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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세력의 탄생과 발전

케븐 오븐든(Kevin Ovenden) 은 이란계 영국인으로 〈사회주의 노동자〉 신문의 상근 기자이다. 이 글은 사회 변혁에서 노동계급이 하는 결정적 구실에 대한 그의 연재 기사 중 첫번째 것이다. 두번째 것은 〈다함께〉 다음 호에 실릴 것이다.

1879년 칼 마르크스와 그의 협력자인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자신들의 정치를 이렇게 요약했다.

“지난 40년 동안 우리는 계급투쟁이 역사를 움직이는 직접적 동력이라고 강조했고, 특히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계급투쟁을 현대 사회혁명의 가장 중요한 지렛대라고 지적했다.”

지난 40년 동안 프롤레타리아(노동계급)는 산업 구성에서, 인종과 민족적 구성에서, 생활 조건에서, 그리고 조직 등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원인은 자본주의 자체의 역동성이다. 1848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끊임없이 생산을 혁신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지적했다.

오늘날 언론인과 학자 들은 흔히 지난 40년간 일어난 대대적인 산업 구조조정 때문에 노동계급과 그에 기반을 둔 정치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전통적 노동계급의 전형으로 여기는 작업장 대표 위원회와 전투적 광부 등은 마르크스가 당시에 말한 노동계급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18세기에 시작된 산업혁명의 중심은 방직 산업이었다. 산업의 중심지인 랭커셔는 농촌 지역에서 노동자들을 모집했다. 엄청난 수의 아일랜드 농민이 토지에서 쫓겨나 잉글랜드 공장으로 향했다.

19세기 중반에 리버풀과 맨체스터의 인구 중 5분의 1과 3분의 1은 아일랜드 출신 이주자들이었다. 그들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가톨릭 교회였다.

노동계급 속에서는 전통, 문화, 작업장 규모와 지역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자본가들이 이 새로운 계급을 공장으로 밀어 넣는 데 성공하자마자 산업 구조가 변하기 시작했다.

수출에서 면화가 차지하는 몫이 1830년에 50퍼센트에서 1870년에는 35퍼센트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중공업 상품이 차지하는 몫은 10퍼센트에서 25퍼센트로 상승했다. 1880년에 이르면 영국에는 50만 명의 석탄 광부가 존재했고, 1914년에는 1백20만 명에 달했다.

바로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전통적 산업 노동자의 모습이 형성됐다. 그러나 제조업 노동자의 수가 정점에 달했을 때조차 그들은 전체 노동계급의 절반에 불과했다.

19세기 내내 농업 부문이 최대 고용주였다. 주로 여성으로 이뤄진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이 가정부나 노점상이나 재봉업 등 불안정한 직업에 종사했다. 19세기 동안 대부분의 노동계급은 미조직 상태였다.

노동조합, 정치적·문화적 조직, 그리고 심지어 공통된 노동계급 이해관계를 공유한다는 생각은 새로운 노동자 집단의 형성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노동자 조직을 결성하고 공통된 이해관계라는 생각을 품게 한 투쟁은 점진적인 노조 조직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커다란 정치적 충돌 과정에서 나타났다. 1830년에 노동자들이 억압적 국가에 맞서 노동조합을 결성하려 했을 때 일련의 국지적이지만 격렬한 투쟁이 발생했다.

이러한 고립된 투쟁들이 한 가지 정치적 문제(투표권)에 집중하게 됐고, 차티스트라는 첫 번째 대규모 노동자 운동이 탄생했다.

차티스트의 패배는 반동기를 불렀다. 1850년대 영국 노동계급은 마르크스가 묘사한 노동계급의 모습인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자”와는 많이 달랐다.

당시의 노동조합은 보수적인 소수 숙련 노동자들로 구성돼 있었다. 다음 번 급진화의 물결은 그들에게서 시작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1860년대 미국 남북전쟁에서 영국 정부가 노예제 남부를 지지한 것에 대한 반발에서 탄생했다.

노동계급 지역에서 남부 지지 반대 주장이 확산됐다. 한 예로 랭커셔의 방직 노동자들은 노예 소유주들이 승리하면 원료 면화의 공급이 보장돼 방직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안정될 거라는 주장을 거부했다.

이런 의식 덕분에 1864년에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를 결성할 수 있었다.

20년 뒤 마르크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개인들이 비숙련 노동자 전투성의 폭발인 “신 노동조합 운동”에서 중심적 구실을 했다. 당시에 임시직화된 “불안정” 노동자였던 항만 노동자들도 한 부분이었다.

20세기에도 이러한 새로운 노동자 집단의 형성, 사회주의적 선동과 갑작스런 투쟁 폭발의 과정이 계속됐다.

번역 김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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