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정치는 여성·성소수자·인종 차별 등 차별에 맞선 여러 운동에서 널리 수용된다. 오늘날 ‘정체성 정치’나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흔히 사용하지만, 이 개념은 1960년대 후반 이후 미국에서 여성·성소수자 운동 등이 부상하면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정체성은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 속하는가’라는 물음과 관련있다. 다시 말해, 정체성은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을 자각하거나 의미를 부여하게 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정체성 정치를 단순하게 다루는 경우가 흔한데, 사람들이 정체성 정치를 여러 의미로 쓴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정체성 정치’라는 용어는 1960년대나 1970년대 이후 여러 형태로 사용돼 왔지만, 때때로 상이한 사람들에게 매우 다른 의미로 사용됐다.”(위키피디아)

넓은 의미에서 정체성 정치는 특정 정체성에 호소해서 자신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행위를 가리킨다. 진보·좌파 세력만이 아니라 우파도 정체성 정치를 활용할 수 있다. 미국이나 유럽의 우파들이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고자 백인의 정체성에 호소하는 것이 그 예다. 이때 허구적 관념(“이주민 때문에 토박이 백인이 위협받는다” 등)이 사용되며 사회에서 천대받는 집단의 정체성을 비난하는 모습(예컨대, “무슬림 정체성이 사회 통합을 저해한다”)을 보인다.

좁은 의미에서 정체성 정치는 차별받는 집단들이 자신들의 특수한 정체성에 기초해 싸우는 운동의 전략이나 조직 방식을 뜻한다. 이 글에서 다루는 정체성 정치도 이것이다.

정체성 정치를 논할 때는 먼저 차별받는 사람들의 정체성 정치와 우파의 정체성 정치를 구별해야 한다. 차별에 맞서 변화를 위해 특정한 차별을 겪는 사람들이 모두 결집할 것을 호소하는 것과, 특정 집단을 배척하고자 데마고기를 펴는 정체성 정치는 사회적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진보적이지만, 후자는 반동적이다.

차별받는 사람들과 정체성 정치

모든 사상이 그렇듯, 정체성 정치를 이해하려면 그것을 진공 속에서 고찰할 수 없다. 사회적·정치적 맥락 속에서 살펴봐야 한다. 차별받는 사람들이 정체성 정치에 이끌리는 것은 자신이 겪는 차별의 현실에서 비롯한다.

차별받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을 저항의 형태로 느낄 수 있다. 여성 차별에 반대해 ‘여성들의 연대’를 호소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무지개 깃발을 들고 성소수자 자긍심 행진에 참가하는 것은 성소수자들에게 신나고 자신감을 주는 경험일 수 있다.

한국에서 정체성 정치가 집단적 저항의 방식으로 사용된 가장 인상적인 경험은 2018년 ‘불편한 용기’가 주도한 불법촬영 항의운동이다. 수만 명이 참가한 이 대중운동의 주도자들은 분리적 페미니스트로서 ‘생물학적 여성’의 단결에 강하게 호소했다. 비웨이브(워마드 주도)의 낙태 합법화 운동도 이런 사례다. 이들은 남성을 공공연히 배척하며 생물학적 여성의 단결을 강력히 주장했다.

정체성 정치가 대중 시위에 사용된 사례 2018년 10월 불편한 용기 주최 5차 편파판결, 불법촬영 규탄시위 ⓒ이미진

그러나 분리적 페미니스트들만 정체성 정치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보다 완화된 형태로 ‘여성 연대’를 호소하는 경우가 더 흔하다. 한국 여성운동의 주류인 엔지오 여성단체들은 1990년대부터 개혁 입법 활동과 여성 정치인 배출을 위해 여성의 단결에 호소해 왔다. 여성의 경험은 남성과 완전히 다르고, 여성만이 여성을 대변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성소수자 차별에 맞서기 위해 성소수자끼리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정체성 정치의 사례다. 여기서도 성소수자들만의 연대를 추구하며 이성애자의 운동 동참을 거부하는 극단적인 형태가 있지만, 더 흔한 형태는 성소수자들의 연대를 핵심으로 보며 이성애자의 동참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한다.

이처럼 사회운동 내의 정체성 정치에도 여러 형태가 있다. 정체성 정치 옹호자들의 이데올로기적 색조에도 차이가 있다. 정체성 정치의 좌파적 버전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이 결합된다. 그보다 더 온건한 세력들의 정체성 정치는 자본주의를 문제삼지 않는다. 한국의 여성·성소수자 운동에서 지배적인 엔지오들은 자본주의 내에서 기성 권력자들에게 인정받으며 그 일부로 편입되는 전략을 추구한다.

정체성 정치가 차별에 맞선 운동에서 늘 강력했던 것은 아니다. 정체성 정치는 미국에서 1970년대부터 득세하기 시작해 1980년대에 번성했다. 한국의 사회운동에서 정체성 정치가 널리 수용된 것은 소련이 붕괴한 1991년 이후부터다. 정체성 정치의 득세는 혁명적 좌파가 이데올로기적 위기를 겪으면서 약화된 현실과 관련있다.

1980년대 한국의 여성운동은 여성해방을 전체 사회변혁의 일부로 보는 ‘변혁적 여성운동’이 지배적이었지만, 1990년대 초부터 여성운동의 주류는 국가를 타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협력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면서 국가의 지원을 얻고자 엔지오로 전환했다. 일상생활의 변화가 강조됐고 여성 정치인이나 여성 국가관료 배출이 여성운동의 핵심 목표가 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에 등장한 한국의 동성애자 운동에서도 정체성 정치가 이내 득세했다.

정체성 정치의 강점과 약점

차별받는 사람들에게 정체성 정치는 호소력이 있다. 그 강점은 공통된 분노와 정의감에 호소해 많은 사람들을 차별에 맞서는 운동에 동참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런 식으로 모인 사람들의 규모가 클수록 차별받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단결해 있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는다. 그 운동에 처음 참가한 사람들일수록 이런 느낌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젊은 여성들이 참가자의 대부분을 차지한 불법촬영 항의운동에서 이런 정서가 두드러졌다. 이 운동의 주도자들은 기성 운동 단체들의 참가에 반대하며 ‘정치 배제’를 선언하는 아나키즘적 성향을 띄었는데, ‘정치’가 개입되면 운동이 분열하므로 ‘여성’을 강조해야 운동의 단결이 유지될 수 있다고 봤다.

정체성 정치에 장점이 있지만 약점도 많다. 정체성 정치에 무비판적인 경향이 사회운동에 널리 퍼져 있으므로, 약점을 명확히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차별에 맞서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정체성 정치에 깔린 핵심 가정은 특정 차별을 받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모두 단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여성이나 성소수자, 흑인 등이 각각 비슷한 차별의 경험을 겪는 듯해도, 이들의 삶은 계급에 따라 매우 다르다. 호화주택에서 살며 청소, 요리 등 온갖 궂은 일을 노동자들을 고용해 처리할 수 있는 부유층 여성들은 노동계급 여성들과 처지가 같지 않다. 자본가 계급의 성소수자와, 성적 지향이 드러나 해고될 위험에 떠는 노동계급 성소수자의 삶도 다르다. 특정 차별을 겪어도 부유한 사람들은 차별로 인한 효과를 완화할 자원이 있다.

지배계급 여성이 투표나 이혼의 권리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자본주의 초기 때조차 지배계급 여성 대다수는 투쟁적인 여성운동과 거리를 뒀고, 노동계급이 벌이는 파업과 시위에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단일한 여성운동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 운동은 결코 단일한 운동이 아니었다. 참정권 운동 내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노동계급적 운동과 중간계급 페미니스트들이 주도하는 운동이 경합을 벌였다. 출신 배경이 다른 여성들이 때때로 함께 시위를 벌였지만, 계급 문제 때문에 단결은 지속되지 못했다. 상층 계급의 여성참정권론자들은 투표권을 만병통치약으로 여겼고 노동계급의 처지에는 무관심했다.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여성 활동가들 사이의 계급적 차이는 더 첨예해져 상층 계급 여성들은 거의 전폭적으로 전쟁을 지지하며 참정권 요구를 포기했다.(관련 기사: 영화 〈서프러제트〉: 여성 참정권 투쟁의 진정한 역사)

정체성 정치를 통해 대중적 집결이 이뤄진다 해도, 이런 결집은 언제나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운동 참가자들의 계급적 배경이나 정치적 지향이 상이하므로, 운동이 성장하면 운동의 방향을 놓고 정치적 차이가 커지기 마련이다.

정체성 정치는 차별받는 사람들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계급적 차이를 무시하기에, 정체성 정치는 운동 내에 존재하는 목표와 전략적 차이를 가리는 효과를 낸다.

정체성 정치의 핵심에는 자율 사상이 있다. 특정한 차별을 받는 사람들 자신이 그런 차별에 맞선 투쟁을 이끌어야 한다고 본다. 차별받는 사람들이 스스로 투쟁할 것을 강조하는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차별받는 당사자만이 투쟁을 잘 할 수 있다는 주장은 문제가 있다. 차별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의 동참을 이끌어내서 투쟁을 더 강력하게 만드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특정 정체성을 중심으로 운동을 조직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특정 차별을 직접 겪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이해할 수 없기에 함께 싸울 수 없다는 비관적인 생각이 깔려 있다. 이런 생각은 차별에 맞선 투쟁이 노동계급의 계급투쟁과 무관하다고 여긴다. 또, 노동계급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혁명적 좌파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담겨 있다.

정체성 정치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서구 학계를 지배한 포스트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들에 기반을 두었다. 이런 사상은 사회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거부하며 정치·경제·이데올로기 영역을 서로 별개의 것으로 본다. 현실의 파편성을 강조하며 국지적 저항만이 가능하다고 여긴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이 학계와 주류 언론들에 의해 널리 퍼졌다. 1989년~1991년 동유럽과 소련의 스탈린주의 체제 붕괴를 보며 혁명적 사회 변화의 전망을 잃어버린 활동가들이 개혁주의로 이동하면서 이런 지적인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았다. 혁명적 변화를 부정하면서 계급과 계급투쟁을 배격하는 분위기가 진보진영에서 유력해졌다.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개념을 거부하는 것은 차별 문제를 계급구조와 분리시켜 개인의 경험 중심으로 본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정체성 정치는 차별을 개인적 피해로 여기게 해 집단적 저항을 호소할 때조차 시나브로 집단적 조직의 효과를 떨어뜨린다. 개인들의 피해 경험 드러내기를 고무하며 운동의 방향에 대한 이견 제시, 비판 등 정치적 주장을 펼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개인의 피해를 기준으로 불평등 문제를 제기하면, 초점이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가 아니라 개인들 간의 위계나 차별에 맞춰지며 개인들을 성토하는 게 주가 된다. 그런데 차별을 주로 개인관계에서 찾으면 누가 차별 유지에 이해관계가 있는지 오해하기 쉽다. 남성 일반이 여성을 지배하고, 이성애자 일반이 동성애자를, 백인 일반이 흑인을 지배한다며 노동계급과 사회 운동 내에서 적을 찾는 경향이 생긴다. 이런 분위기는 운동에 불필요한 분열을 초래하며 운동의 파편화를 촉진한다.

개혁주의

정체성 정치는 차별받는 사람들의 단결을 주장해 운동의 방향을 지배계급 (일부)와 협력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반차별운동 내에는 국가기구를 통해 평등을 성취한다는 개혁주의 전략이 우세하다. 이런 운동을 이끄는 중간계급 인자들은 흔히 정체성 정치를 이용해 체제의 상층부로 진입하려 한다.

지배계급은 운동이 성장하면 그 운동의 상층부를 포섭해서 운동의 에너지를 흡수하며 운동을 약화시키려 든다. 반차별운동을 주도하는 중간계급 인사들을 국가기구로 흡수해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흔해졌다.

문재인 정부는 성차별 해소에 진지한 관심도 없으면서 중간계급 여성운동 지도자들을 상층부로 끌어들이면서 생색내기를 해 왔다. 동시에 노동계급 여성과 남성 모두의 조건을 악화시키는 공격도 벌이고 있다.(관련 기사: 문재인의 말뿐인 페미니즘)

생색내기로 일관해 온 문재인 정부 2017년 4월 대통령 후보 초청 성평등 정책 간담회에 참석한 문재인과 여성단체 간부들

이런 생색내기와 모순은 새삼스럽지 않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에 이미 그랬다. 1998년 초유의 심각한 경제 위기 속에서 김대중 정부는 노동계급에게 해고, 복지 삭감 등의 혹독한 긴축 정책을 강요하는 한편,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 계열 여성단체 간부들을 대거 정부와 여당에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여성단체 간부들이 대거 국가기구로 진출해 왔다. 여러 개혁 입법들이 만들어지고 이제 대통령도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시대가 됐지만, 대다수 여성들에게는 실질적 개선이 거의 없었다. 노동 개악으로 노동계급 여성들은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이 악화되고 있다.

국가기구에 진출한 여성운동가들은 국가기구를 책임 있게 운영해야 한다는 논리의 포로가 됐다. 여연 대표 출신인 한명숙은 국회의원, 장관에 이어 총리까지 됐지만, 그는 실질적 개혁을 제공하기는커녕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후퇴시키는 법안을 발의했고 여성 노동자 투쟁을 탄압하는 데도 동참했다.(관련 기사: 노무현 정부의 여성 차별을 돌아보건대 문재인 정부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

지난 민주당 정부 집권기에 주류 여성단체들은 그 정부들을 지지하며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에 대한 비판을 삼갔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의 생색내기식 대책과 노동 개악을 비판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노동자 투쟁에도 거의 무관심하다.

몇몇 개혁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보는 사람들은 국가가 여성운동을 흡수하려는 것을 경계한다. 이들은 흔히 여성들의 ‘자율적’ 운동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운동의 필요성만 얘기하며 운동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 운동주의로는 개혁주의의 대안이 될 수 없다. 불편한 용기가 불법촬영물에 항의하는 대중시위를 조직하며 엔지오가 주도하는 여성운동에 도전했지만, 그 운동의 정치적 약점(단일 쟁점주의, 분리주의 등)이 극복되지 못한 채 7개월 만에 중단됐고 다시 엔지오가 여성운동을 주도하게 됐다.(관련 기사: 올해를 달군 불법촬영 항의운동을 돌아본다)

어떤 운동이든 대중운동이 분출하면 그 운동 내에서 상이한 전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 운동이 분화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단일쟁점 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차별의 사회적 뿌리에 주목하며 지배계급의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혁명적 운동의 전망과 정치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한편, 한국의 성소수자 운동에서도 정체성 정치가 강력한데, 운동주의와 함께 중간계급 지도자들의 개혁주의가 공존한다. 후자는 개혁 입법이나 국가인권위의 지침 등을 활용하고 문재인 정부를 지지해 성소수자 차별을 없애려는 개혁주의 전략을 추구한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지금껏 성소수자 차별 개선에 어떤 관심도 보여 주지 않았고 심지어 차별을 부추기는 데 동조하기도 했다. 이에 실망해 성소수자 단체들이 비판적 성명을 내곤 했지만, 정부와의 협력 기조를 근본에서 바꾸진 않았다.

한국의 지배계급이 아직 성소수자 운동에 실질적 양보책을 취하지는 않고 있지만, 서구에서는 지배계급이 몇몇 개혁적 조처를 취하고 일부 운동가들을 체제의 상층부로 흡수했다. 투쟁적인 성소수자 운동이 초기에 비해 크게 약화됐고 현재 부유한 성소수자들이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관련 기사: 미국 성소수자 운동의 간단한 역사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

오늘날 서구에서는 대자본가들과 부르주아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성소수자 정체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이들도 노동계급의 일자리와 조건을 공격하기는 여느 권력자들과 마찬가지다. 기성 체제의 일부로 편입되기를 원하는 중간계급은 정체성 정치를 옹호해 왔지만, 노동계급 성소수자들의 조건 개선에는 무관심했다.

정체성 정치가 집단적 저항을 호소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지만, 개인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흔하다. 이것은 운동을 주도하는 중간계급적 인자들의 개인주의와 온건함에 잘 부합한다.

마르크스주의와 차별로부터 해방

정체성 정치는 여러 차별이 사회의 계급구조와 분리돼 각각 자율적인 원리로 일어난다고 본다. 이렇게 사회를 파편적으로 보는 시각은 차별을 개인의 문제로 보게 만들어 사회 변화에 비관적인 생각을 낳을 수 있다. 혁명은 불가능하고 기껏해야 온건한 변화만 가능하다고 보게 된다.

겉보기에는 별개의 현상으로 보여도 그것을 전체 사회의 일부로 봐야 한다. 차별의 형태와 경험은 사회의 작동 방식이라는 더 넓은 문제와 분리해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차별이 계급을 가로질러 일어나지만, 계급 관계와 분리돼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또, 차별의 특정 형태들과 경험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뀐다. 이를 테면, 자본주의에서 과거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난 구조적인 변화로 세계적으로 여성 수백만 명이 노동자가 됐고, 이로써 여성들이 차별을 경험하는 방식과 차별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에도 변화가 생겼다.

마르크스주의는 차별이 불변의 인간 본성에서 비롯한 게 아니라 역사적으로 특정한 사회의 산물로 본다. 계급 사회 이전에는 여성·성소수자 등에 대한 체계적인 차별이 없었다. 여성 차별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는 계급사회에서 발전한 가족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러 차별은 지배계급의 분열지배 전략과도 관련 있다. 소수의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이간질해 힘을 약화시키는 것은 계급사회에서 오래된 통치 전략이다. 성, 성적 지향, 피부색, 국적 등을 이용해 차별을 부추겨 노동계급의 단결력을 약화시키고 투쟁의 성장을 막으려 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 계급은 사회학자들처럼 하나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계급은 생산에서 사람들이 맺는 사회적 관계이다.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핵심 원동력은 임금 노동에 대한 착취에서 나온다. 그래서 계급관계는 그저 여러 사회관계의 하나가 아니라 핵심적인 사회관계이다.

계급은 차별의 원천일 뿐 아니라 권력의 원천이고 다양한 배경과 중첩되는 여러 차별을 겪는 사람들이 단결할 수 있는 잠재적 토대이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을 보편적 계급이라고 불렀다. 노동계급 사람들이 모두 똑같아서가 아니라 착취받으면서 자본주의에서 공통의 이해관계를 공유하며 계급 사회를 폐지할 수 있는 특별한 잠재력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차별 문제를 무시한다는 흔한 오해와 달리,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는 차별받는 집단의 투쟁을 옹호해 온 전통이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룩셈부르크 등은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 지지, 여성 해방, 인종차별 반대 등을 분명히 했고, 차별에 맞선 투쟁을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일부로 규정했다.

옛 소련, 동유럽 등 스탈린주의 체제가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한 것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오해와 왜곡이 많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들 체제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전통과 정반대인 국가자본주의 체제였을 뿐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노동계급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한다고 해서 여러 형태의 차별을 무시하거나 차별을 한낱 계급 적대감의 부수적 현상으로 환원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이 차별에 맞서는 투쟁을 지지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경제적 이득뿐 아니라 정치의식의 발전이라는 면에서도 아주 중요하다. 레닌이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은 “인민의 호민관”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이다.

자본주의에서 피착취 계급인 노동계급은 성·성적 지향·인종 등 여러 정체성으로 분열할 경우 이득을 보는 게 아니라 손해를 본다. 노동계급이 지배계급이 퍼뜨리는 이간질에 맞서지 않는다면 계급적 단결과 해방을 성취할 수 없다.

노동계급이 차별에 맞서 싸우는 것이 예정된 길은 아니다. 현실에서 노동계급은 적잖이 분열되는 모습을 보인다. 노동계급 내에서도 여성의 동일임금에 반대하거나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외국인 노동자나 난민을 배척하는 일도 일어난다.

하지만 이런 분열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사회주의자들이 이런 문제에 개입해 논쟁하면서 차별받는 사람들을 옹호하는 게 중요한 이유다. 노동계급 내 차별을 용인한다면 분열로 모두의 힘이 약화되고 조건 악화로 이어질 수 있음을 설득해야 한다.

차별로 인해 노동계급의 분열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지만, 노동계급은 차별에 맞서 단결할 잠재력도 갖고 있다.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를 보면 노동계급이 성, 성적 지향, 인종, 국적 등을 뛰어넘어 단결해 투쟁한 예들이 많다. 러시아 혁명으로 많은 여성 개혁 입법이 이뤄졌고 가사의 사회화가 추진됐다. 동성애가 합법화됐고, 여러 피억압 민족이 자결권을 인정받았다. 내전과 혁명의 고립 속에서 부상한 스탈린주의 관료에 의해 혁명의 성과가 후퇴하고 마침내 1920년대 말 이후 사라졌지만, 러시아 혁명은 노동계급 혁명의 잠재력을 잠시 보여 줬다.

여성해방을 향한 거대한 발걸음을 내딛었던 러시아 혁명

차별받는 사람들의 운동은 노동계급의 투쟁이 전진할 때 성공을 거두기 쉽다. 노동계급의 자신감이 고양되는 계급투쟁의 상승기 때에는 착취뿐 아니라 차별에 맞선 투쟁도 많이 일어나며 둘이 결합되기도 쉽다. 사회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의 조직과 운동 속에 뿌리내린 곳에서 그런 일들을 성공적으로 벌인 사례가 세계적으로 많다.

차별에 맞선 운동이 효과적이려면 특정 정체성에 따른 조직 방식이 아니라 최대한 광범한 사람들에게 함께 싸울 것을 호소해야 한다. 특히 노동계급의 참가를 환영해야 한다. 차별받는 사람들의 다수가 노동계급이다. 무엇보다, 노동계급이 차별에 맞선 투쟁에 대거 참가한다면 그 운동의 힘이 커져서 지배계급에게 실질적인 양보를 얻어낼 가능성이 높아진다. 지배자들은 대중운동을 쉽게 제쳐버릴 수 없고, 이윤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급진화를 특히 두려워한다.

이윤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차별받는 사람들 대다수의 삶이 지속적으로 나아질 수 없다. 경제 위기가 장기화되며 더 깊어지는 상황에서는 평등을 위한 개혁 입법도 보수적 공격을 받으며 유명무실해지거나 후퇴하기 쉽다.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노동계급은 실업, 노동조건 악화, 빈곤, 분쟁이나 기후 위기 등으로 고통을 겪는다. 차별받는 사람들이 해방되려면 평등을 위한 투쟁을 착취와 차별을 낳는 자본주의를 폐지하는 혁명적인 전망과 결합시켜야 한다. 착취와 차별 모두에 맞서는 노동계급의 정치적 투쟁이 성장해, 이윤이 아니라 대중의 필요가 중심인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