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출신 국회의장 문희상이 지난달 방일 당시 강제동원 문제를 ‘해결’할 ‘새롭고 획기적인’ 방안이라며 ‘1+1+⍺안’(한·일 기업과 ‘양국 국민’에게 자발적 기부금 받아 위자료 지급)을 제시한 바 있다. 문희상은 12월 중순경 이런 내용을 담은 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문희상 안에 공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지만, 이 안이 국회의장 문희상의 독자적 구상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특별법을 토대로 12월 말 한·일 정상회담을 열고 두 국가의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구상일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강제동원 문제에서 ‘1+1안’(한·일 기업들의 자발적 출연금으로 위자료 지급)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일본 국가의 법적 책임(배상)을 전혀 제기하지 않는 이 기만적인 안조차 일본 정부는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고 했다. 법적 책임(배상)은커녕 도의적 책임도 인정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여기서 더 후퇴해 일본 국가와 전범기업의 배상 책임을 더 흐리는 1+1+⍺, 2+2+⍺ 따위의 안들이 정부·여당 측에서 나오는 것이다. 정부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에서 대중을 기만하더니, 이제 강제동원 피해 문제에서도 배신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문희상 안은 민간기금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자는 1995년 ‘아시아여성기금’과 10억 엔에 일본 국가의 책임을 면해 준 한일 위안부 합의와 본질에서 다르지 않다. 일본 정부의 출연금이 포함되지 않아 한일 위안부 합의보다도 못한 최악의 안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문희상의 애초 안에는 한일 위안부 합의의 일환이던 화해치유재단 잔여기금 60억 원을 포함하는 내용도 있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당연한 반발 때문에 이 부분은 철회했지만, 본질은 변한 게 없다. 

일본 국가의 책임 인정과 사죄가 먼저다 11월 27일 강제동원공동행동, 정의기억연대 등이 주최한 국회 앞 기자회견 ⓒ출처 정의기억연대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돈만 지급하면 된다는 발상이 “피해자를 우롱하고 모욕하는 것”이고 “일본 국가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며 강하게 항의했다.

12월 4일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와 일본, 미국, 캐나다, 독일 등 12개국 43개 단체는 공동 선언문을 발표해 문희상 안을 “즉각 폐기”하라고 요구했다. 민주노총과 정의당, 민중당도 문희상 안을 비판했다.

심지어 문희상 측이 작성한 법률안 초안에는 한·일 정상이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가 유효하다고 확인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누구를 위한 ‘해결’인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피해를 인정받고자 한국 법원에서 전범 기업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지 길게는 18년이 지났다. 일본과 미국에서 소송을 시작한 때까지 거슬러 가면 30년 가까이 된다. 그러는 동안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소송의 원고 5명은 모두 고인이 됐고, 일본제철을 상대로 한 소송의 원고 4명 중 3명도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 인내한 결과가 고작 이 따위란 말인가.

정부·여당 내에서는 문희상 안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현실적 안으로 주목받는 듯하다. 일본 지배자들 내 일부가 이 안을 긍정하는 기류도 읽히면서 더 힘을 받는 분위기다.

자유한국당 의원들도 적극 지지 입장을 표명하며 현실론에 힘을 실었다. 분노스럽게도 자유한국당 의원 홍일표는 “일본에게 돈 달라는 구차한 얘기를 이제 그만하자는 취지”(〈한겨레〉 11월 30일자)라며 피해자들을 모욕했다.

그러나 이런 ‘현실론’은 결국 한·일 국가의 경제·안보협력과 기업들의 이익 추구를 위해 강제동원 피해 문제는 대충 덮고 가자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과거사 문제 해결과 한·일 경제·안보 관계 진전을 분리해 다루겠다는 ‘투 트랙’ 기조를 따랐다. 지소미아 재연장에 이은 정부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신 조짐은 이 기조의 본질이 명백히 후자에 전자를 종속시켜 일본 전쟁 범죄의 피해자들을 희생시키는 것임을 보여 준다.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문제 등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 과거 청산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구축하려 한 전후 질서(당시에는 대(對)소련, 현재는 대(對)중국 견제를 위한 한·미·일 집단안보체제) 아래서 번번이 묻혀 버렸다.

1960년대에 미국은 집요하게 한국과 일본에 국교 정상화를 촉구했다. 경제 성장을 위해 자금을 확보하고 세계시장에 뛰어들길 원했던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요구에 적극 호응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맺었다.

이때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 자금을 얻는 대신 식민지 피해 문제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선언했다. 한국 자본주의의 이익을 위해 민중의 고통을 희생시킨 것이다.

탄광 강제노역에 동원된 조선인들 일본 나가사키 야소 탄광에서 강제노역한 한 피해자는 “[그곳은] 매 맞으며 일한 지옥”이라고 말했다 ⓒ출처 해외교포문제연구소

이 덕분에 면죄부를 받은 일본 지배자들은 과거사 문제 해결을 외면해 왔다. 지금도 일본은 한일청구권협정을 근거로 강제징용·위안부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고 주장한다. 천인공노할 일본의 이런 태도는 오늘날 일본 지배자들의 군사대국화 계획과 관련 있다. 과거 제국주의 전쟁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범죄를 인정하고 사죄하면서 또다시 군사대국화를 추진할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미국의 아시아 전략은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추동한다.

강제징용·위안부 문제가 단지 과거사가 아니라 오늘날의 제국주의 문제와 깊이 연관돼 있는 이유다.

미국의 아시아 전략을 지지하며 이에 협력하는 대가로 혜택을 누려 온 한국 지배자들도 이 문제에서 대다수 한국인의 바람을 계속 외면해 왔다. 역대 한국 정부들은 국내 여론이 악화하면 뭔가 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다 이내 꼬리를 내리는 행태를 반복해 왔다. 민주당 정부라고 다를 게 없었다.

한·미·일 동맹과 민주당 정부

김대중은 강제동원·위안부 등의 문제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었다. 2001년에 역사 교과서 왜곡에 대한 대중적 분노가 들끓었을 때 항일 제스처를 취했지만 잠깐이었다. 오히려, 김대중 정부 시절에 한·일 관계는 ‘새로운 발전의 궤도에 올랐다’고 평가받는다.

실로, 국무총리 이낙연과 문희상은 ‘김대중-오부치 시대’를 한·일 관계의 본보기로 제시했다. 그러나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한·일 간 체계적 군사·안보협력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한일안보정책협의회(1998), 한일 공동해난구조 훈련(1999) 등이 이때부터 시작됐다. 심지어 2002년 동티모르에서 파견 한국군과 일본 자위대는 같은 지역에 주둔하며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평화유지군(PKO)의 일부로서 협력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요구에 밀려 한일협정 당시의 비공개 외교 문서를 일부 공개했다.

2005년 8월, 당시 국무총리 이해찬(현 민주당 대표), 당시 민정수석 문재인이 포함된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는 한일협정에서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법적 배상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도의적 차원의 보상은 이뤄졌다고 봤다.

이전 정부와 다르게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개인 청구권이 있다고 봤지만, 한국 정부가 일본에 다시 법적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신의칙상 곤란”하다고 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소송하는 것은 문제 삼지 않겠지만 이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 정부가 나서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는 한 게 없다. 

이미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음을 보여 줬다. 지소미아 종료 결정 철회는 미국·일본과의 안보 협력이 문재인 정부에게 우선적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 줬다.

세계 제국주의 체제 안에서 미국·일본과 여러 면에서 얽혀 있는 한국 국가가 피해자들의 피맺힌 한을 풀어주리라 결코 기대할 수 없다. 문재인 정부는 일본·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커다란 대중적 반감을 의식해 다양한 꼼수를 부릴 뿐이다.

미국·일본 제국주의에 맞서는 것과 함께, 여기에 협력해 온 한국 정부에도 맞서야 하는 이유다. 나아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서 저항하는 것은 ‘과거사’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