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최근 진행한 노동자연대의 토론회에서 필자가 발표한 내용이다.


1989년 무슨 일이 있었나?

11월 9일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년 되는 날이다. 베를린 장벽은 1989년 무너질 때까지 동서 냉전의 상징이었다. 베를린 장벽은 냉전 체제의 이탈자들을 막기 위해 1961년 세워졌는데, 하루아침에 자유왕래가 불가능해지면서 동서독의 주민들은 큰 고통을 받았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당시 동독의 대규모 민주화 운동으로 가능했다. 10월 공산당 정권 40주년 기념일에 수천 명 규모의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고,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후 시위는 더욱 확대됐다. 11월 4일 동독 전역에서 100만 명이 참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동독 인구가 1500만 명가량이었던 것에 비춰 보면 엄청난 규모였다. 사람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동독 지배 관료는 베를린 장벽의 개방을 약속했지만, 바로 열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11월 9일 수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가지고 장벽에 모여들자 국경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직접 장벽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자유 왕래를 바라는 대중의 염원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11월 9일 밤 베를린 장벽 붕괴를 기뻐하는 사람들
대중들이 직접 베를린 장벽을 부쉈다

1989년은 동독뿐 아니라 동유럽 전체가 격변에 휩싸인 해였다.

특히 6월 4일은 상징적인 날이었다. 그날 중국 정부는 톈안먼 광장에 탱크를 보내어 학생, 노동자 수백 명을 학살했다. 당시 중국의 개혁을 요구하던 학생과 노동자들이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 농성을 시작했고, 시위는 완강하게 이어졌다. 중국 정부는 이를 잔혹하게 짓밟았다.

투쟁은 그해 여름 소련을 휩쓸었던 광원 파업 물결에 이어, 10~11월 동독을 거쳐 11월에 체코슬로바키아와 12월 루마니아로 이어졌다.

그런데 동유럽의 스탈린주의 정부들은 중국과 같은 탄압 방식을 택할 수 없었다. 중국처럼 하기에는 동유럽 정부들의 위험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동유럽의 여러 정권들은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밀려 일당 독재를 끝내고 자유 선거를 도입하는 정치 개혁을 택했다.

그래서 텐안먼 광장의 학살이 있었던 6월 4일 폴란드에서는 선거가 있었고 독립노조인 연대노조 후보들이 투표에서 압승을 거뒀다. 연대노조가 추천한 후보들은 상원의원 100석 중 99석을 차지했다. 또, 460석 중 35퍼센트를 선거로 뽑은 하원 선거에서도 연대노조 추천 후보들이 전부 당선됐다. 변화의 열망이 압도적이라는 것을 보여 줬다.

이후 헝가리도 폴란드와 비슷한 선거를 치르기로 했다.

지배자들이 재빨리 개혁 조처를 도입하지 않고 강경하게 버틴 체코슬로바키아와 루마니아에서는 아래로부터 혁명적 요소들이 더 많이 분출했다.

특히 루마니아에서는 (유일하게) 폭력 혁명이 일어났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는 매우 억압적이기로 유명했다. 차우셰스쿠는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보안경찰로 키워 자신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며 친위대를 형성했고, 노동력 공급을 위해 낙태와 피임도 금지하고, 출산을 하지 않는 가정에 큰 세금을 물린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차우셰스쿠는 12월까지 버티다가 폭력 혁명으로 타도됐다. 그 과정은 영상으로 생생하게 기록됐다.

12월 루마니아의 산업도시 티미쇼아라에서 노동자와 주민들이 폭압 정치에 반대해 거리에 나섰다. 그때 챠우세스쿠는 탱크를 보내어 남성과 여성 73명을 죽였다. 그러나 티미쇼아라의 저항은 패배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석유화학 공장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하자 군대는 철수해야 했다. 그 후 차우셰스쿠는 일부 양보 조처를 발표하는 한편, 관제 시위를 조직했다. 그러나 관제 시위 현장에서 환호는 야유로 바뀌었고 사람들이 챠우세스쿠를 몰아내는 혁명을 일으켰다. 차우셰스쿠는 헬기를 타고 도망가다 붙잡혔고, 결국 총살당했다.

1989년 동유럽 격변 이후 1991년 소련이 붕괴했고, 14개 독립국가로 쪼개지면서 냉전은 해체됐다.

이처럼 1989년, 1991년은 스탈린주의 독재 정권들이 잇달아 무너져 내린 해였다. 노동계급과 억압받는 사람들이 민주주의 혁명을 일으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던 순간이었다. 일각에서는 옛 소련과 동유럽 같은 국가에서는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동구권 대중은 그런 생각이 사실이 아님을 입증했다.

또한 이 과정은 자칭 사회주의였던 동구권 사회가 진정한 사회주의와는 관계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줬다.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주의는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이다. 노동계급은 누군가 대신 해방시켜 줘야 할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투쟁을 통해 스스로의 의식도 바꿀 수 있고, 스스로 새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1864년 국제 노동운동 조직이었던 제1인터내셔널 창립 선언문에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위”라고 썼다.

반면 옛 동구권 사회는 노동자 권력은커녕 기본적인 권리도 보장되지 않은 사회였다는 것이 민주주의 혁명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옛 소련은 서방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압박 속에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고, 수많은 핵무기를 만들었지만 노동자들에게는 기본적인 생필품도 제공하지 못했다. 아까 1989년 7월 소련 탄광 광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고 했는데, 그때 제기된 주요 요구가 임금과 배급 증대, 작업 안전 외에도 비누를 더 많이 제공하라, 겨울에 따뜻한 옷을 달라는 것 등이었다. 고위 공직자들은 온갖 사치품과 고급스런 음식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노동자들은 기본적인 음식과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서도 긴 줄을 서야 했다. 서구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 노동조건 개선, 주택 문제 해결 등을 위해 투쟁해야 했다.

옛 동구권은 가난했지만 평등했다고 하는 말들이 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래서 동구권에서는 1989년 이전에도 수많은 저항들이 있었다. 1953년 노동강도 강화와 임금 삭감에 맞선 동독 건설 노동자들이 촉발한 항쟁, 1956년 헝가리 혁명,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대중 시위, 1980~1981년 폴란드 연대노조의 도전이 있었다. 당시 폴란드에서는 외채 위기로 물가 인상을 하려 했던 정부에 맞서 벌어진 파업 물결로 폴란드 인구 3500만 명 중 1000만 명이 시위에 참가하는 혁명적 상황이 벌어졌다. 1989년 민주주의 혁명은 이런 투쟁들의 연장선에 있었다.

 좌파들의 혼란

따라서 노동계급의 해방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1989년, 1991년 동유럽·소련 노동자·민중의 민주주의 투쟁을 마땅히 지지해야 했다.

그런데 당시 좌파들 대부분은 이 투쟁을 지지하지 않았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를 사회주의 사회라고 보았고, 이 때문에 동구권이 붕괴한 후 좌파 활동가들은 방향 감각을 잃고 사기저하했다. 한국에서는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노동자 투쟁이 거세게 벌어졌는데, 그런 상황에서 좌파들이 큰 혼란을 겪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노맹(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나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같은 좌파 단체의 주요 활동가들이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뒤엎으려는 전망을 버리고 개혁주의로 전향했다. 조국 사태가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쟁점이었는데, 조국은 사노맹 출신이었다. 사노맹은 중국의 천안문 학살을 열렬하게 지지하고, 1991년 소련에서 노동자 투쟁을 분쇄하기 위해 벌어졌던 수구파 쿠데타도 열렬하게 지지했다. 이를 보면 조국이 좌파였을 당시에도 지독히 엘리트주의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정의당의 주요 지도자들 중에도 당시의 충격파 속에서 개혁주의적으로 변신한 사람들이 많다. 일부는 심지어 우익으로 전향했고, 더 많은 사람들은 큰 회한 속에서 운동을 포기했다.

이들이 이런 사상적 혼란을 겪은 것은 사회주의 개념이 잘못돼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국가가 생산수단을 통제했다는 점을 들어 옛 소련과 동유럽 사회를 사회주의였다고 본다. 그러나 국유화와 사회주의는 결코 같은 말이 아니다.

이 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중요하게 제기한 바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살던 시대에 독일에서는 라살레라는 국가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노동운동 지도자가 등장했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와 논쟁을 벌였다. 라살레는 당시 독일에서 비스마르크 정부가 국유화 조처를 취하는 것을 보며 그것을 사회주의라고 말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런 식의 사회주의를 “사이비 사회주의”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담배 사업의 국유화가 사회주의적이라면 나폴레옹도 사회주의의 건설자에 속할 것”이라고 비꼬며 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는 경쟁적인 축적이라는 본질 때문에 자본의 규모가 커지고 국가가 통제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기 마련인데, 이런 “산업 국유화”로는 사회주의를 이룰 수 없다고 강조했다.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뒤엎고 스스로 생산을 통제하고 기존의 자본주의적 국가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예측했듯 경제에서 국가 부분이 확대되는 것은 단지 옛 소련이나 동구권 사회만의 특징은 아니었다. 1930년대를 거치며 서구 자본주의에서도 국가 부문은 크게 확대됐고, 오늘날에조차 주요 국가들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규모는 33~45퍼센트에 이른다. 특히 1950~1960년대 개발도상국들은 대부분 국가 주도의 산업화 전략을 채택했고, 그 대표적인 나라가 한국이었다. 1960~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자본 축적을 위해 기업들에 강력히 개입했다. 따라서 만약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것이 사회주의라면 1970년대 박정희 시절 남한이야말로 사회주의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 많은 사람들은 지배계급이 표방하는 이데올로기만 보며 그 나라들을 사회주의라 규정했다. 박정희가 ‘한국식 민주주의’를 말했다고 해서 당시 남한이 민주주의 국가였다고 말할 수 없듯이 전두환의 당 이름이 민주정의당이었지만 전혀 민주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았듯이, 이런 이데올로기주의적 입장은 틀렸다. 한 사회를 규정할 때 그 체제의 진정한 동학을 보는 역사유물론의 방법에 충실해야 한다.

진정한 사회주의 개념이 중요하다는 것이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것은 올해 홍콩 시위에 대한 많은 좌파들의 태도를 보면서도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중국이나 북한과 같은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존재한다. 진영논리에 빠져 이들 체제 하에서 벌어지는 운동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에 대한 대중의 오해를 바로잡을 수 없다.

국가자본주의론

옛 동구권 사회를 자본주의의 일종인 국가자본주의라고 설명한 국제사회주의 경향은 좌파들의 이런 오류를 피할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했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이가엘 글룩스타인, 즉 토니 클리프(1917~2000년)는 1947년에 옛 소련 등 동구권 사회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라고 분석했다. 토니 클리프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동유럽에서 노동자 투쟁을 통한 해방 과정이 없이, 소련의 군대를 통해 소련식 체제가 이식되는 것을 보면서 이 체제들의 성격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고, 국가자본주의론을 발전시켰다.

토니 클리프는 동구권 체제가 경쟁적 축적이라는 자본주의 동학에 따라 운영됐다는 점을 결정적으로 중요한 특징으로 봤다.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비록 국내에선 서구 자본주의와 같은 기업들 간의 경쟁이 없었다 할지라도 국제적인 경쟁 압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옛 소련에서 1928년 국가자본주의적 축적 드라이브가 시작된 이후 스탈린이 (1931년에) 한 말은 유명하다. “우리는 선진국들에 50년 뒤졌다. 우리는 10년 안에 이 격차를 메워야 한다. 우리가 이 일을 해내지 못하면 그들[서방]이 우리를 분쇄해 버릴 것이다.” 이는 강박적인 경쟁 압력이 체제의 동학을 지배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시간이 갈수록 시장을 둘러싼 경쟁이 늘어나긴 했지만, 압도적으로는 군사적 경쟁이 지배했다. 외견상 서방 경제에서 기업들이 경쟁하는 것과는 달라 보이기는 했지만, 체제의 착취적·경쟁적 동학이라는 본질적인 면에서는 같은 효과를 냈다. 이는 스탈린 시대를 거치며 총 생산물 중 소비재로 가는 비중이 갈수록 줄어들었던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소련에서 스탈린이 국가자본주의적 축적을 시작했던 해인 1928년에 총생산물 중 소비재로 가는 비중은 60.5퍼센트였지만, 1940년에는 39퍼센트, 1985년에는 25퍼센트로 그 비중은 크게 줄어들었다. 대중의 필요를 위한 생산이 아니라 군사력 증강을 위한 축적 경쟁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자본주의 경제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경제 위기와 노동자 투쟁이다.

경쟁적 축적 과정에서 체제는 성장을 경험할 수 있지만, 결국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에 부딪히며 경제 위기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소련의 경제 성장률은 아래 그래프에서 보듯이 하락했다. 서방 자본주의가 이윤율 저하의 위기를 겪고 있는 과정이 옛 동구권에서도 나타났던 것이다.

동유럽 국가들은 경제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1970년대부터 서방의 외채를 도입했지만 이는 서방의 경제 위기와 맞물려 외채 위기가 심각해지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1980년대 후반 동구권 체제의 위기는 더욱 심화됐다.

또 축적 과정은 체제를 무너뜨릴 잠재력을 지닌 노동계급을 만들어 낸다. 제 아무리 무자비하고 전체주의적인 국가도 노동계급을 무한정 억압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그래서 옛 소련과 동유럽은 1950년대까지 급속한 성장을 경험했지만, 이후 갈수록 심화하는 경제 위기와 함께 노동자 등 주민 대중의 저항에 직면했고 최종 붕괴했다. 이 과정은 이 사회들이 노동자 국가나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였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 준다.

대안은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하다. 이는 1989년 민주주의 혁명 이후 현재 동유럽에서 대안을 찾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1989년 동유럽 투쟁은 더 큰 혁명으로 발전할 잠재력이 존재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잠재력은 현실화하지 못했다. 1989년 동유럽 민주주의 혁명과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이어진 것은 민주주의가 확대된 것과 함께 자본주의의 형태 변화 ― 국가 지도형에서 시장 주도형으로 이동 ― 가 결합된 것이었다.

그 결과 우리가 한국에서 1987년 운동을 통해 자유 선거와 노동조합 할 권리 등을 얻었듯, 동유럽 인민들도 이런 민주적 권리들을 쟁취했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가 사적 자본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동유럽의 평범한 인민들에게는 신자유주의적 공격들도 함께 진행됐다.

옛 동구권의 지배 관료들은 사기업의 사장과 경영진으로 변신하며 여전히 부와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노동계급 사람들은 실업과 복지 공격 등을 겪어야 했고, 지금도 동구권 지역은 서구권 지역에 비해 경제적으로 더 열악하다. 이런 차별과 빈곤이 존재하는 현실은 유럽 내에서도 동구권 지역에서 극우들이 더 빨리 성장하고 있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경제 위기의 고통을 이주민과 난민에게 전가하는 식의 속죄양 삼기를 하며 극우가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극우뿐 아니라 올해 체코에서 긴축 정책을 추진하는 총리 퇴진 시위에 25만 명이 참가하며, 1989년 이후 최대 규모로 열렸듯 저항도 존재한다.

이런 상황은 30년 전 시장경제 승리를 축하했던 서방 지배자들의 말이 완전히 거짓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지난 30년이 증명했듯 시장 확대는 국가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이어야 했을까? 동구권에서 대중 투쟁이 벌어질 때마다 중요하게 제기된 것이 과연 대안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다.

특히 1980~1981년 연대노조의 저항에서 대안 문제가 절실했다. 소련은 1953년, 1956년, 1968년 격변에 군대를 투입해 저항을 억눌렀다. (동유럽 민중들은 이런 소련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이 컸고, 이는 폴란드 철도 노동자들이 저항 과정에서 소련으로 육류를 수출하던 철도를 아예 용접해 버렸던 것에서도 드러났다.) 그런데 과거와 달리 1980~1981년 폴란드에는 소련이 차마 군대를 투입하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 3500만 폴란드 인구 중 1000만 명이 연대노조에 동참한 상황에서 위험 부담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당시는 마치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 이후 소비에트가 등장해서 기존 국가 기구와 함께 이원권력을 이루고 있던 상황과 비슷했다. 폴란드 지배계급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1년 반가량의 권력 공백기에 연대노조 지도부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와 같은 혁명정당이 있었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라는 방향을 추구하며 기존 국가 기구를 분쇄하기 위한 봉기를 준비했다. 그러나 폴란드 연대노조 지도부는 현장에서는 전투적으로 싸웠지만 사회를 근본에서 변혁할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크리스 하먼이 지적했듯 고전적인 신디컬리즘(노동자들의 문제는 국가 권력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고도 노동조합 조직을 강력하게 건설해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의 한계를 보여 주는 사례였다. 이는 국가자본주의도, 사적 자본주의도 아닌 진정한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혁명적 지도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두드러지게 보여 줬다.

1989년에도 진정한 대중 운동의 잠재력을 보여 줬지만, 혁명이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1989~1991년 격변 때 온갖 정치적 혼란 속에 친시장적인 대안을 추진한 세력들에게 운동의 지도권이 돌아갔다. 옛 지배 관료들의 틈바구니에서 출세한 사람들이 친시장적 대안을 추구한 반대파 지식인들과 연합해 제한된 개혁 강령을 내세웠고, 진정한 사회혁명을 예방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새로운 정부들은 “개혁”을 표방하며 신자유주의 조처들을 도입했고, 노동계급의 삶에 대한 공격은 계속됐다. 

따라서 진정한 혁명적 정치와 조직이 중요하다. 동구권 사회를 ‘사회주의’라고 잘못 규정하거나, 동유럽 저항이 서구 지배자들을 이롭게 할 뿐이라는 진영 논리에 빠져 운동과 거리를 두는 태도는 오히려 온건한 세력에게 운동의 지도권을 내맡기는 것으로 귀결될 뿐이었다. 

진정한 혁명적 조직의 성장이라는 측면에서도 1989년 동구권 독재 정권들의 붕괴는 충분히 기릴 만하다. 당시 스탈린주의 식으로 왜곡된 사회주의가 아니라 진정한 사회주의 전통의 씨앗을 뿌리게 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한국에서 국제사회주의 경향도 그 경험을 계기로 시작할 수 있었고, 얼마 전 러시아에서 국제사회주의 전통의 조직이 극좌파 중에서 만만치 않은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점도 기쁜 소식이다.

오늘날 세계 곳곳의 지배계급은 1989년 동구권 체제들이 부딪혔던 것과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장기적 이윤율 하락 추세 속에 헤어나오기 힘든 경제 위기와 불평등을 견딜 수 없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존재하는 상황 말이다. 홍콩 시위는 오늘날 위기의 심화를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고, 어쩌면 중국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질 격변의 예고편일 수도 있다. 이런 기회들을 유실하지 않으려면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정신에 충실한 혁명적 정치 조직을 더욱 굳건하게 건설해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