절정에 이르렀다. 여기에 더해 2004년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민주당의 노무현 탄핵에 반대하는 대규모 항의 운동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사회 이데올로기가 왼쯕으로 이동하며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가 늘어났다. 이 시기 민주노동당은 대체로 대중 투쟁을 고무하는 방향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성장의 속도만큼 위기도 빠르게 찾아 왔다. 민주노동당 위기의 근저에는 바뀐 계급투쟁 상태가 있었다.

2005년부터 노무현 정부의 개혁 배신으로 노동자 대중이 환멸을 느끼며 사기 저하를 겪기 시작했다.

그러자 민주노동당 안에서도 대중 투쟁으로는 안 된다는 잘못된 교훈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 지도부는 대중 투쟁이 아닌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제 당 지도부는 ‘데모하는 정당’, ‘반대만 하는 정당’, ‘운동권 사회단체’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부유세 같은 좌파적인 계급 간 부의 재분배 정책에서 정규직 양보론인 사회연대전략이 당 정책으로 채택됐다. 오늘날 정의당이 이 정책을 계승하고 있다. 당시 민주노동당 내 평등파 그룹이었던 ‘전진’이 사회연대전략을 주도했는데, 이들 대부분이 지금 정의당에 있다.

그러나 대중 투쟁보다 의회 활동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내달을수록 민주노동당의 위기는 더욱 심화했다.

위기의 원인과 해법을 둘러싼 당 내 논쟁도 격화됐다.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열린우리당; 현재 민주당)에 대한 태도, 북한 문제,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부패와 투쟁 회피 문제 등이 핵심 이슈였다.

민주노동당 지도자들은 우파 정당인 한나라당(자유한국당의 전신)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반대하지만, 부르주아 자유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독립적이지 못한 태도를 자주 보였다.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노무현 정부의 성공이 민주노동당에 도움이 된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이렇듯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성을 일관되게 견지하지 못하자 민주노동당 지지층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 지도자들은 열린우리당과의 공조를 통해 기성 정치 체제에서의 위상을 강화하고 싶어 했지만, 민주노동당의 기반인 노동계급 속에서는 위상이 약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 문제는, 민주노동당이 사회민주주의 경향(‘평등파’로 불림)과 스탈린주의 계열(‘자주파’로 불림)이 연합해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상황에 따라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가연성이 높은 쟁점이었다.(내부 구성이 정파 연합적이었다고 해서 민주노동당의 사회민주주의적 성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2005년 북핵 실험이 뇌관이 됐다. 평등파는 공평무사 양비론 입장이었다(미국 핵 반대, 북한 핵 반대). 반면, 자주파는 ‘북한의 자위권’이라는 식으로 대응해 사태를 악화시켰다. 국가정보원이 이런 내부 균열을 노리고 2006년 10월 ‘일심회’ 사건(민주노동당 당원 몇몇이 ‘일심회’를 구성해 북한 공작원과 접촉했다는 혐의)을 터뜨렸다. 국가정보원은 민주노동당을 친북 정당으로 비치게 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민주노총 지도자들의 비리와 투쟁 회피·배신이 잇따랐다. 이 문제는 민주노동당의 물질적 토대와 관련 있기 때문에 진정한 아킬레스 건이었다. 결국 2005년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을 둘러싼 논쟁이 첨예하게 벌어질 때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게다가 2005년 10·26 울산북구 재선거에 비정규직 확대에 합의한 전력이 있는 노조 지도자를 국회의원 후보로 내세웠다가 패배했다.

분당

내연화돼 있던 위기가 실망스러운 대선 결과(권영길 후보가 2007년 대선에서 3퍼센트를 획득했다)를 계기로 폭발했다.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대선 성적에 책임 지고 사퇴한 뒤 심상정 비대위가 등장했다. 심상정 비대위는 “민주노총당, 친북당, 운동권당”에서 벗어나자는 혁신안을 제출했다.

심상정 비대위의 “민주노총당” 극복 안은 파업이나 임금 인상 등 경제적 쟁점들은 주로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다루고, 주로 선거 문제로 여겨지는 정치적 쟁점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당 소속 의원들이 다루자는 것이었다.

이른바 정경 분업(정치와 경제의 분업)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특징이므로, 심상정 비대위의 혁신안은 민주노동당을 (좌파 개혁주의 정당이 아니라)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변모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정경 분업은 노동조합의 경제주의적·부문주의적 약점을 더한층 두드러지게 만들 것이었다.

더 나아가 심상정 비대위는 ‘일심회’ 관련자들을 제명하려 했다. 득표에 도움이 안 되는 민주노동당의 ‘친북’ 이미지를 제거하겠다는 선거주의의 발로였다. 더 근본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걸맞는 서구식 사회민주주의 정당 만들기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일심회’ 관련자 제명 기도는 국가보안법에 굴복하는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이 국가 탄압을 받는 당원들을 방어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당” 극복 안(정경 분업 강화)에 대해서는 불가피하다고 여긴 당원들 사이에서도 ‘일심회’ 관련자 제명 기도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노동자연대(당시 단체명은 다함께)는 심상정 비대위의 민주노동당 우경화 기도에 일관되게 반대했다.(당시 노동자연대는 선진 노동자들의 정치화가 민주노동당으로 수렴되는 상황과 접점을 이루기 위해 그 당에 입당하는 전술 ― 엔트리entry 전술 ― 을 사용하고 있었다.)

‘패권주의’(자주파 경향이 민주노동당의 정파 연합적 성격을 고려하지 않은 채 기계적 다수성을 행사한 것)에 대한 반발을 의식해, 자주파 경향은 당의 분열을 피하려고 처음에는 심상정 비대위의 혁신안을 수용하는 듯한 입장이었다. 그러다 노동자연대가 반대 캠페인을 벌이자 반대 입장으로 돌아섰다. 특히, 자주파는 ‘일심회’ 관련자들 제명에 크게 반발했다.

심상정 비대위의 우경적 프로젝트는 2008년 2월 대의원대회에서 패배했다. 그 직후 민주노동당은 분당했다. 이제 그 결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 분당은 단순히 좌우 분열로 설명할 수 없다. 좌파인 노동자연대가 민주노동당에 남았지만, 민주노동당의 대주주인 자주파 경향이 분열 과정에서 보인 태도는 일관되게 좌파적이지 않았다.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분명히 반대했지만, ‘민주노총 당’ 극복 안에 대해서는 모호하거나 찬성했다. 반면, 좌파 일부가 진보신당으로 갔지만, 진보신당의 본류는 사회연대전략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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