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크리스 하먼 10주기:
“실천을 위한 길잡이”였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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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2010년 3월 영국과 아일랜드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존 몰리뉴가 동료인 앤디 더건과 함께 써 잡지 《혁명사》에 기고한 글이다. 존 몰리뉴는 크리스 하먼과 41년을 함께 활동했고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마르크스주의와 정당》, 《레닌과 21세기》 등의 저자이다.
2009년 11월 9일 크리스 하먼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국제 노동자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큰 손실이었다. 얼마만큼 큰 손실로 느낄지는 각자의 정치관에 따라 물론 달라질 테지만, 하먼이 주장한 종류의 트로츠키주의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 공감하지 않는 사회주의자들에게도 그는 엄연히
첫째는 그가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먼은 꽤 소수인 축에 들 것이다. 게다가 하먼은 그 50년 대부분을 유럽에서 가장 크고 활동적인 극좌파 단체의 하나―국제사회주의자들
하먼의 핵심 사상
크리스 하먼을 기리려면 그의 인격, 혁명적 실천, 지적·이론적 업적을 다뤄야 한다. 먼저 그의 실천적 활동을 다뤄 보고자 한다. 하먼이 가장 크게 기여한 영역이어서 그렇다기보다는, 실천이야말로 그의 삶의 절대적 중심이자 이론적 방향키였기 때문이다. 하먼에게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언제나 사회주의 운동을 위한 수단, 엥겔스의 말처럼 “도그마가 아니라 실천을 위한 길잡이”였다.
하먼은 왓퍼드에서 학교를 다니던 1959년 무렵에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1961년 리즈대학교로 진학한 후에는 ‘소셜리스트 리뷰’ 그룹
“우리는 이 점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하고 크리스 하먼이 LSE 구강당 연단에서 말했다. 연설을 시작할 때 항상 하는 말이었다. 강당 여기저기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하먼은 스쿠터 헬멧을 흔들면서 연설을 이어갔다. “우리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1968년은 1793년, 1830년, 1848년, 1917년, 1936년 못지않은 국제 혁명의 해입니다. 국제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30여 년의 패배와 겨울잠 끝에 부활하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혁명적사회주의학생연맹’을 발족하러 모인, 너무 일찍 산전수전을 겪어 감수성이 무뎌진 학생 좌파 청중들이 하먼의 말에 마음이 움직이는 기색을 보였다. 하먼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를 비타협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 존경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먼은 파리 코뮌, 러시아 혁명, 바르셀로나 항쟁을 결코 허투루 들먹이지 않았다. 전투적인 학생들이 1830년에 무슨 일이 있었지 하고 수군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1970년대 이후 하먼의 실천은 SWP 지도부에서 그가 한 구실을 통해 이뤄졌다. SWP는 언제나 하먼을 조직자, 거리 운동가보다는 필자, 편집자, 연사로 써먹었다. 그의 재능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먼은 실천과의 연관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그는 노동계급 투쟁, 당 건설,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에서 제기되는 온갖 형태의 실천적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은 적이 없다. 게다가 그는 죽기 직전까지 모든 운동의 주요 집회와 행진에 참가했다. 예컨대 하먼은
하먼의 개성은 SWP나 다른 정치 기구에서 단독으로 지도자 구실을 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면이 있었다. 첫째로 웅변술이 그의 다른 재능만 못했다. 하먼은 오랫동안 열심히 노력하여 상당한 연설 실력을 쌓았지만, 토니 클리프, 던컨 핼러스, 폴 풋의 언변에는 결코 미치지 못했다. 둘째, 그는 수줍음을 타고 대인관계에 능숙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하먼은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즐기는 타입이 아니었다. 셋째는 위의 성격들과 분명 연관이 있을 텐데, 자신을 지도자로 내세우기를 내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먼이 자신에 관한 것이든 특정 전술·전략에 관한 것이든 당내 투쟁에 적극적이지 않아 하먼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들이 발을 동동 구를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약점은 곧 그의 장점이기도 했다. 하먼은 조금치도 거만하지 않았고, 개인적 야심이나 엘리트주의와 담을 쌓았으며, 일부 트로츠키주의 지도자들이 보이는 패거리주의
그러나 하먼이 낯을 가리고 자신을 내세우기를 꺼렸다고만 하면 온당치 않다. 수년 동안 하먼은 나름 유명 인사였다
그러나 이런 얘기들은 그의 이론적 업적의 양과 질에 비하면 그야말로 사소하다. 물론 양보다는 질이 훨씬 중요하다. 학자들이 쓴 육중한 책이나 유행을 노린 얇은 책보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백배 천배 중요하다. 그럼에도 하먼이 남긴 저술의 방대함은 경이롭다. 웹사이트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에 실린 하먼의 글은 목차만 17페이지나 되고 450개가 넘는다. 이는 테드 그랜트
하먼의 글은 질적으로도 뛰어나다. 주요 저작이 여섯 권 있다. 첫째는 《동유럽의 관료와 혁명》
그 다음 나온 책은 《패배한 혁명》
《위기를 설명하기》
이윤율 저하 경향을 부정하는 온갖 주장에 대한 반박도 주목할 만하다.
1988년에는 《지난 번의 불꽃 ― 1968년과 이후》
《민중의 세계사》
《민중의 세계사》는 하먼의 사고에서 꾸준히 나타난 세 특징을 종합했다. 세 특징이란 고고학과 초기 인류 사회의 기원에 대한 호기심
끝으로 2009년에 출간된 《좀비 자본주의: 세계경제 위기와 마르크스의 현재성》
동시에 하먼은 ‘임박한 재앙과 최종적 위기’를 선언하라는
《좀비 자본주의》가 한 장 한 장 세심하게 쓴 ‘명작’임을 덧붙여야겠다. 가치와 사용가치를 설명하는 첫 장은 짐작하건대 마르크스 이래 그 개념을 가장 잘 설명한 글로, 그가 마르크스의 이론과 현대 자본주의 본질을 얼마나 깊게 꿰뚫고 있는지 보여 준다.
위 책들은 하먼이 40년 동안 쉬지 않고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에 쓴 주요 논문들을 기초로 삼거나, 발전시킨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 논문들 다수가 집필 당시 구체적 정세에 필요했던 정치적·이론적 문제를 다뤄 우리의 정치적 실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일부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러시아: 혁명은 어떻게 패배했나’
‘정당과 계급’
‘스탈린주의 국가들’
‘유럽 혁명적 좌파의 위기’
‘여성 해방과 혁명적 사회주의’
‘글라스노스트: 폭풍 전야’
‘예언자와 프롤레타리아’
그러나 위 논문들은 하먼의 방대한 저작 중 극히 일부만을 선별한 것이다. 트로츠키처럼 하먼도 문헌보다는 사회관계를 분석하기를 선호했지만, 하먼에게는 철학자의 면모도 있었다. ‘철학과 혁명’
하먼은 ‘박식가’ 그 이상이었다. 하먼이 능통한 분야보다 그렇지 않은 분야를 열거하는 편이 더 쉽다. 스포츠, 시각예술, 대중문화가 당장 떠오른다. 하먼 글의 뚜렷한 특징은 모든 학문적 경계를 초월한다는 것이고, 또 정치적 성장이 남달리 빨랐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22살에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에서 서평을 썼고
지난 기간 SWP는 당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을 네 명이나 떠나 보냈다. 토니 클리프가 맨 처음이었고, 던컨 핼러스, 폴 풋, 크리스 하먼이 그 뒤를 따랐다. 토니 클리프는 창립자이자 가장 강력한 정치 지도자였다. 그에 걸맞게 토니 클리프의 장례식은 당원들이 주로 참석했다. 던컨 핼러스는 아마 모두에게 가장 덜 미움받고 나이 든 핵심 당원들에게는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폴 풋은 당 바깥에서 가장 유명했고 광범한 좌파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장례식은 아마 참가자가 가장 많고 그 구성도 가장 다양했을 것이다. 반면 크리스 하먼의 장례식에는 개인적으로 큰 슬픔에 휩싸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의 가족뿐 아니라 당원들도 마치 가족을 잃은 듯이 비통해 했다. 하먼의 죽음이 너무 뜻밖이기도 했지만, 더 주되게는 한 세대의 당원들이 하먼과 함께 활동하면서 정치적으로 성숙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클리프의 자식이지만 하먼은 맏형이었다. 그런 형, 그런 동지를 두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특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