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을 결국 재연장했다. 한·일 두 정부가 일본의 수출 규제 조처를 두고 앞으로 대화를 해 나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문재인 정부는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한 WTO 제소도 정지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정작 일본 정부는 “개별 품목을 심사해 [한국에] 수출을 허가한다는 방침에 변화 없다”고 밝혔다. 한국을 계속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한다고도 했다.

11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과의 대화’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때문에 지소미아 종료는 “당연히 취할 수밖에 없는 조처”라고 말했다. 불과 사흘 만에 이 말이 거짓말임이 드러난 셈이다. 지난 여름 정부와 여당 정치인들이 너도나도 나서서 항일 투사라도 되는 양 행세했지만, 결국 정부는 미국·일본 제국주의와의 협력을 선택했다.

이 결정으로 한·미·일 지배자들이 우려하던 사태를 피할 수 있게 됐다. 문재인 정부의 지소미아 재연장 발표 직후 미국 국무부는 환영 성명을 발표했다. 지소미아 재연장 발표 직후 문재인은 청와대 앞에서 단식 중인 황교안에게 청와대 정무수석 강기정을 보내어 “지소미아가 잘 풀렸다. 단식을 풀라”고 달랬다. 

이번 결정은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가속시키려는 아베 정부와, 한미일 동맹에 군말 없이 충실하려는 황교안·나경원 같은 한국 우파의 기를 더 살려 줄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그간 한미동맹이 “위기로 내몰렸다”며 지소미아를 다시는 건들지도 말라고 문재인 정부에 주문했다.

정부와 여권은 “외교의 승리”라고 말도 안 되는 억지 포장을 하며 파장을 줄이려고 애쓴다. 여차하면 언제든 지소미아를 다시 종료시킬 수 있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호언장담이 진지하게 들릴 리 없다. 이번 결정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배신감과 실망을 낳고 있다. 이러려고 ‘죽창가’ 부른 것이냐는 냉소가 나오는 게 자연스럽다.

재연장 직후 정부가 일본 정부와 설전을 벌인 일이 실소를 자아내는 이유다. 결과가 명백한데도, 어느 쪽이 사과를 했는지 안 했는지, 또 일본이 수출 규제를 풀기로 ‘말’했는지(그것도 비공개로) 따위 문제는 비본질적인 문제다.

일본: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서 핵심 동맹

문재인 정부의 이번 결정은 지소미아 갈등이 미국의 동맹국들 사이에서 벌어진 약간의 소동이고, 세 국가 간의 안보 이슈는 한미일 동맹 강화라는 틀 내에서 조정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지난 8월 문재인 정부가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발표하자, 진보·좌파의 주류는 지소미아 종료 통보를 환영하며,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한 데 이어 역사적인 한미일 공조 체제(이른바 ‘1965년 체제’)에 균열을 내고 있다고 봤다. 그리고 일본의 경제 보복이 한반도 정세 변화에서 배제된(“패싱”) 일본이 제 위상을 확인하고자 벌이는 일이라고도 봤다.

그러나 본지는 이런 견해는 “시야가 한반도로 국한된 탓에 그 바깥에서 벌어지(고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는 진정한 핵심을 놓친다는 문제점이 있다”고 거듭 지적했다(가령 김하영, 294호, ‘진보·좌파는 한일 갈등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제국주의 세계 질서(제국주의 강대국 간의 경쟁과 협력)라는 관점에서 한반도를 보지 않고 그 반대로 보는 식민지 해방론적인 관점의 약점을 드러낸 것이다.

9월 25일 유엔 총회 자리에서 아베와 트럼프 ⓒ출처 백악관

냉전 이후에도, 부상하는 중국을 저지한다는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 따라 안보 협력이라는 면에서 한미일 동맹은 강화돼 왔다. 최근에도 한·일 양국은 갈등 와중에도 한미일 안보 협력을 강조했다. 단지 말뿐 아니라 실천에서도 그래 왔다.

가령, 인도양 아덴만에 파견된 청해부대는 올 가을에도 일본 해군과 합동으로 해상 선박 검색 훈련을 했다. 한·일 두 정부는 모두 미국이 호소한 대이란 봉쇄 작전에도 호의적이었다.

미국 정부는 이런 흐름에 역행하는 한·일 지소미아 종료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물론 트럼프 정부는 한·일 간 지소미아 갈등을 조정하느라 꽤나 신경 써야 했다. 이는 전 세계에서 패권을 유지·관리하는 데서 갈수록 버거움을 느끼는 미국의 딜레마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소미아 갈등과 그 봉합 과정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서 주축 동맹국이 일본임을 다시금 분명히 보여 줬다. 일각의 오해와 달리, 미국은 일본을 전혀 “패싱”하지 않았다.

이번에 미국 정부가 지소미아 갈등을 조율하는 방향은 주로 한국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이전 남한 정부들과 관련해서도 미국은 독도 영유권 등 과거사 문제가 한일 간 안보 협력을 지체시키는 것에 불만을 드러내며 사실상 일본을 두둔해 왔다.

1945년 이래 미국은 자신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동맹 체제의 중심에 일본을 두는 것을 이 지역 패권 유지의 핵심으로 삼았다. 이것이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추동하는 핵심 동력이었다. 올해 6월에 나온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에서도 미국은 일본을 인도·태평양 지역의 가장 중요한 동맹으로 규정했다.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봉쇄하고 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의 경제 패권 확장을 저지할 핵심 국가로서 말이다. 

문제는 한국도 대장 미국과 수석 일본의 부차적 파트너로서 협력해 왔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이거나 약소국이어서가 아니다.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 위상의 차이가 있는데, 한국 지배계급은 미국 중심의 질서를 떠받치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고 해 왔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국가의 위상은 달라졌고, 이제 제국주의 질서를 떠받치는 한 축이 됐다. 한·일 갈등은 달라진 세력관계를 반영했지만, 한국 정부가 황급히 문제를 봉합한 것에서 한국 지배자들이 제국주의 서열을 넘어설 의지와 능력이 아직 없음도 확인된 것이다.

그래서 여야를 막론하고 한국 정부는 미국·일본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대다수 한국인의 바람을 계속 외면해 왔다. 민주당 정부도 마찬가지였고, 이번 문재인 정부의 배신은 이번에도 이를 입증했다. 

민족주의·민중주의(진보 포퓰리즘) 문제

그런 점에서 지소미아 갈등 등 한일 갈등 문제에 대한 진보·좌파 주류의 대응은 돌아볼 점이 있다. 노동계 3대 조직이라 할 수 있는 민주노총·정의당·민중당 지도부들의 행동이 특히 그렇다. 그들은 한일 갈등이 불거지자 문재인 정부가 ‘자주·평화적’ 선택을 하게끔 “견인”할 수 있다고 지지자들을 설득했다. 정부의 배신 가능성을 경계하기는커녕 열심을 내어 정부의 일본 대응에 협조했다.

정의당은 ‘일본수출규제대책 민관정협의회’에 참가했다. 자민통계는 드러내놓고 정부·여당의 지지자들과 함께 집회를 열었다. 

문재인 정부가 반복적으로 주장해 온 논리, 즉 ‘안보상 신뢰하지 않는다는 나라에 어떻게 군사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느냐’는 것도 사실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가장 먼저 꺼낸 논리였다(7월 18일 문재인 대통령과 5당 대표 회동 자리에서). 심 대표는 한일 갈등에 안보 문제를 개입시키지 말라는 미국 정부에 대한 대응 논리를 문재인 정부에 제공한 셈이다.

미국·일본 제국주의에 맞서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제국주의 질서를 떠받치는 한 축임을 간과한 채 정부와 협력해 그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헛된 기대다. 이번처럼 정부의 배신 행보에 대비해 운동을 정치적으로 무장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진보 염원 대중의 사기를 저하시킬 위험성을 키우는 것이다.

‘국민적 단결’이나 ‘초당적 대응’을 호소하는 분위기가 특히 노동자 투쟁에 끼칠 악영향을 봐야 한다. 1997년 IMF 경제 공황 때 경험했듯이, 이런 분위기는 정부와 사용자들에게는 노동자 희생을 강요할 명분을 주고, 노동자들에게는 양보하고 투쟁을 자제하라는 압력을 키운다.

삼성 이재용과 문재인 “국민적 단결” 기치 아래 기업 기원 확대ㆍ노동자 공격 강화한 문재인 ⓒ출처 청와대

실제로 노정 간 세력관계가 문재인 정부에 좀 더 유리해지고 노동자 투쟁은 더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관련 기사, 김하영, 304호, ‘올해 노동자 투쟁은 우리에게 어떤 앞길을 가리키는가?’) 지소미아와 방위비 분담금 문제에서 미국 정부의 목소리가 커지자 이런 어려움은 더 커졌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하지도 않을 지소미아 종료를 앞세워 지난 석 달간 실제로 한 일은 “국민적 단결”의 기치 아래 기업 지원을 확대하고 산업 안전 규제를 풀고, 노동자들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온 것이었다. 노동운동 지도자들 대부분과 달리 정부 자신은 계급 이익에 충실하게 행동했던 것이다.

강제동원 피해: ‘위안부’ 문제처럼 타협할 가능성

강제동원 문제 ‘해결’ 방안으로 11월 초 민주당 출신 국회의장 문희상이 제안한 ‘1+1+a’ 안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이 안은 한일 기업과 ‘양국 국민’에게서 자발적 기부금을 모아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지급하자는 내용이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의 일부인 화해치유재단의 잔여기금 60억 원을 포함하는 내용도 있다.

문재인 정부 초기 대일 특사였던 문희상은 지난 11월 1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여기(한국)서 만날 사람 다 만났[다]”고 말해, 이 안이 자신의 독자적 구상이 아님을 암시했다. 문희상이 친문 진영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할 때, 그의 안은 청와대와 소통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정말로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국가 범죄에 대한 일본 국가의 책임 인정, 사죄, 배상이라고 말해 왔다. 문희상 안을 통한 ‘해결’은 한일 자본주의와 지배자들의 이익과 안정을 위한 ‘해결’일 뿐, 피해자들과 대중의 열망은 무참히 짓밟는 짓이다. 그래서 〈한겨레〉와 〈경향신문〉 같은 언론들의 주요 기사들이 이 안이 한일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 거로 기대하는 논조를 드러내는 건 본말 전도다.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 한국도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부차적 파트너로서 협력해 왔다는 점은, 한국 정부가 과거사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것으로 결코 기대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미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서 이 점을 보여 줬다. 문재인은 대중의 공분을 의식해 우여곡절 끝에, 박근혜가 합의한 화해·치유 재단을 해산했다. 하지만 합의 파기는커녕 재협상조차 하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강제동원 문제도 위안부 문제처럼 될 수 있다.

미국·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위안부 문제, 강제동원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려면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아래로부터의 반제국주의 운동 건설을 도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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