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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진보정당사 ②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2008∼2011년)

2008년 2월 3일 민주노동당 대의원대회 ⓒ임수현

2008년 2월 민주노동당이 분당하면서 두 개의 진보정당이 생겨났다 ―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두 정당 모두 본질적으로 좌파적 개혁주의 정당이었다.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이 두 정당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기반이었다.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 분당 전에 평등파라고 불린 심상정·노회찬 씨 등이 주도한 좌파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이었다면, 분당 이후 민주노동당은 자주파(스탈린주의자들)가 주도하는 개혁주의 정당이라는 모순이 있었다. 몇 년 뒤(2011년) 자주파가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유시민이 이끈 자유주의 정당, 이하 참여당 또는 참여계)의 합당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 모순이 마침내 외부로 드러난다.

아무튼 이 시기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관계는 마치 프랑스 공산당과 프랑스 사회당 내 좌파의 관계와 흡사했다. 프랑스 사회당 좌파의 주요 리더 장-뤽 멜랑숑은 2006년 사회당을 탈당해 좌파당을 만들고, 공산당과 함께 선거연합인 좌파전선을 형성하기도 했다.

민주노동당과 인민전선

2008년 2월 분당 뒤, 특히 그해 5∼6월 촛불 시위를 겪으면서 자주파(그중에서도 경기동부연합)가 민주노동당의 당권을 잡았다(그래서 경기동부연합은 “당권파”로 불렸다).

이명박 정부 시절(2008∼2012년) 민주노동당의 자주파는 참여당과의 연합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2009년 6월 정책당대회가 신호탄이었다. 이때부터 자주파는 자신들의 고유한 (인민전선: 이하 국민 연합) 전략을 민주노동당에 관철시키기 시작했다.

국민 연합 전략은 노동계급만으로는 신자유주의와 냉전 수구 반통일 세력에 맞설 수 없으므로 중간계급과 심지어 지배계급 일부와도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다. 선거에서는 부르주아 자유주의 세력(민주당)과 선거연합(당시 민주당이 야당이었기 때문에 흔히 “야권연대”라고 불렸다)을 체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사적 전통인 이런 전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주파는 이명박 정부를 “독재 정권”으로 규정하고 민주주의 투쟁에 최우선적 지위를 부여했다. 이에 따라 이명박 정부 퇴진을 당론으로 채택하는 한편, 민주당과의 국민 연합을 추진했다.

그 결과, 2009년 하반기 민주노동당과 민주당 등이 참여한 ‘야4당 연석회의’가 구성됐다. 연석회의는 이명박 정부에 맞서는 상설적 공동 대응 기구(사실상 전략적 동맹을 지향하는)였다.

진보진영이 우파인 이명박 정부에 맞서 불가피한 경우 사안에 따라 노골적인 자본주의 야당과 전술적 제휴를 맺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때조차 정치의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자면 자본주의 야당의 불철저함과 동요에 대한 비판을 삼가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당권파는 사안에 따른 전술적 제휴 정도가 아니라 민주당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전망하며 전략적 동맹을 시도했다.

이 전략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에게 상당한 선거적 실리를 안겨 줬다. 민주노동당은 150만 여 표(7.35퍼센트)를 획득했다. 진보신당보다 두 배 넘게 득표했다.(진보신당은 64만 7000여 표[3.13퍼센트]를 얻었다.) 또, 기초단체장에 3명, 광역의원에 24명 당선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분당 전) 민주노동당이 거둔 것보다 오른 성적이었다.

그러나 계급 동맹인 국민 연합 전략의 진정한 문제점은 선거(와 의회)가 아니라 계급투쟁에서 나타난다. 즉, 기본 이해관계가 정반대인 계급들 간의 동맹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의 힘을 약화시킨다. 정치 동맹자들이 곧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해고 반대 투쟁에서 이 전략의 문제점이 나타났다.

당시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쌍용자동차 노동자 투쟁을 지지했다. 당사와 당무를 모두 쌍용자동차 공장이 있는 평택으로 이동했다. 경찰 병력 투입이 임박하던 8월 2일 평택에서 민주노동당은 1000여 명이 참가한 대의원 시국 결의대회를 열었다.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수용 거부를 지지했지만, 쌍용자동차의 공기업화를 요구하기를 피했다. 민주당과의 의회 내 동맹을 의식해서였다. 민주당이 공기업화를 반대하기 때문에 입법 가능성이 없다고 본 것이다. 이 무렵 민주노동당은 심지어 은행 국유화 요구조차 포기했다. 2008년 공황의 여파로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의 많은 정부들이 은행을 국유화하고 있었는데도 그랬다.

역사적으로 국민 연합 전략은 계급투쟁의 발목을 잡아 파시즘의 승리를 저지하지 못했다. 특히 1930년대 중엽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파시즘에 권력을 내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미국에서는 공산당이 민주당의 루스벨트를 지지해 독립적인 정당 건설 전망을 최종 포기하면서 우울한 결말을 맞았다.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이런 계급 동맹 전략을 비판하며 대안으로 공동전선 전술들을 제안했다.

(1) 공동전선은 노동계급 정당들의 협력을 뜻한다. 반대로 국민 연합인 인민전선은 자본가 정당들을 포함시키는 계급 협력 전략이다. (2) 공동전선은 특정한 목표를 성취하려는 투쟁에 필요한 실천적 협정이다. 그러나 인민전선은 공통의 선거 강령과 자본주의 정부 지지를 포함한다. (3) 공동전선에서는 혁명적 좌파의 완전한 이데올로기적 독립성과 비판의 자유가 보장되지만, 인민전선에서는 그렇지 않다. (4) 공동전선은 혁명적 정당 활동의 한 부분이어서 다른 독립적 활동을 계속 수행할 수 있지만, 인민전선은 코민테른의 전체 전략이었다.

강령 후퇴

그러나 당권파는 국민 연합(계급 동맹) 전략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2010년 지방선거의 성적에 고무돼 민주당과의 선거 연합에 매진했다.

이 구상을 요약하면 이렇다. ①단계: 민주노동당 강령의 반자본주의적 요소를 삭제한다. 핵심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권을 제한”한다는 구절을 “생산수단의 소유구조를 다원화”한다는 구절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좌파적 개혁주의 강령을 주류적 개혁주의 강령으로 후퇴시키는 것이었다.

②단계: 유시민의 참여당과 합당해 몸집을 불려, 민주당과의 선거연합 교섭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다.

③단계: 민주당과 선거연합을 해 2012년 총선에서 원내 교섭단체를 확보한다.

④단계: 2012년 말 대선에서 민주당과 후보를 단일화해 연립정부에 참여한다.

당권파는 2011년 6월 19일 당대회에서 강령 전면 교체에 성공해 ①단계를 통과했다. 이제 당권파는 참여당과의 합당이라는 ②단계로 넘어가려 했다. ①단계에서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던 당내 좌파(노동자연대가 주축이 됨: 당시 단체명은 노동자연대 다함께)와 노동계 지도자들이 자주파 내 인천연합 계열과 함께, 참여당과의 통합에 반대했다.

특히, 노동자연대가 ①단계 패배의 교훈을 곱씹으며 주의 깊게 반대파 연대를 구축하려 한 것이 주효했다.

2011년 9월 민주노동당 당대회장에서 당원들이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하고 있다 ⓒ이미진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애초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분립을 극복하려고 진보대통합을 원했다. 진보 양당의 존재와 경쟁으로 말미암아 노동조합의 정치적 분열이 심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노총이 진보대통합 논의의 발원지가 됐다.

그런데 민주노동당과 참여당의 통합은 진보 양당의 통합을 심각하게 방해했을 뿐 아니라, 노동조합의 정치적 내분을 가속시킬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노조 기구와 조직 보존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까딱 잘못했다가는 민주노총 내분이 훨씬 심화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2011년 9월 25일 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 권영길 의원과 김영훈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은 지지 정당별로 편제된 프랑스의 노동조합 상황이 한국에서 재현될 위험성을 경고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그래서 어떻게든 진보 양당으로 분열이 고착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자주파 내에서도 참여당과의 통합 문제를 놓고 이견이 표출됐다.

마침내 9월 25일 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 참여당과의 통합 안건이 부결됐다.

그러나 당권파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집요하게 참여당과의 통합을 추진해, 두 달 뒤에 열린 11월 당대회에서 통합을 결정했다. 그들이 국민 연합(인민전선) 전략을 역사적 전통으로 삼고 있는 데다, 참여당까지 포함한 통합 진보정당을 건설해 선거에 대응하면 꽤 성과를 볼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선거 중심주의 앞에서 노동자 운동의 민주주의는 절차적 수준에서조차 간단히 무시됐다.

진보신당과 사회민주주의 전략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과 함께 양대 개혁주의 정당이었다. 진보신당의 주된 사회적 기반도 개혁주의의 물질적 토대인 노동조합(민주노총) 고위 상근간부층이었다. 물론 민주노동당에 견줘 노동조합의 조직적 뒷받침이 부족하거나 미약하다는 점 때문에, 진보신당의 토대가 훨씬 허약했다.

그러나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에 비해 스타 정치인들과 우호적인 지식인들이 더 많았다. 2008년 촛불 운동이 등장하자 대중적 지명도가 있는 스타 정치인들과 진보 지식인들이 대중을 진보신당으로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운동이 패배하고 경제 공황이 엄습하자 노동조합 기반이 취약한 진보신당의 정치적 존재감이 약화됐다.

당 내에 혁명가들이 소수 있었지만 진보신당의 기본 전략은 좌파적 사회민주주의였다. 사실, 2008년 2월 민주노동당 분당 전에도 평등파의 실천은 본질적으로 사회민주주의적이었다. 진보신당이 2010년 발간한 ‘진보정치 10년 평가 최종 보고서’는 이렇게 전망했다. “유럽형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를 현실적인 대안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사회민주주의 전략의 핵심에는 사회연대전략이 있었다. 진보신당은 이를 두고 ‘복지동맹’, ‘복지연합’, ‘서민복지동맹’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

민주노동당 분당 전인 2006년 말에, 당시 평등파가 사회연대전략을 제안했다가 당 안팎의 좌파적 반대에 밀려 수포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이제 진보신당이 사회연대전략을 추진하겠다고 한 것이다.

사회연대전략의 요지는 “고수익 대기업과 부유층”뿐 아니라 노동자도 사회연대의 ‘주체’로서 재정을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민연금, 고용보험기금, 노동시간 상한제 등에 대해 정규직 노동자들이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연대전략의 정치적 목표는 선거로 집권하기 위해 서민층 중간계급의 지지를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회변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진보정당의 집권이 필요하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집권을 하려면 노동계급 내부의 연대나 농민, 빈민 등 서민대중들과의 연대를 넘어서는 화이트칼라, 자영업자 등 광범한 중간계급과의 연대를 통해 다수의 지지를 획득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복지연합과 같은 중간계급과의 적극적인 연대전략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중간계급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그들을 어떻게 견인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즉, 노동계급의 헤게모니 문제가 핵심이다. 그러나 사회연대전략은 중간계급과의 연대를 위해 정규직·대기업 조직 노동자가 사용자에게 양보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전략을 내놨다고 해서 진보신당이 민주노동당에 비해 더 온건한 개혁주의 정당이었던 것은 아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구체적 실천을 놓고 보면 두 당의 좌우 구분이 직선적이지 않았다. 미국 제국주의 반대 문제에서는 민주노동당이 더 적극적이었다. 반면, 중국의 티베트 억압이나 성소수자 차별 문제에서는 진보신당이 진보적인 태도를 보이곤 했다. 하지만 쌍용자동차 점거 파업 때 두 정당 모두 민주노총·금속노조의 연대 파업을 공개 호소하지 않는 등 계급투쟁의 수준에서는 상대적 좌우를 가르기가 쉽지 않았다.

새로운 통합

2008년 초 분당 뒤에도 두 정당을 통합하라는 요구가 계속 제기됐다. 특히, 노동계 지도자들이 강하게 진보대통합을 요구했다(그 이유는 위에서 설명했다). 노동자연대도 두 당의 통합을 지지했다.

그러나 상황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민주노동당 당권파는 단지 진보신당과 통합하는 것을 넘어 유시민의 참여당까지 포함하는 합당을 밀고 갔다. 반면, 진보신당 내 ‘독자파’는 반NL을 내세워 2011년 9월 당대회에서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안을 부결시켰다.

결국 2011년 12월 민주노동당+새진보통합연대(심상정·노회찬·조승수 등이 주도한 진보신당 탈당파)+국민참여당이 통합한 통합진보당이 창당됐다.

* 다음 호에서는 통합진보당의 등장과 분열을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