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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산업혁명위원회 권고안:
문재인 정부와 기업주들의 노동 개악 정당화

10월 25일 대통령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2기)가 권고안을 발표했다.

권고안의 핵심은 주 52시간제 완화, 대학 등록금 자율화, 바이오헬스 규제 완화, 공공 데이터 활용 규제 완화, 규제 샌드박스 적극 활용, 기업에 대한 재정(금융) 지원 확대 등 기업주들이 문재인 정부에 요구해 온 조처들을 망라한다.

권고안은 이를 정당화하려고 국가 경쟁력 강화, 국가 개입 최소화 등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논리들을 재탕 삼탕 우려먹는다. 기본소득 같은 사회보장이 필요하다는 말도 하지만, 소비세 인상으로 재원을 마련하자는 등 노동자들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친기업·신자유주의 복지를 요구한다.

여기저기서 짜깁기한 듯한 진부한 얘기들 탓에, 주 52시간제 완화가 핵심임을 알아보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경향신문〉 송진식 기자는 이렇게 꼬집었다.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4차위)가 2년 전 출범할 때 가장 많이 제기된 질문은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다 ... 4차위가 내놓은 대답은 ‘사람’이었다. 기술과 산업의 변화를 따라가는 정책을 발굴하되, 그 논의의 중심에 사람을 둔다는 것이다. 참으로 그럴싸했다 ... [이번] 권고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인재’라는 말이다. 그리고 인재를 양성하는 데 주 52시간제와 같은 노동제도가 걸림돌이라고 적시했다. 사람답게 살아보자고 만든 게 주 52시간제 아니었던가.”

이번 권고안의 압권은 ‘인재’다. ‘인재’란 노동시간과 관계없이 “성과만으로 평가받고” “해고와 이직이 일상”이며 “스스로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떠오르는가.

“앞으로 라이더를 보면 노동자말고 4차 산업혁명의 ‘인재’라고 불러 주길 바란다. 생산수단인 오토바이를 라이더가 소유하고, 시간급이 아니라 건당 3천 원 정도의 성과로 평가받는 사람이지 않은가.”(〈오마이뉴스〉 박정훈 기자,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라이더유니온은 “4차위의 권고안 그 어디에도 노동은 없다”는 논평을 냈다.

박근혜의 '창조경제'와 뭐가 다른가? ⓒ출처 청와대

실제로 권고안은 “플랫폼 노동·특수고용 등의 비전형 근로계약의 확산”을 4차산업혁명이 일으킨 “근본적인 변화”로 든다. 이런 변화가 “인간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극대화”하고, “지능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근로자들의 노동시장 이탈을 가속화”하니 정부가 교육과 직업훈련에 투자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면서 대학 등록금은 자율화해야 인재가 길러진다니, 수십 년 동안 계급 불평등을 키운 신자유주의 교과서로 삼아도 손색이 없겠다.

황선자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부원장은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 24명 중 유일한 노동계 인사다. 그는 권고안 발표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권고안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특히 주 52시간제 완화를 권고한 것은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장 장병규가 주도한 것이며, “기업 관점에서 그들의 요구를 담는 게 4차산업위의 현주소”라고 폭로했다. 노동 담당 위원인 황선자 부원장의 의견은 잘 보이지 않게 각주로 처리됐다.

장병규는 온라인 게임 ‘배틀그라운드’(일명 배그)를 만든 벤처기업 대표다. 언론 보도를 보면 재산이 1조 원에 이르러 “포브스 선정 2019 한국 부자 순위 47위”에 올랐다. 그는 권고안 발표 후 〈중앙일보〉 등과 한 인터뷰에서 권고안이 노리는 바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내일 당장 망할지 모르는데 벤처가 어떻게 52시간 지키나.” 4차산업혁명위원회에는 이 자 같은 ‘신산업’ 기업 대표가 30퍼센트를 차지한다.

노동운동은 이따위 기구와 그 보고서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

4차산업혁명 때문에 고용 불안과 장시간 노동이 불가피한가

권고안을 보면 4차산업혁명이 거스를 수 없는 자연 현상처럼 묘사되고 온통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변화들(고용 불안정, 장시간 노동, 성과 경쟁 격화 등)뿐이라 미래가 극도로 암울하게 느껴진다. 경쟁에서 승승장구한 ‘인재’는 장병규처럼 1조 원대의 자산가가 될 수 있다지만, 그게 그림의 떡일 뿐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노력으로 수백만 명 중의 한 명이 될 확률보다 로또 당첨 확률이 더 높다. 김대중 정부 시절 심형래로 대표된 ‘신지식인’ 신화도 떠오른다.

그러나 4차산업혁명은 결코 자연 현상이 아니며 지독히 과장돼 있다. “일부 노동자들이 경쟁력 없는 산업에서 내쫓기고, 신규 투자가 제공하는 일자리가 점점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 기술 혁신의 결과는 노동계급의 종말이 아니라 노동인구 구성의 지속적 변화였다고 할 수 있다. 로봇 자동화(기계화)가 진척되면 그 기계를 만들고 조작할 노동자가 필요할 뿐 아니라 그런 고급 기술을 가진 노동자를 양성할 교사들도 더 많이 필요해진다. 또, 그런 고급 노동 인력을 건사할 각종 돌봄 노동자들도 필요하다.”([기획연재] 4차 산업혁명이 노동의 미래를 바꿀까? - ⑦ 노동조합 투사들은 기술 혁신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게다가 최근에는 기계가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과정이 더뎌지고 있다. 세계경제 위기가 장기화하면서 투자가 줄고, 기업주들이 기계를 도입하기보다는 이윤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에게 저질 일자리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통계청 발표에서 드러났듯이 고용률이 높아진 것도 비정규직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다.

실제로 권고안이 노리는 것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데이터”, “인공지능”, “스마트” 등 이제는 진부한 용어를 남발하며 새로운 시대를 천명하지만, 결국 권고 내용은 이전 정권들이 추진하던 의료 민영화, 교육 시장화, 노동 유연화 같은 것뿐이다.

새로운 기술 도입과 이런 권고 사이에는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플랫폼 기술이 발달해도 인간인 노동자에게 어지간한 소득, 휴식, 안전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배달 노동이 꼭 지금처럼 사망 사고가 비일비재한 끔찍한 일자리여야 할 이유는 없다. 정부가 노동시간과 안전 규제를 강화하면 된다. 국가가 어느 정도 소득과 복지를 제공하면 지금처럼 형편없는 일자리에서 일하려는 노동자도 줄어들 것이다. 4차산업혁명론은 기술 발전을 핑계로 노동자를 더 쥐어짜겠다는 것일 뿐이다.

4차산업혁명론이 뭐라고 떠들든 노동자들은 정부과 기업주들의 노동 개악 시도에 맞서 자신들의 조건을 지키고 개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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