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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혁명 - 냉전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은 가능하다

지난 호에서도 다뤘듯이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원조경제 위기는 심각한 사회적 불안정을 낳았다. 노동자와 농민들의 빈곤이 심화되고 도시는 실업의 바다였다. 학생들은 양적으로 급속하게 늘어났지만 미래는 불투명했다. 이승만은 3월 15일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의 독재를 연장하는 것으로 위기에 대처하려 했고, 그 결과 전례 없는 부정선거가 판을 치게 됐다.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이미 1959년 11월에 부정투표 계획을 세웠다. “법은 나중이니 우선 당선시켜 놓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4할 사전투표’와 ‘공개투표’ 등 온갖 수단의 부정이 자행됐다. 4할 사전투표는 유권자의 40퍼센트를 자유당 지지표로 조작해 투표전에 미리 무더기로 투표함에 넣어두는 것을 말했다.

부정선거를 이행하는 데 방해물은 “유혈을 불사”해서라도 제거돼야 했다. 테러가 난무했다. 야당은 항의했지만, 이승만 정부의 대답은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였다.

부정선거에 대한 최초의 저항이 2월 28일 고등학생으로부터 나왔다. 경북고등학교 학생 8백 명이 거리로 나섰다. 이 시위를 계기로 전국적인 항의가 불붙기 시작했다.

개표 결과는 한 편의 웃기지 않는 코미디였다. 예를 들어 군대의 개표 결과는 유권자 수의 1백20퍼센트가 이승만에게 투표한 것으로 나왔다. 그래서 이승만은 전국적으로 득표율을 자신은 80퍼센트, 이기붕은 70퍼센트로 하향조정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는 3월 15일 마산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했다.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총은 쏘라고 준 것”이라며 강경대응을 합리화했다.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백70여 명이 부상했다. 분노한 시민들은 자유당사, 서울신문지국, 파출소 등을 파괴했다.

경찰은 마산의 시위를 “공산당 지하조직의 폭동”으로 조작했다. 심지어 경찰은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쓰인 삐라를 시위 도중 사망한 학생들의 주머니에 집어넣기도 했다.

이승만 정부는 내무부 장관 최인규와 치안국장 이강학을 해임하는 것으로 사태를 무마하려 했고, 시위는 잠시 소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16세 고등학교 학생의 시신이 떠올랐다. 그의 눈에는 최루탄이 꽂혀 있었다. 그 최루탄은 비무장 시위대에게는 발포가 금지된 것이었다.

시민들의 분노가 다시 폭발했다. 그 날 밤 3만여 명의 시위대가 시청과 경찰서를 습격했다. 정부 여당과 관계있는 모든 기관이나 개인의 집까지 공격을 받았다. 시위 군중이 15만 명에 이르렀을 때 시위는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이제껏 움직이지 않고 있던 서울의 대학생들이 시위에 동참했다. 4월 18일 거리로 나선 고려대생을 이승만 정권은 정치깡패를 동원해 습격했다. 이 사건은 다른 학생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다음 날인 19일 서울 시내 전역에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당황한 이승만은 시위대에 발포했지만, 시위대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번 저항이 대중적 불만의 폭발이 아니라 “장면 [전]부통령과 천주교 노기남 주교의 공작”으로 “천주교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사태 파악에 둔감했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항의는 전국적으로 지속됐다. 4월 23일 이승만은 결국 자유당 총재를 사임하고 이기붕을 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4월 19일 시위관련 연행자를 대부분 석방하는 양보 조치를 취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4월 26일 10만 명이 모인 시위에는 수송초등학교 학생들까지 “국군 아저씨들, 부모 형제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는 펼침막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계엄사령관 송요찬조차 4·19 시위 “희생자는 나라의 보배”라며 대세가 기울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미국은 3월의 마산 시위에서는 한국군이 출동해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것을 승인해 줬지만, 더는 이승만의 지배방식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혁명이 더욱 급진적으로 발전할 위험이 있었다. CIA 책임자 피어 드 실바는 이승만 정부에게 “2시간 안에 총사퇴를 하지 않으면 여러분 모두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해야만 했다.

결국 4월 27일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이승만의 동상을 끌어내렸다. 이승만 정부에서 온갖 세도를 부리던 이기붕 일가는 시위대가 발견한 대형 성조기를 한 장 남긴 채 집단 자살했다.

박현채가 “진정한 혁명이 필요한 객관적 상황이었으나 혁명을 추진할 참모부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했듯이, 4월 혁명의 전 과정은 자생적이었다.

이 혁명은 “학원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고등학생들의 소박한 시위에서 출발했고, 대학생에게로 확대됐다. 그리고 나중에는 주로 하층 노동계급이 주력이었다.

예를 들어 19일에서 26일까지 1백86명이 사망하고 6천2백59명이 다쳤는데, 사망자 중 61명이 하층 노동자였고, 고등학생이 36명, 실직자가 33명, 대학생이 22명이었다.

농민들을 제외하면 4월 혁명은 민중 운동을 활성화시키고 급진화시켰다. 농민들은 비참한 빈곤 상황에도 불구하고 4월 혁명 기간에 거의 아무런 움직임을 보여 주지 않았다.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를 누가 주도하게 될 지를 미리 보여 준 것이다.

4월 혁명의 도화선 구실을 한 학생들은 이승만 정부의 퇴진 외에도, “기성 정치인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부패하고 권위적인 기성 체제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었다.

이런 요구는 이승만이 퇴진한 후 학원 민주화 투쟁으로 이어졌다. 서울대, 고려대, 성균관대 등의 대학에서는 ‘어용교수’ 퇴진 투쟁이 벌어졌고 학도호국단 대신 자주적인 학생회가 들어섰다. 그리고 민주당이 보인 부패와 무능 때문에 일부 학생 그룹은 정치적으로 훨씬 급진화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독재가 붕괴하자 한국전쟁 이후 가장 극심하게 억눌려 있던 계급인 노동자들이 진출하기 시작했다. 파업과 쟁의가 급격히 늘어났다. 쟁의 건수는 1961년 4월에서 5월 사이에만 2백82건에 이르렀는데, 이는 1953년에서 1959년까지 연평균 41건의 7배에 달하는 것이다. 파업은 택시, 은행, 부두, 철도, 통신 등에 걸쳐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노동조합은 1959년의 5백88개에서 1960년에는 9백14개로 64퍼센트 증가했다. 기존의 어용노조를 민주화하기 위한 투쟁도 분출했다.

특히 사무직 노동자들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매우 빨리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어 나갔다. 교원노조, 연합신문노조, 전국은행노조연합회, 부산지구신문방송노조연합회 등이 만들어졌다. 이 중 교원노조는 4·19 이후 장면 정부의 개혁 후퇴에 맞서 다른 어떤 세력보다 급진적인 저항을 주도했다.

한편 4월 혁명은 극심한 반공체제를 뚫고 통일 문제에서 전향적인 자세를 취하는 운동을 출현하게 했다. 기존의 북진통일론 대신 중립화 통일방안 등이 그것이다. “가라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유명한 구호는 이 때 나온 것이다.

이것은 한편 완전하게 종속적이었던 당시 남한 경제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당시 급진적인 지식인과 학생들은 자립적 경제발전을 원했고, 이는 종종 반미구호를 통해 표현되기도 했다. 즉, 반제국주의적 주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장면 민주당 정부의 무능은 4월 혁명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교훈 중 하나다. 민주당은 4월 혁명 과정에서 무임승차해 정권을 잡았지만, 혁명의 전진을 가로막는 구실을 했다. 이들은 “혁명 과업이 완수됐으니 학생들은 학원으로 돌아가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장면은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는 것처럼 하더니, 오히려 데모규제법과 반공법을 도입해서 민중 운동을 탄압했다.

이 사실은 트로츠키가 제시한 연속혁명의 과제가 당시 남한에 정확히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분파들은 부르주아민주주의의 과제조차 수행하기엔 너무나 소심하고 무능력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 성장하던 노동계급의 투쟁으로 수행돼야 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당시 남한 사회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서울의 지배집단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시련이, 전쟁 전의 시기를 상기시키는 시련이 시작되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명백한 좌경화 경향이었다.”

1961년 2월 USOM(주한미국경제협조처) 부처장 휴 팔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면 정부가 이대로 4월을 넘기기는 어려울 것”이며 “공산혁명 혹은 이와 비슷한 극단적 사태가 일어날지 모른다.” 박정희는 이 ‘극단적 사태’를 반동 쿠데타로 차단했다. 다음 호에서는 이 과정을 다루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